145화 복수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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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복수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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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복수의 대가
2023.04.21.
목이 꺾인 예스텔라가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흐르는 예스텔라는 검은 흉이 얼룩덜룩해서 인간이라기보다는 망가진 인형처럼 보였다.
요한은 별 감흥 없이 죽은 예스텔라를 보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처형식 때 죽일 걸 지금 죽였으니 번거롭게 됐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놔야겠군.”
귀찮은 일이 더 생겼지만 어쩔 수 없다.
상대에게 아무리 큰 고통을 주고 싶다고 한들, 현재 에스텔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렇게 요한이 발걸음을 돌릴 때였다.
크르르륵…….
그늘진 감옥 구석에서 기묘한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요한이 눈썹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예스텔라의 시체.
그 위로 검은색 기운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것이 에스텔을 저주했던 기운인가?’
보기만 해도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로 괴이한 기운이었다. 검은 안개가 괴물의 머리 같은 형상을 빚었다.
마물이 입을 열었다.
[너라면 이 여자를 죽여버릴 줄 알았다.]
손가락 끝까지 저릿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이 여자는 번번이 네게 방해였을 터이니. 오히려 꽤 늦은 편이지. 덕분에 계획을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됐어.]
“네가 성황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
“맞나 보군.”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요한은 마력을 끌어올려 마물을 감쌌다.
“성황이 아니라면, 성황 뒤에 숨어 내 부인을 저주한 범인이겠지.”
[…….]
“가만 보니 얼굴이 제법 익숙한데.”
요한은 팔짱을 낀 채 괴물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리고 조롱하듯 매끈한 입매를 비틀었다.
“아아, 그때 내가 죽였던 그 마물 새끼 아닌가. 아직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이딴 쓰레기에게 붙어서 연명이나 하고 있었나?”
[오만한 놈!]
“칭찬 고맙군.”
[크하하하하하!]
마물이 흥분했는지, 검은 기운이 흐트러졌다.
[어디 한번 발악해 보거라. 넌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운명이니-]
“그 전에 성국에서 열심히 숨어 있어.”
요한은 마물의 말이 다 끊어지기 전에 마력을 두른 손으로 마물을 후려쳤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짓밟아줄 터이니.”
검은 기운이 서서히 흐려졌다.
‘뭔가 수작을 부려놓은 거야.’
요한이 짜증스럽게 주위에 아직 남은 마물의 기운을 터뜨렸다. 이것들을 처리한다 해도 타격을 줄 순 없겠지만, 번거롭게 만든 분풀이는 해야겠다.
그 순간.
요한의 눈에 예스텔라의 쇄골 부근에 있는 검은 백합 낙인이 보였다.
과거 리베르탄의 보호 마법이었을 그 낙인이 금이 가듯 쩌저적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황금색 나비 문양이 조금 드러났다.
‘황금 나비라면…….’
전설 속 요정의 상징물이다.
‘다시, 요정이군.’
하지만 황금 나비 문양은 마물의 기운에 잠식된 듯 점점 검게 물들어갔다. 금방 수를 쓰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요한이 막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죽었던 예스텔라의 팔이 꿈틀거렸다.
‘저 문양, 잘 몰라도 예스텔라의 목숨과 이어져 있는 거다.’
예스텔라와 요정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요정을 도와준다면.’
다시 예스텔라를 살려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요정을 돕기 위해 예스텔라를 처리하지도 못한 채 질질 끌어야 할지 몰랐다.
‘네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그 가짜랑 어디 한번 노력해봐! 네게 돌아올 건 배신밖에 없을 테니까.’
‘그 여자는 당신 아이를 임신하지 못해요. 임신한 척 당신을 속였지요?’
하지만 에스텔은 임신했다.
그러니 예스텔라의 말은 여태 그랬듯 정신병자의 헛소리에 불과했으리라.
‘그런데 뭔가 알고 있었던 거라면?’
혹여 요정을 구하려 했다가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러다 에스텔이 아프기라도 한다면.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나비의 황금색 날개가 파르르 떨었다. 마지막 도움을 청하듯. 하지만 요한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다.”
요정은 그의 은인이다.
“나는, 너를 돕지 않을 거야. 나한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
어째서 그를 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요정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완전히 검은색에 물든 나비가 산산조각 났다.
***
태몽을 꾼 지도 한참이 지났다.
나는 후원하던 재단을 더 키우고, 본격적으로 공작 부인 일에 매진했다.
다행히 입덧도 사라지고, 몸은 더 건강해졌다. 헨리 씨는 일을 하는 게 내 건강에 더 좋은 것 같다는 진단까지 내렸을 정도였다.
“베티, 잠깐 이리 와볼래?”
나는 결혼식 준비도 다 끝내고 최종 검토를 하고 있는 베티를 불렀다.
“지금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이벤트, 요한이 모르는 거 맞지?”
“그럼요, 아주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어요. 탐탁지 않지만 에리히까지 동원해서 하고 있는걸요.”
“역시 베티야. 아주 믿음직스러워.”
꼭 비밀로 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요한 몰래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요한이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웬만해서는 잘 놀라지 않는 요한이지만, 꼭 서프라이즈가 성공해서 기뻐해 줬으면 좋겠다.
‘일부러 페트리샤한테 부탁까지 해서 요한 가족들의 초상화를 구했으니까!’
물론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수준이라, 새로 화가를 불러다 그림을 그려야 했다. 거기다 내가 따로 가족 초상화처럼 룬과 나, 요한이 있는 그림도 그려두었다.
괜히 내 의도가 잘못 전달될까 걱정되는 마음에 편지도 썼다.
‘이렇게 많이 써도 되나 싶지만.’
총 12장이나 되는 편지지만, 이것도 몇 번이나 갈아엎고 새로 쓴 것이었다.
‘요한은 내 정성을 알아봐 줄 거야.’
두근-
왠지 배 속에서 아기가 내 마음에 동의라도 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있지, 나 요한을 깜짝 놀라게 할 거라 생각하니까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벌써 설레는 거 알아?”
“그러실 것 같았어요. 마님께서 본격적으로 준비하신 첫 이벤트잖아요.”
“맞아. 이런 것 때문에 요한이 나한테 깜짝 선물을 계속 주나 봐.”
매번 좀 알려주면 어디 덧나냐고 투덜거렸지만, 요한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주인님이 어디 보통 분이신가요. 요즘 바쁜 일이 있지만 않으셨어도 금방 들켰을걸요. 진짜 이번이 되게 희귀한 기회긴 해요.”
“요한이 바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되나 싶긴 하지만.”
“대신 힘들수록 마님께서 준비하신 선물을 보고 두 배로 더 기쁘실 테니까요!”
베티와 내가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요한의 최측근인 베티와 에리히, 페트리샤까지 나섰지만 요한은 원체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아마 최근 할 일이 많지만 않았어도 진작 들켰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날짜가-
“리베르탄 공작가의 화형식이네.”
생각해 보면 참 질긴 처형식이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반역죄가 씌워졌을 때 모두 처리되었어야 할 이들이었으니까.
‘대신 더 끔찍한 방식으로 죽게 되었지.’
원작에서는 나온 적 없는 펠시스 후작가 역시 리베르탄 공작가의 수순을 밟아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제 원작은 완전히 극복된 건가?’
종종 원작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까지 얽매일 것도 없었는데 말이지.’
내가 그렇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현실에서 원작과 들어맞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정의로운 남자주인공 리안드로.
죽은 줄 알았던 친딸 예스텔라.
그들 모두 불명예를 뒤집어쓴 채 화형에 처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난 이미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화형당한 줄 알았어. 시간이 너무 지나서 그런가.”
“사실 저는 계속 신경 쓰고 있긴 했어요.”
베티가 슬며시 내 눈치를 살폈다.
“모두가 화형식을 다들 엄청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 정도야?”
“그럼요, 펠시스 후작가도 후작가지만 리베르탄 공작가는 비할 게 아니죠. 오늘 수도를 돌아다닐 때 따라다니면서 돌 던질 거라고 미리 돌 모아두는 사람도 있던데요. 마님만 아니었으면 저도 가서 돌 던지는 건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볼래?”
“에이. 됐어요, 저 대신 던져줄 사람도 많은데요.”
베티가 갈색 눈동자를 굴리며 밝게 말했다.
“그 자리에 계실 주인님께서 알아서 잘 해주시겠죠.”
“맞아, 요한만큼 잘할 사람이 어딨겠어.”
화형식에 가 있을 요한을 생각하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요한도 감회가 새롭겠어.’
요한의 복수는 이미 이루어졌다. 하지만 화형식으로 진짜 끝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마님, 혹시 그 처형식에도 직접 가보고 싶으신 건 아니죠? 너무 잔인한 광경이라 가보고 싶으셔도…….”
“안 봐도 돼.”
“진짜요?”
예스텔라와 내 악연을 알고 있는 베티가 놀랐다.
“사실 저라면 죽는 것까지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꼭 보러 갈 것 같아서요.”
“뭐, 악연이긴 했지.”
악연이란 말로 더 표현하기 어려운 리베르탄 일가와 내 관계.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재판 때 이미 볼 건 다 봤는걸.”
요한의 반대에 부딪혀서라도 일부러 간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때 그렇게라도 끝을 봐두지 않으면, 내내 신경 쓰일 것 같아서.
‘힘든 광경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속은 다 시원해졌다.
“그보다 요한이 오면 서프라이즈해 줄 준비나 하자.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어.”
“네! 좋아요!”
그렇게 막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욱신-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 마님?”
내가 돌연 거친 숨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베티가 내 안위를 살폈다. 나는 갑자기 시작된 복통에 주저앉았다.
“마, 마님? 어디 아프세요? 아직 산달이 되려면 한참 남으셨는데.”
“……베, 티…….”
“어쩌면 좋아! 제가 당장 헨리 씨를 데려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눈앞이 샛노랗게 질렸다.
‘아이가 잘못된 걸까?’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생각에 겁이 나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베티. 아기가 잘못되면…….”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잠시 가벼운 소란이 생긴 것뿐이에요. 헨리 씨! 헨리 씨! 헨리 씨, 마님께서-!”
“마님,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제가 바로 진찰을-”
그렇게 나는 배를 감싸 쥔 채 쓰러졌다.
***
불길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죽어라! 악한!”
“제국의 기생충! 너 같은 것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는지 알아?”
“어디 사칭할 게 없어서 신을 우롱하고, 가엾은 에스텔 성녀님을-!”
리베르탄 공작 일가는 화형을 당하는 중에도 돌팔매를 맞았다.
끔찍한 최후였다.
분명 속 시원한 마무리여야 하건만, 요한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지?’
화르르륵-
아아아악! 아악! 살려줘!
리베르탄 일가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쳤다.
마침내 그 비명이 멎은 순간이었다.
‘내가 요구하는 대가는 네 미래다. 네가 절대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는 미래를 대가로 받아가지.’
‘그런 애매한 조건으로 사기 칠 셈인가?’
‘오, 절대 아니야. 믿기지 않으면 네 보호 마법을 한번 확인해 보던지.’
보호 마법은 악마의 말이 진실이라 했다.
‘미래를 가져간다는 건, 그저 네 가능성 하나를 막아둔다는 것뿐이야. 네게는 이득밖에 없는 거래지.’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어차피 네가 바라지 않을 미래일 뿐이다. 그것으로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면, 아주 성공적인 거래 아닌가?’
두근-
심장이 아파왔다.
‘네 복수에는 어떤 지장도 없으니까. 오히려 네가 더 완벽한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가깝지.’
‘네가 퍽이나 날 돕겠군.’
당시 어린 요한은 악마의 말을 섣불리 믿지 않았다. 하지만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하나 허락하지. 어차피 내겐 복수 외에 원하는 미래 같은 건 없으니.’
‘현명한 선택이야.’
악마가 찢어질 듯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 그 미래를 위해서 지금 당장 네 기억을 가져가마. 내 대가는 지금부터다.’
그리고 악마가 요한의 기억을 가져갔다.
‘그때, 악마가 가져간 건…….’
악마는 둘의 거래에 대한 기억을 가져갔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억만 가져가겠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함정에 빠졌다.
악마가 따로 가져간 기억이 없다고 여겼으니까. 당장 중요한 기억 중 빈틈이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냥 너에 대해서 좀 알게 돼서. 그래서 무시하고 내버려 둘 수 없었어.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점점 뚜렷해진다. 오밀조밀하고 귀여운 얼굴.
‘나는…….’
곧 눈물을 흘릴 것처럼 벌게진 눈가로, 어린 그를 안아주던 사람.
에스텔이다.
에스텔이, 그때 그를 도와준 요정이었다.
‘미래에 요한 네 부인이 될 사람이야.’
요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아, 레이몬드.”
레이몬드가 비틀거리는 요한을 부축했다.
“안 그래도 최근 너무 무리하신다 싶었습니다. 몸이 안 좋으시면…….”
“에스텔이 위험해. 당장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간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그 순간 멀리서 블란쳇 공작가의 인장을 단 기사가 급히 달려왔다.
“주군, 큰일 났습니다. 마님께서……!”
요한은 듣지 않아도, 악마가 대가로 받아간 미래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