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기분 좋게 해줄게 (143/182)


143화 기분 좋게 해줄게
2023.04.14.



 
배를 감싼 요한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요한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가 잘못 말했다.”

“응?”

“나름 잘해본다고 애썼는데, 부인이 더 신경 쓰이게 했네.”

그가 내 귓가에 입술을 맞췄다. 어쩐지 목소리가 시무룩하게 느껴졌다.


‘나 좀 봐.’

뭐가 그리 신경 쓰인다고 나를 위해 애써준 사람을 슬프게 만든단 말인가.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뭐라고.’

“미안.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는 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요한이 그렇게 안 했으면, 나만 고생했을 텐데 뭐. 요한이 잘한 거야. 내가 이상한 부분을 지적한 거고.”

요한을 보며 애교스럽게 웃었다.


“많이 속상했지, 내가 미안해. 요즘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런가 봐.”

“일부러 그렇게 말 안 해줘도 돼.”

“사실이야. 나도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아는걸. 설사 요한이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들 잘못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다들 벌 받아 마땅했고.”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하지만 나조차도 그런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요한이 진짜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니까.

혹시나 대비를 부족하게 했다가, 내가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나는 요한의 행동에 트집 잡을 게 아니라 고마워해야 마땅했다.

그래서 나는 요한의 손을 꼭 잡았고, 요한은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집요하게 나를 살폈다.

혹시나 내 얼굴에 걱정이나 찝찝함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찾아내는 눈빛이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내가 더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한. 나를 위해 복수해 줘서 고마워.”

“…….”

“요한이 나 대신 움직여줘서 쉽게 다 처리할 수 있었어. 요한이 아니었다면,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증언한 대로 괴물이 되었거나 모함을 당했을 텐데.”

“…….”

“그동안 펠시스 후작이나 리베르탄 공작 부부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나는 흑마법을 풀기 위해 요한이 들여야 했을 노고에 집중했다.

아무리 요한이 유능하다 해도 상대의 함정을 눈치채고 역으로 뒤집어씌우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되려면 더 힘들어.’

모든 게 완벽하다는 건, 그만큼 강박적으로 모든 걸 다 신경 썼다는 의미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당사자인 나는 요한의 마음을 알아줘야 했다. 괜히 이상한 곳에 집중해서 아끼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나 주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내가 방금 전 기뻐하지 못했던 건 요한의 잘못이 아니고 내 실수야.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나 봐. 진짜 미안해.”

“난 부인이 사과하는 거 싫어.”

“그러면 음, 고맙다고 할게. 내가 실수해도 계속 나를 신경 써줘서. 그리고 나를 구해줘서.”

요한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기분이 풀렸나 봐!’

나는 사소한 것도 며칠 내내 고민하는데, 요한은 빨리 풀려서 너무 다행이다. 나도 그런 점을 배워야 할 텐데.


‘에스텔, 이제 다 해결됐으니 예민해지지 말고, 좋은 것만 더 생각해야지!’

나쁜 사람들 때문에 요한과 사이가 나빠진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다. 그러자 요한이 달콤하게 속삭여줬다.


“나야말로 늘 미안하고, 고마워.”

그가 내 이마와 콧등, 볼에 가볍게 소리 내어 입을 맞춰줬다. 그의 온기가 닿자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다는 게 실감 났다.

요한은 나를 꼭 품에 안고 내 정수리에 뺨을 기대었다.


“눈에 해로운 것들만 봐서 우리 아기한테 악영향을 주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

“배 속의 아기도 아빠가 나쁜 놈들 다 무찔러줘서 속이 시원했을 거야.”

“과하게 폭력적이지 않았을까?”

“우리 아기는 나랑 요한을 닮았을 테니까 고작 그 정도로 힘들어하진 않을 것 같은데.”

“날 닮았다면 상관없겠지만, 부인을 닮았다면 마음 아파하고 있을지도?”

“도대체 요한은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은 아니거든?”

장난스럽게 요한의 가슴팍을 툭툭 쳤다.

그때 짤그락, 요한의 품에서 유리병 같은 게 주먹에 닿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자 요한이 씩 웃으며 품에서 병을 꺼냈다.

녹색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병에 담겼는데도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딱 봐도 불길하고 심상치 않아 보이는 물약이다.


“그건 뭐야?”

“내가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조종하느라 썼던 거. 급하게 만드느라 여분이 좀 남았거든. 처리하는 걸 잊었네.”

요한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잠깐 여기 있어봐. 내가 이거 처리하고 올게.”

“그냥 처리하면 안 되는 거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위험할 수도 있고.”

요한은 슬쩍 내 관심을 물약에서 치우려고 했지만, 내 관심은 이미 그 물약에 꽂히고 말았다.


“그런데 그 물약으로 어떻게 조종한 건데? 흑마법으로 만든 물약인 거야?”

물약을 다시 품에 넣으려던 요한이 나를 힐끔 보며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궁금해?”

“조금?”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인한테까지 비밀로 해야 할 건 아니니까.”

요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물약을 옆에 있는 탁자에 놓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이 약은 구름나무 꽃을 원료로 만든 물약이야.”

“구름나무……?”

의외로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응. 구름나무 꽃에 마력을 막는 효과가 있거든. 그래서 이렇게 물약으로 만들면 물약을 마신 상대의 마력을 막아버릴 수 있어.”

“그런데 요한은 요한이 원하는 대로 조종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요한이 입가를 의미심장하게 들어 올렸다.


“보통은 막는 데서 그치지만, 이 물약에 시전자의 마력을 담으면 시전자가 물약을 마신 사람의 몸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어.”

“아아, 그런 식으로.”

“물론 나보다 마력이 약하고, 눈치채지 못할 때에나 가능한 방법이긴 해.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마력이 거의 없어서 손쉬웠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 부인한테는 어떤 효과가 날지 모르니 절대 가까이하지도 마. 알았지?”

구름나무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뒤늦게 진득한 요한의 눈빛을 느끼고 어깨를 움찔했다.


“왜 그렇게 봐?”

“나한테 실망했어?”

“실망 안 했어. 오히려 나한테 솔직하게 다 말해줘서 기분 좋은걸.”

“부인 말대로 내가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게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웠는데도?”

요한이 내 턱을 쥐고 엄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사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 그들이 준비해 둔 흑마법을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거든. 그런데도 난 일부러 그들을 더 나락으로 빠뜨렸어.”

“나한테 못된 짓을 저지른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너한테 그들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지은 죄로만 벌 받게 하는 게 너무 부족하게 느껴져서.”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그들에게 네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게 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다소 정의롭지 못한 방법을 많이 썼지.”

“……요한.”

“평생 네가 말한 걸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만 있었다면서.”

요한이 말한 건, 과거 내가 말했던 내 상처에 대한 것들이었다.


“다들 네가 진실을 말하는데도, 네가 진실을 말할 리 없다면서 무시하고 괴롭혔잖아.”

“그래, 잘했어.”

“그들도 똑같이 느껴봐야지. 단순히 지은 죄에 벌받는 게 아니라, 네가 겪었던 억울함과 분노까지도.”

나는 요한의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뭐야. 이렇게 말해주면 됐잖아.”

“응?”

“나, 요한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말해주기를 기대했던 것 같아. 솔직하게 다 털어놓기로 했으니까.”

요한은 나를 사랑한다.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다 나를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그를 탓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요한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몰라서 불안했던 것 같다.


“앞으로는 이렇게 다 말해줘. 알았지?”

똑똑.


“……누구세요?”

“룬이에요!”

끼이익, 문이 열리며 이제 혼자서 잘 걸어 다니는 룬이 들어왔다.

룬이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남색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지금 룬이 두 사람 방해해쏘?”

“아니야, 룬. 빨리 들어와.”

“룬은 의젓한 아이니까 방해하지 않고 갈게.”

괜한 오해를 산 것 같다.

그런데 요한은 오해를 풀어주기는커녕 눈썹을 들어 올리며 짓궂게 웃었다.


“맞아, 룬. 조금 있다가 들어와. 아빠가 엄마랑 단둘이 할 게 더 남았거든.”

요한이 장난스럽게 내 허리에 손을 둘렀다. 나는 당황해서 두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요, 요한.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맞잖아. 아직 우리 둘이 대화하는 시간 안 끝났는데?”

“그러면 룬은 갈 테니까 조금 있다 보러 와야 돼. 알았지?”

룬은 씩씩하게 웃으며 문을 꽉 닫아줬다. 나는 민망해서 요한을 퍽퍽 쳤다.


“자꾸 그렇게 장난치면 진짜 혼난다?”

“부인이 혼내준다고?”

“그래. 나도 화나면 진짜 무섭거든?”

입술을 삐쭉 내밀며 시위하자 요한이 사르르 웃었다.


“이햐, 너무 무섭다. 혼나지 않도록 부인 말 잘 들어야겠네.”

“어디 한번 두고 봐. 요한 너 진짜 나한테 크게 혼날 줄 알아.”

“알았어, 알았어. 그치만 난 혼나도 부인이 혼내주는 거라면 기대되는걸.”

요한의 입술이 내 얼굴에 마구 닿았다.


“그치만 부인이 화나는 건 싫으니까 기분 풀어줘야겠다.”

그가 나를 휙 들어 올려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 단단한 손이 내 몸을 덧그리며 기분 좋은 열감을 끌어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왜, 좋잖아.”

요한이 솜털까지 바짝 선 내 귓가를 깨물었다. 옷자락이 사르륵 올라가며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가만히 있어 봐, 기분 좋게 해줄게.”

 

***

인생이 이렇게 편해도 되는가 싶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베티에게 물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할 문제 같은 건 없어?”

“네! 그 악독한 죄질이 다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죽는 날만 기다리며 썩어가는 게 일이지.”

“성국도 아무 반응 없고, 그래도 명색이 성녀였잖아.”

“파면한 지가 언제인데요. 오히려 황제 폐하한테 송구하다면서 대표를 보내 설설 기고 있던데요.”

“그러면 오르테카 재상은?”

번뜩 재판장에서 심상치 않은 말을 내뱉던 오르테카 재상이 떠올랐다.


“그 배후는 밝혀졌어?”

“안 그래도 그게 좀 해결 안 되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마님께서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어요.”

베티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오르테카 재상의 배신에 정말 크게 분노하셨거든요. 그래서 지명수배도 내리고, 오르테카 후작저도 발칵 뒤집어서 어떻게든 다 밝혀내려 하시던데요?”

“그건 누가 밝혀내고 있는데?”

“저희 주인님이요. 진짜 믿음직스럽죠?”

요한이라면 안심하고도 남을 인선이긴 했다.


“그러면 진짜 내가 신경 쓸 일이 없다는 거네.”

“왜 없어요?”

베티는 내 손에 쓱 편지지를 쥐여주었다.


“마님께서 주인님을 위해 이벤트 해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대망의 편지! 편지도 아직 안 쓰셨고요!”

“아, 편지.”

막상 요한한테 편지를 쓰려니 부끄러워서 매번 뒤로 미루고 있었다.


“그거 말고 할 일은 없어?”

“이거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요! 마님의 마음을 주인님께 잘 전달해서 주인님을 행복하게 해주셔야지요!”

베티의 호응에 나는 다시 편지를 잡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요한에게.]


“요한이 행복해할 말이라…….”

 

***

지하에 불길한 검은색의 연기가 음산하게 피어올랐다. 연기 사이로 온갖 기괴한 괴물의 잔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렸을 광경이다.

하지만 요한은 익숙하게 긴 다리를 움직여 제단 앞에 도착했다.

요한이 고개를 까딱였다.


“있는 거 아니까 나와.”

그 순간 텅 비어 있던 제단의 한가운데에 새카만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손을 제단에 지탱한 채 고개를 까딱인 악마가 요한에게 물었다.


“쳇, 요한 넌 참 속이기 어려운 인간이라니까.”

“걸릴 거 알면서 매번 속이는 이유가 뭐지?”

“원래 악마는 그런 법이거든.”

악마가 킬킬 웃었다.


“그래서 이번에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이참에 이 제단을 모조리 없애버릴 예정이라서.”

악마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이 제단을 없애겠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 말 그대로야.”

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주의 매개부터 저주까지 다 알아냈으니 에스텔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 그러니 네가 더 필요할 일도 없겠지.”

“내 도움이 더 필요 없다고?”

“그래. 어차피 복수가 끝나면 흑마법을 다 정리할 생각이었어. 딱 맞춰서 끝낸 거지.”

흑마법은 균형을 어기는 힘이다.


‘지금은 아무 문제 없지만…….’

흑마법에 물들수록 예기치 못한 위험한 문제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딱 적절할 때 모든 걸 정리해야 했다.


“이햐, 이거 대단한데.”

악마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알아서 흑마법을 다 포기하는 인간은 처음 봤어. 흑마법이 아쉽지 않겠어?”

“그딴 힘 없어도 능력은 충분하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요한은 악마의 의미심장한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긴 논쟁은 그만하지. 이제 그동안 네게 가져갔던 내 대가가 무엇인지나 말해.”

그 순간 악마가 픽 웃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