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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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1.
재판장이 충격으로 술렁거렸다.
“그, 그렇다면 애초에 입양한 목적 자체가 흑마법의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단 건가요?”
“어쩜 그리 끔찍한 짓을…….”
데미안의 폭로는 끝나지 않았다.
“제 딸 예스텔라는 살아난 것으로도 욕심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녀라는 지위를 잃게 되자, 저희의 목숨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아, 아빠!”
새파랗게 질린 예스텔라가 급히 데미안에게 달려들었다.
“멈추십시오.”
하지만 근처에 있던 기사가 더 빨랐다.
“재판장에서 더 경솔하게 행동하신다면, 다리를 자를 것입니다.”
“그, 그렇지만 다 거짓말이라고요! 어떻게 저걸 다 두고-”
“예스텔라는 에스텔을 괴물로 만들어 블란쳇 공작 부인의 자리를 되찾겠다고 했습니다.”
데미안이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부모로 태어나 해준 것도 없으니 자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희생하라더군요.”
“아니야! 아니라고!”
“여기 예스텔라가 흑마법을 이용해 사용한 낙인이 있습니다. 제 아내 로자리아의 몸에도 저와 같은 낙인이 있을 겁니다.”
데미안은 제 팔 위의 문양을 보여주었다. 가만히 있던 황제가 데미안에게 물었다.
“공작의 증언은 잘 들었다. 하나 여태 그 말을 하지 않다 갑자기 증언하는 이유는 뭐지?”
“사실, 저 역시 여태까지 스텔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네가 직접 스텔라를 위해 공작 부인에게 저주를 걸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하나 저희 부부는 여태 계속 스텔라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스텔라가, 살아난 뒤 흑마법으로 부모인 저희의 기억마저도 지웠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저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하는 데미안은 누가 봐도 자신의 죄를 후회하며 뉘우치는 완벽한 죄인의 모습이었다.
“저는 제 딸이 아니라, 괴물을 되살리게 되었으니까요.”
데미안이 더 말을 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데미안의 옆에 있던 로자리아 역시 데미안을 끌어안았다.
“폐하, 부디 제 딸의 모습을 한 저 괴물을 없애주십시오. 저희 두 사람의 마지막 바람입니다.”
“그만해요!”
예스텔라가 빼액 소리쳤다.
“엄마, 아빠.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저예요, 저. 부모님이 사랑하셨던 스텔라! 왜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는 거냐고요.”
“보십시오, 저 반성도 없는 얼굴.”
로자리아가 시체처럼 파리한 얼굴로 오열하며 말했다.
“지금 저 괴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제국 전체를 끔찍한 길로 몰고 갈 게 분명합니다. 부디, 저 괴물을…….”
예스텔라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안 돼요, 엄마. 그러지 말아요. 엄마랑 아빠는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분명 재판장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은 예스텔라의 편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미웠어도 이렇게 모든 것을 터뜨릴 이유도 없었다.
‘이건 꿈이야. 현실일 리 없어!’
그 순간 울고 있던 부모님이 뒤에 앉은 에스텔을 돌아봤다.
“그리고…… 차마 언급하기도 미안한 우리 딸 에스텔.”
그 순간, 예스텔라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왜 저 가짜를 보시는 거지?’
데미안이 에스텔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너에게 정말 못 할 짓을 많이 저질렀다. 감히 용서받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네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다.”
로자리아 역시 데미안을 따라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우리는 끌려간 뒤로도 마음 약하고 착한 너를 이용해서 살아남으려고 했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벌을 받아도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갑자기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게 사죄받은 에스텔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스텔라는 멍하니 부모님이 사죄하고, 또 사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에스텔, 에스텔, 에스텔!’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사죄는 재판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죄인들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습은 그 대상인 에스텔을 더 귀하고 대단한 여자로 보이게 했다.
“이제야 사과한다니. 염치도 없지.”
“그래도 반성하는 게 어디예요. 저 끔찍한 여자를 보세요. 아직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거죠. 괴물이라잖아요.”
“하긴, 죽었다 살아난 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저건 사실 시체일지도 모르는…….”
아무도 예스텔라를 봐주지도, 그녀의 사정을 귀담아들어 주지도 않았다.
‘도대체 저 가짜가 뭐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모님만큼은, 끝까지 예스텔라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저 간악한 가짜는 결국 그녀의 친부모님까지 훔쳤다.
“아니야! 다 아니야!”
예스텔라는 더 견딜 수 없었다.
“모두 다 속고 있어! 저딴 가짜의 말에 휘둘리지 마! 엄마, 아빠도 사과하지 마세요! 도대체 왜 사과하는 거예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예스텔라가 기사들을 뿌리쳤다.
“막아!”
기사들이 뒤늦게 소리쳤지만 예스텔라의 속도가 더 빨랐다. 예스텔라는 데미안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저 가짜 말고 저 좀 봐줘요. 제가 진짜잖아요, 부모님의 진짜 친딸. 저딴 가짜가 아니라 저를 봐줘야 하는 거잖아요!”
“…….”
“왜 내가 아니라 저 가짜만 보는 건데! 왜 다 가짜만 보는 거냐고! 도대체 왜!”
“…….”
“아, 그래. 지금 흑마법에 당한 거군요. 여러분, 이걸 보세요! 이게 바로 흑마법이에요. 친부모가 친딸을 고발하고 진실을 조작한다고요!”
하지만 그곳에 예스텔라의 편은 없었다.
“두 번째부터는 다리를 자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기사가 억지로 예스텔라를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게서 떼어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예스텔라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 그녀의 죄를 고발했다.
“-그동안 예스텔라는 흑마법을 통해 다른 사람의 정신도 세뇌해 왔습니다.”
“예스텔라와 잠깐이라도 시간을 보낸 분들은 모두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찬양하도록 세뇌를 다 걸어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뇌로 제국을 주무르려는 야망까지도…….”
줄지어 나오는 죄 중에는 예스텔라가 맹세코 짓지 않는 죄도 있었다.
‘이건 다 음모야! 저 가짜가-’
예스텔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봤다.
에스텔은 그녀와 달리 안전하게, 사람들의 위로와 배려를 받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요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였다. 요한은 에스텔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끌어안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죄는 다음에 받겠습니다. 지금 제 아내가 임신 중이라서요.”
“임신이요? 세상에, 그럼 저 괴물은 임신 중인 귀부인을 공격하려 했던 건가요?”
“적이라도 산모는 보호해 주려고 할 터인데…….”
“상식이란 게 도저히 없는 괴물이잖아요. 저건 괴물도 더럽다고 피할 종자예요. 저런 것에게 걸려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에스텔이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아니에요. 이미 다 끝난 일이잖아요.”
“이게 끝났다고 될 일인가요!”
“그러니까요! 이렇게 착한 사람한테…….”
“공작 부인은 꼭 복 받으실 거예요. 이리 선하고 아름다우신 분에게 행복이 찾아오지 않으면 누가 행복해지겠어요.”
“생각해 보니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서둘러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더러운 걸 보면 태교에 안 좋아요.”
귀부인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에스텔을 걱정하고, 손을 토닥여주기도 했다.
‘저게 다 내 거여야 했는데.’
예스텔라는 증오를 주체할 수 없었다.
“죽일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이렇게 날 보낸다고 네가 행복해질 수 있을 줄 알아!”
그 순간, 쇄골에 있던 백합 문신이 꿈틀거렸다.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건 예스텔라를 끌고 가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예스텔라의 상태를 살폈다.
“이봐, 지금 죄인이 뭔가를-”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예스텔라의 하얀 피부가 검은색 줄로 쩌적 갈라졌다. 두 눈이 시커멓게 변한 예스텔라가 표독스럽게 발버둥 쳤다.
“죽여버릴 거야!”
추악한 발버둥.
무엇도 바꾸지 못한 어리석은 발악이었다.
***
재판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죄인들은 모두 극형을 선고받았다.
마지막에 예스텔라가 괴물로 변하며 이변이 생길 뻔했으나, 기사들의 제압으로 쉬이 마무리되었다.
리베르탄 일가는 모두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돌을 맞다가 불에 타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펠시스 후작가 역시 다른 날짜에 극형으로 처리되었다. 후작가가 저주를 걸려던 장소에서 황가의 귀중한 옥쇄가 발견되어 처벌 수위가 더 올라간 탓이다.
그리고 그전까지도 성녀처럼 고귀한 이미지였던 나는 고결하고 연약한 피해자 이미지가 더해져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참 이상했다.
‘정말 내가 뭘 할 필요가 없었구나.’
분명 내 일인데, 이상하게 부외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요한 혼자서 다 할 수 있었어…….’
물론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예스텔라를 고발하고, 나한테 사죄하며 죄인을 자청한 것은 정말 의외였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던 걸까?’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린 시절의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참 좋아했을 텐데.’
이제 와서 듣는 사죄는 사람을 더 심란하고, 그래서 더 기분 나쁘게 할 뿐이다.
창문 바깥으로 휑한 숲이 보였다. 나는 블란쳇 공작저의 창문에 턱을 괸 채 하늘을 바라봤다.
“차라리 가지 말 걸 그랬나.”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했던 예스텔라는 기사들에게 제압당하며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물건을 던지며 조롱하는 귀족도 있을 정도였다.
어느새 예스텔라는 더없이 비참해진 꼴이 된 것이다.
‘……동정도 아까운 존재잖아.’
예스텔라의 계획이 실패하지만 않았더라면, 괴물이 되는 건 나였을 거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또 예민하게 반응해서-”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어느새 요한이 다가왔다. 그가 내 표정을 보며 말했다.
“역시 재판장에 데려가지 말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보는 게 나았어.”
아무리 찝찝해도,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더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요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데?”
“음, 꼽자면 조금 많을 텐데.”
“어떤 건데, 어디 한번 들어보자.”
요한이 자연스럽게 나를 안아 들고 침대에 앉혔다.
우리는 매번 중요한 얘기를 할 때마다 서로 손을 꼭 잡는 습관이 있었다.
두 손이 요한의 손에 잡히자 긴장이 좀 풀렸다. 요한이 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재판장에서 어떤 게 유난히 힘들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크게 힘든 건 없었어.”
“갑자기 펠시스 후작이나 예스텔라 리베르탄이 괴물로 변해 달려든 것도 괜찮았어?”
“놀라긴 했지만, 그런 건 진짜 상관없었어. 그보다는…….”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 재판은 요한이 다 준비한 거잖아?”
요한은 어느 곳 하나 못난 곳이 없는 남자였지만, 난 그중에서도 그의 붉은 눈동자를 가장 좋아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붉은 눈빛이 반짝이는 게 참 예뻐서.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증언했던 것도 요한이 계획한 거지?”
재판장의 상황은 갑작스러운 사건들로 가득했지만, 큰 사건이 터질수록 나는 모든 게 요한의 안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다른 때보다 준비한다고 더 바쁘게 움직였으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을지 상상이 안 갈 정도다.
“그렇지.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증언한 내용까지도?”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요한이 장난스럽게 말을 넘겼다.
“너무 많이 준비해서 부인이 다 알기엔 많이 어려울 텐데.”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
“알았어. 내가 뭘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공작 부부가 증언한 거, 어떻게 그렇게 증언하게 한 거야?”
“다 방법이 있지.”
“그래서 나한테 사과하게 만든 거고?”
내 말에 요한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왜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나한테 사과할 리 없으니까.”
“글쎄, 죽기 직전의 상황이잖아. 뒤늦게 죄책감을 느꼈을 수도 있지.”
“친딸을 배신하면서?”
어쩌다 보니 목소리가 차갑게 나왔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증언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어. 내가 알던 사람들치고 너무 완벽하게 사죄하더라고.”
“…….”
“자기변명 같은 걸 몇 마디 더할 법한 사람들인데, 참 이상하지.”
요한이 눈가를 접어 웃었다.
“역시 부인은 참 똑똑해, 속일 수가 없다니까.”
요한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 내가 했어. 부인한테 저지른 죄가 만천하에 완벽한 방식으로 공개되고, 그들이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처벌받길 바랐거든.”
“그랬구나.”
“물론 부인을 헐뜯는 소리를 또 듣게 하고 싶지도 않았어. 괜히 허튼소리 들으며 귀를 더럽힐 필요 없잖아.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감미롭게 대답해 주던 그가 내 손등 위에 키스했다.
“빈말이라도 부인이 사과를 받았으면 했어. 혹시 기분 나빴어?”
“나를 위한 거였잖아.”
하지만 내 안의 꺼림칙함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요한, 진실을 증언하게 만든 것만은 아니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보니까 그 사람들이 안 지은 죄도 털어놓더라고. 누구 하나 옹호할 수 없도록.”
“…….”
“만약 요한이 조종한 거라면, 거짓 죄도 뒤집어씌운 건 아닌가 싶었거든.”
요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면 안 돼?”
“그치만 그건, 조작이잖아. 굳이 그럴 이유가…….”
“그냥 솔직하게 다 털어놓게 했으면 이상한 소리까지 했을 거야. 죄를 축소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부인에게 괜한 오해를 사게 하는 소리도 했겠지.”
요한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깔끔한 죄인으로 만드는 게 뭐가 어때?”
“…….”
“그보다 우리 아기에 대해서 얘기할래?”
내 이마에 입을 맞춘 요한이 다정하게 배를 쓸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