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완벽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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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완벽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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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완벽한 복수
2023.04.07.
일순, 고요한 침묵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블란쳇 공작, 지금 공작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예, 폐하.”
“오르테카 재상이 짐의 오랜 충신이란 것도 알고?”
요한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이라.”
황제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오르테카 재상은 갑자기 모함을 당했음에도 아무런 말 없이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황제와 오르테카 재상은 무슨 사이지?’
황제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평범한 주군과 충신의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나만 느낀 것은 아닌지, 다른 귀족들 역시 황제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황제가 팔걸이를 꽉 쥐었다.
“블란쳇 공작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밑도 끝도 없는 의혹이기 때문에 대답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꿈틀, 요한의 발치에 깔려 있던 괴물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괴물에게서 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꺄악! 괴물이 살아났어요!”
한 귀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지, 진짜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괴물의 움직임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데 괴물의 반응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검게 물들었던 피부가 점점 멀쩡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은 뒤늦게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지금…… 저 괴물의 모습이 변하고 있는 것 맞지요?”
“그러고 보니 방금 괴물에게서 들려온 소리, 펠시스 후작의 목소리 아니었어요? 그러면 원래 후작으로 돌아오는 건가?”
“저기 보세요! 후작의 몸이……!”
괴물처럼 기괴하게 꺾였던 몸이 원래 상태로 뚜두둑 돌아왔다. 펠시스 후작이 가슴을 들썩이며 고통에 잠긴 소리를 냈다.
“사, 살려줘,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제발 나 좀 여기서 구해……!”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비명이다.
수군거리던 귀족들은 참혹한 비명에 돌처럼 굳어 고요해졌다.
“이런.”
요한은 밟고 있던 후작의 발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죽은 줄 알았더니 멀쩡하게 살아났네.”
“요, 요한 블란쳇 공작?”
펠시스 후작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요한이 후작을 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후작,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나?”
“사, 살려주게. 난 이대로 이렇게 괴물이 돼서 죽을 순 없어. 이렇게 끔찍하게 죽고 싶지 않아. 나를 구해줄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네. 제발 좀 구해줘……!”
펠시스 후작이 절박하게 요한의 발에 매달렸다. 그토록 자존심 높던 펠시스 후작의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그렇게 무작정 살려달라고 하면 내가 뭘 해줄 수 있겠어. 최소한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얘기해 줘야지.”
요한은 그런 후작의 행동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새삼 요한의 옷차림이 멀쩡하지 않다는 게 보였다.
‘저건, 피인가?’
검은 정장은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피로 얼룩덜룩했다. 워낙 펠시스 후작이 충격적이어서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한 블란쳇 공작의 옷이 상해 있잖아요.”
“그렇네요. 어디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뒤늦게 요한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펠시스 후작은 사람들의 시선에 더 두려운 것처럼 몸을 파르르 떨었다.
“거, 거래가 있었네. 나는 단지 가문을 지킬 수 있게 해주겠다는 그 거래를 받아들였을 뿐이야.”
후작이 기력을 다 빼앗긴 노쇠한 남자의 모습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그 거래에 내가 이딴 괴물이 된다는 조건 같은 건 없었어. 나는 사기를 당한 것뿐일세.”
“거래라. 어떤 거래였지?”
“성녀 예스텔라.”
후작의 푸른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오르테카 재상.”
방금 전까지 공포로 떨리던 목소리답지 않게 무척 명료한 발음이었다.
“두 사람이 감옥에 있는 날 찾아왔네.”
그러자 그동안 여유로웠던 오르테카 재상이 나섰다.
“폐하, 괴물이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의 말을 무슨 근거로 믿는단 말입니까?”
“진짜잖아! 자네가 성녀를 협조해서 블란쳇 공작 부인을 모함할 수 있도록 조력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바깥에 남은 내 사람들을 너희에게 잠시 빌려줬을 뿐이고!”
“펠시스 후작, 진정하시지요. 지금 잘못한 말 때문에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괴물이 되는 건 내가 아니었잖아!”
이성을 잃은 펠시스 후작의 입에서 충격적인 진실이 마구 쏟아졌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제물로 사용해서 블란쳇 공작 부인을 괴물로 만들어버리겠다며! 내가 피해 입을 건 아무것도 없다며!”
끔찍한 계획에 모두가 경악했다. 물론 가장 놀란 건 나였다.
‘나를 괴물로 만들 생각이었다고?’
듣기만 해도 소름 끼쳤다.
‘음모를 꾸미고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방금 전 예스텔라가 당황했던 모습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때에 맞춰 내가 변했어야 했던 거네.’
펠시스 후작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동원해 어떤 행동을 벌였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들은 나에게 저주를 걸어 괴물로 변하게 만들려 했다.
그것도, 예스텔라가 나를 흑마법사로 고발하려는 그 시점에.
‘사람은 시각적인 것에 약하지.’
내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조차 괴물이 되어 난동 부리는 날 보면 그 믿음이 흔들렸을 거다.
마지막으로 예스텔라가 성녀인 척 나를 없애며 그전까지의 일을 모두 묻어버리려 했을 거고.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른 채 살해당할 뻔했다. 펠시스 후작은 울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로 울부짖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애초에 나를 괴물로 만들어 모든 것을 뒤집어씌울 작정이었던 건가?”
“폐하, 억울합니다. 제가 그런 계획을 세웠다면 어찌하여 후작을 변하게 했겠습니까. 제가 범인이었다면 괴물이었던 후작이 살아나 저를 고발하게 두지도 않았겠지요.”
“내가 살아날 줄 몰랐겠지!”
“후작. 지금 후작은 너무 흥분했습니다.”
“자네가 내 꼴이 되었어도 멀쩡했겠나! 감히 나를 써먹고 버리려 해?!”
펠시스 후작의 모습은 비이성적이지만, 무척 진실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다들 요한의 말대로 오르테카 재상이 진범이라고 여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르테카 재상의 표정이 좀 이상하단 말이지.’
펠시스 후작에게 휘둘린 오르테카 재상은 점점 평온을 잃고 억울해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표정이 진심처럼 느껴졌다.
‘계획이 실패한 사람의 표정이라기보단…….’
나는 빠르게 주요 인물의 반응을 살폈다.
요한과 황제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 같았고, 예스텔라는 패닉에 빠진 것처럼 멍하니 펠시스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다.’
내 발끝을 시작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슬며시 퍼졌다.
‘진실을 보는 능력이라는 건 굉장히 포괄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너는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 힘을 빼앗아간 예스텔라가 세뇌로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조종했다고 했지?’
사실 이시도르 씨가 죽은 뒤, 나는 제대로 요정의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 블란쳇 나무가 불타버린 뒤엔 너무 미안한 마음에 그나마 나무와 대화하던 것도 멈췄다.
그 덕분에 내 안에는 요정의 힘이 쌓여 있었다.
‘예스텔라의 힘이 네게서 비롯된 만큼 너도 비슷한 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요?’
‘물론 흑마법으로 빼앗아가 변질시킨 힘이라 차이는 좀 있겠지만 할 수 있을 거다. 우선은 단순히 진실을 더 확장해서 보는 것부터 시작해 봐라. 그게 시작이니까.’
“애초에 그 이상한 제안 같은 건 받아들이지도 않는 건데! 이렇게 펠시스 후작가의 죄가 다 드러날 거였다면-”
오르테카 재상의 멱살을 잡을 듯 노려보던 펠시스 후작이 흠칫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후작의 푸른 눈동자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환영이 주위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
감옥.
펠시스 후작이 오르테카 재상에게 말했다.
“정말 이거면 펠시스 후작가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단 말이지?”
“확실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펠시스의 명맥을 지켜주기는 하겠지요.”
펠시스 후작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메마른 얼굴을 쓸었다.
“좋아, 펠시스 후작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어.”
“옳은 결정을 내리신 거예요.”
후작의 옆에 있던 예스텔라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원래 자리를 되찾게 된다면 후작가가 재건될 수 있도록 꼭 돕겠어요.”
“그 말 꼭 지켜야 할 거요.”
“지킬 수밖에요.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탄 동지잖아요?”
아무래도 펠시스 후작의 말대로, 세 사람이 음모를 꾸미던 순간인 모양이다.
‘이거만 보면 후작의 말과 똑같은데?’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오르테카 재상이 바깥으로 나섰다.
그때 오르테카 재상 아래에 깔려 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위로 익숙한 괴물이 불쑥 튀어 올랐다.
‘마물?’
마물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은 수작이었다. 이거면 요정의 마지막 보호를 무너뜨릴 수 있겠어.”
“확실한 거겠지?”
“확실하다마다. 내가 어디 잘못된 정보를 준 적 있나?”
“하긴. 사랑하던 아내가 괴물이 되었는데 여전히 사랑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
오르테카 재상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블란쳇 공작의 변심이면, 그 요정도 충분히 절망하겠지.”
머리색이 새하얗게 질리며, 백발에 자안을 가진 미청년으로 변했다. 보라색 눈동자만은 동일했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그 순간 오르테카 재상을 보던 마물의 붉은 눈동자만 움직였다. 눈동자가 정확히 나와 마주쳤다.
나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요정의 힘을 끌어모으며 마물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순간 마물의 내부로 마구 엉킨 무언가가 보였다.
‘저건 또 뭐지?’
녹색 실처럼 된 무언가가 구의 형태로 잔뜩 꼬여 있었다.
‘저 녹색이 좀 변하는 것 같은데…….’
녹색 실들 사이로 인간의 형체 같은 게 보였다. 검은색 그림자로 된 잔상이 슬쩍 보이려고 할 때였다.
“이봐. 조심해야겠어.”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요정이 네 생각보다 더 빨리 힘을 되찾았을지도 모르잖아. 아니다.”
마물이 킬킬 웃었다.
“이미 네가 지고 있을 수도 있겠어?”
***
하얀빛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건가?’
옆에 있던 베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님,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야.”
“걱정 마세요, 주인님께서 다 해결하실 거예요.”
어느새 상황이 또 바뀌어 있었다.
펠시스 후작이 오르테카 재상의 멱살을 쥐었다. 오르테카 재상이 그 손을 뿌리치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크으윽!”
펠시스 후작이 신음을 내며 앞으로 엎어졌다. 그 앞에는 오르테카 재상이 있었다.
그때 펠시스 후작을 붙잡고 있던 오르테카 재상의 반응이 조금 이상해졌다.
오르테카 재상은 후작의 몸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황제가 재상을 불렀다.
“오르테카 재상, 무슨 일 있나?”
“폐하, 저는…….”
오르테카 재상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나타난 재상의 얼굴은 사람들이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방금 내가 본 얼굴이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얼굴이 변한 거지?’
오르테카 재상은 제 머리를 엄지로 누르며 요한을 바라봤다.
“전부 네 수작인가?”
“그게 무슨 일이지?”
요한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재상이 이를 꽉 깨물며 요한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이겼다. 하지만 앞으로도 네가 이길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오르테카 재상의 모습이 사라졌다.
쾅!
황제가 팔걸이를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황당한 소란이란 말인가! 오르테카 재상이 왜 갑자기 모습이 바뀌고 사라진단 말인가!”
나도 황제의 혼란이 이해가 되었다.
‘솔직히 나도 이게 어떻게 되어가는지 잘 모르겠어.’
요한은 소란 속에서 홀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진정하시옵소서.”
“블란쳇 공작, 자네는 무언가 아는가?”
“물론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리 오르테카 재상을 고발하지도 않았겠지요.”
요한은 매끈한 얼굴로 웃었다.
“예.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요한. 너는 어디까지 알고,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야?
‘네 복수를 대신 해줄게.'
문득 요한이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
요한은 황제에게 간단히 말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소환하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내 옆에 앉은 요한에게 작게 물었다.
“요한, 도대체 무엇을 할 생각이야?”
“완벽한 복수.”
요한이 씩 웃었다.
그사이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시체처럼 생기 없는 모습으로 끌려왔다. 황제가 두 사람을 앞에 둔 채 말했다.
“왜 이곳에 나와 있는지 이유는 알겠지? 네가 저지른 죄를 빠짐없이 고하라.”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예스텔라를 힐끔 바라봤다. 예스텔라는 주먹을 꽉 쥔 채 애타는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예스텔라를 편들어줄 텐데.’
“저희는 딸을 살리기 위해 현 공작 부인인 에스텔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던 데미안이 예스텔라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두 부부는 예스텔라를 위해 에스텔을 끊임없이 학대했습니다.”
“아빠……?”
패닉에 빠져 있던 예스텔라가 데미안을 바라봤다. 나도 놀란 눈으로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바라봤다.
‘자기 죄를 인정했어?’
***
데미안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태평하게 말을 쏟아냈다.
‘왜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반대로 다른 말이-!’
에스텔에 대한 마음이 아팠던 건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된 예스텔라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에스텔 그 애는 잘 살 테니까.’
그래서 예스텔라 편을 들려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예스텔라는 애초부터 살아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저희의 실수였습니다. 예스텔라를 위한다는 이유로 저주를 건 것도 모자라, 에스텔을 학대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 더욱 잔인하게 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