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수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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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수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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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수면 아래에서
2023.03.31.
어느새 재판 당일이 되었다.
오랫동안 계속 신경 썼던 재판이니만큼 아침 일찍 눈이 바로 떠졌다.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요한은 모든 게 잘 해결될 것이라 했지만, 나는 마물이나 성황 같은 미지의 적이 걱정됐다.
‘아무리 요한이라도 그 사람들을 다 막을 수는 없을 거고.’
요한도 그런 내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억지로 나를 더 안심시키려 하기보다는, 다른 생각을 더 많이 하도록 시선을 돌렸다.
심지어 재판 당일 재판장에는 내가 아예 오지 않기를 권유하기도 했다.
‘온종일 좋은 것만 보면서 내가 가지고 올 선물을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될까?’
‘내가 위험해질 것 같아?’
‘그런 건 아냐. 하지만 괜히 나쁜 것들을 보다가 기분 상하면 내가 속상해서 그래.’
‘요한의 걱정은 알겠어.’
하지만 나는 재판장에 가겠다고 말했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난 계속 소식을 기다리면서 불안할 것 같아. 나한텐 너무 중요한 일이니까. 물론 많이 위험할 것 같다면, 요한이 얘기한 대로 저택에 얌전히 있을게.’
‘에스텔.’
‘하지만 난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재판이니만큼 그 사람들이 끝나는 모습을 꼭 지켜보고 싶어.’
결국 요한은 내 부탁을 들어줬다.
대신 미리 해둬야 할 문제가 있다면서 간밤에 작별 인사를 하고 먼저 떠났다.
‘요한이 도대체 무슨 일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물론 나 역시 요한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기 위해 황후를 통해 황제의 옥쇄까지 전달했다.
‘내가 개입했다는 걸 안 들키고 전달하는 게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옥쇄는 황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요한에게 큰 도움이 될 건 자명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아침부터 베티와 주치의 헨리 씨가 나를 찾아왔다.
“상태는 좋습니다. 몸이 많이 괜찮아지셨군요.”
“봐요, 재판장에 가도 될 정도로 괜찮죠?”
“예, 맞습니다. 최근 ‘잠자는 공주’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 게 도대체 어째서인지…….”
헨리 씨는 나를 진찰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슬그머니 진실을 꺼냈다.
“역시 처음부터 진찰이 잘못되었던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참 다행입니다만…….”
헨리 씨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마님을 괴롭혔던 병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 이유 없이 생기는 병이란 건 없는데 말입니다.”
“운 좋게 나았을 수도 있죠.”
“그런 기적이……?”
그러자 베티가 끼어들어 발랄하게 말했다.
“헨리 씨, 마님께 그런 기적이 벌어지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요?”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분명 주인님과 저희의 지극한 정성이 불치병을 낫게 한 게 틀림없어요! 주인님께서 마님에게 오죽 정성이셨어요.”
베티가 두 손을 꼭 모으며 꿈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헨리 씨도 더 부정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의학으로 확언할 수 없는 신비한 일이 많이 벌어지니까요. 흑마법이나 저주 같은 끔찍한 일도 벌어지는 판국이니.”
헨리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베티는 좋은 쪽으로만 들었는지 내 손을 잡으며 방방 뛰었다.
“봐요, 마님! 주인님의 사랑이 마님을 치료한 거예요.”
“……그, 그러게.”
“제가 이제 마님께 좋은 일만 벌어질 거라고 했죠? 마님의 걱정은 이해하지만 세상은 마님의 생각만큼 그렇게 나쁘지 않다니까요.”
괜히 벅차오른 베티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너무 감동적이에요. 불치병마저 치료하는 위대한 사랑! 저도 언젠가 주인님과 마님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베티야, 난 아픈 적이 없었어.
***
간수는 감옥 안에서 기도하는 예스텔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예스텔라의 담당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계속 감옥 안에 있었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 왜 자꾸 저 모습이 바뀌는 것 같지?’
처음만 해도 제대로 씻지 못해 더러웠던 예스텔라의 모습이 점점 깨끗해졌다. 변변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볼품없었던 몸에선 묘한 윤기가 흘렀다.
‘태도도 전과 달라진 게…….’
간수는 소매로 두 눈을 박박 비볐다.
고요히 두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던 예스텔라가 자신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은 것만 같았다.
‘내 착각이겠지.’
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실제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오늘 재판장에서 다 결론 날 텐데.’
그렇게 생각한 간수는 돌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예스텔라는 흐트러진 목깃을 정돈하며 엄지로 검은 백합 낙인을 문질렀다.
‘역시 이 정도는 쉽네.’
전처럼 모든 사람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몇몇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끼이익-
그 순간 때에 맞춰 누군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간수는 환영에 홀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예스텔라가 오르테카 재상을 올려다보며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제시간에 맞춰 잘 오셨네요.”
“아주 중요한 일이니 당연하지요.”
“다른 준비도 다 알맞게 해놓으셨지요?”
오르테카 재상이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긍정의 의미였다. 예스텔라는 어느새 윤기가 흐르는 금발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슬슬 재판 전에 부모님과 마지막 작별 인사나 하러 가볼까요?”
모든 준비는 잘 마쳤다.
‘그동안 가짜는 내 자리를 차지하며 행복하게 잘 있었겠지.’
그 가짜가 요한의 곁에서 행복을 누렸을 거라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했다.
‘감히 내 힘을 다 빼앗아 가?’
예스텔라는 진심으로 에스텔에게서 빼앗아온 요정의 힘이 제 것이라 여겼다. 그녀의 부모님이 입양한 대가로 공정하게 거래해서 그녀에게 전해준 힘이니까.
그사이에 성황 폐하께서 흑마법을 사용하시긴 했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분수도 모르는 가짜가 제 자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그녀의 힘마저 가져가 의기양양하게 살고 있다는 거였다.
‘용서 못 해.’
예스텔라의 푸른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모든 진실을 밝혀내고 끝없는 나락으로 빠뜨려주겠어.’
그리하여 가짜의 실체를 알게 된 요한이 그 손으로 직접 가짜를 처단하게 해주겠다. 모두에게 괴물이 된 채로.
***
재판장까지 가는 길은 아주 수월했다.
‘날씨도 너무 좋네.’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내게 호의적이었다.
“아, 블란쳇 공작 부인. 힘내세요.”
“맞아요, 저도 응원하고 있어요. 부인의 재단에 큰마음 먹고 이번 달 제 용돈을 모두 기부했답니다.”
심지어 재판장의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그래도 펠시스 후작가를 믿는 귀족들이 남아 있을 줄 알았다.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들어오죠? 사람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는 걸까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추악한 짓을 저지르고도 명예로운 척하지 않겠지요.”
“최소한 제국에서 제일 명예로운 가문인 척 위선만 떨지 않았어도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는 일도 없었을 텐데.”
펠시스 후작이 재판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반감이 엄청난데.’
과거 내가 악녀 소리 들으며 비난받았을 때, 어쩌면 그때보다 더 크게 욕먹는 것 같았다.
‘믿음을 배신당한 게 더 큰가.’
“얼른 폐하께서 저 못돼 먹은 가문에게 처벌을 내리셨으면 좋겠어요.”
“인신매매까지 저지른 주제에 운 좋게 처벌을 오늘까지 미뤄뒀으니 말입니다. 오늘은 무조건 판결 나야 합니다.”
펠시스 후작 역시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황제의 앞에 섰다.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펠시스 후작에게 고했다.
“펠시스 후작, 그동안의 재판으로 후작의 죄가 계속 까발려졌다. 그에 비해 후작은 이 뚜렷한 죄를 반박할 만한 증거를 마땅히 제시하지 못했다.”
후작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 변명도 안 하네.’
솔직히 펠시스 후작 정도 되는 인물이면 마지막까지 발악할 줄 알았다.
‘그만큼 요한이 철저하게 준비한 건가?’
재판은 신기할 정도로 수월하게 풀렸다.
황제가 냉정하게 후작의 뒤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
“다음 죄인을 끌고 와라.”
새로운 죄인이 재판에 등판했다. 내가 익히 아는 리안드로 펠시스였다.
리안드로는 원작 남주답게 모진 옥중생활에도 무척 고결하고 귀족적으로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마저 사연 있어 보이는 미남처럼 보이게 했다.
황제의 앞에 멈추기 직전, 리안드로가 애수에 찬 눈빛으로 관중을 돌아봤다.
그리고 나를 발견했다.
리안드로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왜 저러지?’
가끔씩 리안드로는 이상한 짓을 저지르곤 해서 불안했다. 나는 베티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베티, 리안드로가 무슨 짓을 저지를 수는 없겠지?”
“걱정 마세요, 마님. 주인님께서 다 대비해 두셨다고 했어요.”
“그건 그렇겠지만…….”
리안드로도 미친놈이지만, 요한은 그를 더 넘어서는 미친놈이니 상관없을 거 같기도 하고.
재판 순서는 펠시스 후작과 비슷하게 이어졌다. 황제가 리안드로에게 물었다.
“리안드로 펠시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저 역시 제 가문의 불명예에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하나 에스텔에 대한 제 사랑만큼은.”
리안드로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녀에 대한 제 마음만큼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심이었습니다. 그녀의 아픔을 알아주지 못하고 오만하게 속죄하라 했던 제 스스로를 후회합니다.”
겉만 보면 참 애달픈 고백이었다.
“사랑합니다, 에스텔.”
나는 리안드로의 고백을 듣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왜 저래.”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다행히 내 혼잣말은 주위에 퍼지지 않았다. 재판장에 들어선 다른 사람들이 더 격렬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저건 무슨 물타기입니까?”
“또 애꿎은 블란쳇 공작 부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도대체 저들은 선량한 사람을 가만두려 하지 않는군요.”
“이미 결혼한 유부녀를 향해 뻔뻔하게 저딴 소리나 하는 것 좀 봐요. 펠시스 후작가의 죄를 안다면 감히 지껄일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텐데……!”
“진짜 추잡스럽기는!”
물건을 집어 던지는 귀족도 있었다.
리안드로는 이토록 노골적인 야유와 비난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매우 당황한 듯했다. 난 오히려 당황하고 있는 리안드로가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거지?’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말이다.
“저는 그녀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리안드로가 무어라 변명하려는 듯했으나 대중들의 비난에 묻혔다.
‘쯧쯧, 안 들어준다니까.’
사람들은 속으로 내린 결론을 쉽게 뒤집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본인의 진심 타령하면서 하고 싶은 말만 하는데 뭐가 달라지겠는가.
‘항상 사람들이 자기 말을 잘 들어줬기 때문에 모르는 건가?’
결국 리안드로는 황궁 기사의 의해 펠시스 후작의 자리를 끌려 내려갔다.
“정숙.”
황제가 근엄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장통처럼 시끄럽던 재판장이 조용해졌다. 황제가 기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 죄인, 예스텔라 리베르탄.”
그동안 기다리던 예스텔라가 재판 위로 올라왔다.
또각, 또각.
예스텔라는 걸어오는 소리마저 다른 죄인들과 조금 달랐다.
‘저 구두는 또 어디서 났지?’
누가 봐도 더럽고 볼품없던 다른 죄인과 달리 예스텔라는 처량하기는 해도 결백해 보였다.
예스텔라가 황제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가련하게 치마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죄인 예스텔라 리베르탄.”
황제가 예스텔라를 향해 말했다.
“죄인은 그간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성녀 행세하며 블란쳇 공작 부인을 악의적으로 모함했다. 이에 대해 인정하는가?”
“폐하, 저는 억울합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을 모함한 증거가 그리 자명한데, 무엇이 억울한가?”
그러자 예스텔라가 구슬프게 목소리를 떨었다.
“제가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라는 신분을 숨겨야만 했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그 이유를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황제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예스텔라는 가냘픈 어깨를 떨며 윗가슴 쪽에 오른손을 올렸다.
‘저쪽에 불길한 기운이 움직이는데…….’
예스텔라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죽이려는 위협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누가 너를 죽이려 했단 거지?”
“저 여자입니다.”
예스텔라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꽂혔다.
“블란쳇 공작 부인, 리베르탄 공작가에 입양된 저 여자가 흑마법으로 저를 죽이고 제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예스텔라의 쇄골 쪽에 모이고 있던 어두운 기운이 모이지 못하고 빠르게 흩어졌다. 황제가 예스텔라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예?”
예스텔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들은 것처럼 놀랐다. 주위에서도 날 선 반응이 쏟아졌다.
“본인을 성녀인 줄 알았다더니 무작정 공작 부인을 음해하기만 하는 거 봐요.”
“저렇게 피해망상만 가득한데 누가 저 여자 말을 믿어주겠어요. 그동안 계속 리베르탄이라는 출신도 숨기던 사람의 말인데.”
“또 그딴 말이나 할 거면 꺼져!”
극단적인 사람 하나가 예스텔라를 향해 돌을 던졌다.
“아악!”
돌에 맞은 예스텔라가 이마를 쥐며 멍하니 주위를 돌아봤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처럼.
물론 신기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뭘 하려면 좀 제대로 하지, 도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거야.’
황제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예스텔라 리베르탄의 증언은 끝났다. 다음 죄인을 끌고 와라.”
“폐,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