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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평범한 부부처럼 (137/182)


137화 평범한 부부처럼
2023.03.24.



 
간밤의 일은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마님,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저희는 혹시 마님께서 잘못되는 줄 알고.”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셨다니 다행이에요. 앞으로는 무슨 일 있을 때 꼭 저희에게 다 시키세요. 아셨지요?”

저택의 모든 사람이 나를 더 과보호하기 시작했다는 것만 빼면.


‘도대체 내가 왜 그랬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결에 취해 있던 터라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무들이 너무 그리웠나.’

나무들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리다. 요한도 나한테 너무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나무들은 의미 자체가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편이었던 존재니까.’

어떻게 보면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들의 빈자리가 너무 컸고, 새로운 나무들과 관계를 쌓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나무들과 대화하는 것도 그만두고, 요정의 힘을 조절해 어떤 소리도 듣지 않게 차단했다.


‘언젠가 괜찮아지는 날이 오겠지만.’

지금 당장 새로운 나무들과 친해지는 건, 어쩐지 나를 아껴준 블란쳇 나무들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공작저 내부 문서들을 검토하고 체크했다.


‘마님, 몸을 아끼기 위해 쉬시는 게 어떨까요?’


‘헨리 씨 말이, 너무 쉬는 것도 좋지 않대. 나도 조금씩은 공작 부인의 의무를 다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솔직히 내가 노련한 페트리샤만큼 잘하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배운 게 있어서 관리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참, 마님. 이건 블란쳇 공작령 가신들이 보낸 편지입니다.”

베티가 가신 가문의 인장이 박힌 편지들을 보여줬다.


‘엄청 중요한 내용이 있겠네.’

사실 좀 우스운 얘기일 수 있지만, 가신들이 나한테 인장까지 박은 편지를 보낸 적 없다. 그래서 보기만 해도 벌써 긴장됐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렇게 편지를 확인하려던 차.

뎅-

정오를 알리는 종이 밖에서 울렸다. 베티는 보여주던 편지를 빛보다 빠른 속도로 샤샤샥 정리했다.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오늘 일은 여기까지만 하시고 준비하셔야 돼요.”

“무슨 준비? 외부 일정이 있었어?”

“네, 아주 중요한 일정이 있었죠.”

베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서 요즘 고생하시는 마님을 위해 몰래 데이트를 준비하셨거든요.”

요한이 또?

***

요한이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왔다.


“부인. 오늘 어디로 가는지 알아?”

“어디로 가는 건데?”

“맞춰 봐. 차림새를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요한은 항상 신사처럼 빼입고 있던 검은 정장이 아니라 편하고 가벼운 평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단출한 차림도 요한의 빼어난 외향과 분위기를 가리지는 못했다. 솔직히 꼿꼿하게 편 허리와 날렵하게 단련된 육체만 봐도 그랬다.


‘오히려 더 귀족 같아 보여.’

요한과 달리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나 역시 귀족보다는 평민에 가까운 평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대충 이번 데이트 테마가 짐작이 가긴 했다.


“신분을 감추고 데이트하러 가는 거야?”

“비슷해.”

요한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할 거면 내가 직접 준비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면 또 뭘 준비했는데?”

“가보면 알아.”

나는 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럽다는 듯 요한을 바라봤다.


“왜 항상 말을 하다 마는 거야. 비밀로 좀 하지 말고 다 말해줘.”

“그러면 비밀이 아닌데?”

“그치만 너무 궁금하단 말이야.”

요한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팔짱을 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치만 네가 이렇게 안달 내는 게 너무 좋은걸.”

“그래서 뭔데. 빨리 말해줘.”

“어허.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조금만 참아. 자꾸 그렇게 조르면 나도 모르게 가르쳐 주고 싶잖아.”

요한이 곤란하다는 듯 약한 표정을 짓자, 나는 기회를 노리듯 애교를 부렸다.


“지금 당장 알고 싶은걸. 살짝만 가르쳐 주면 안 돼? 가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반응할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런 날도 한 번쯤 있으면 좋잖아. 응?”

요한 말대로 꼭 지금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상한 승부욕이 생겨서였다.


“아, 나 네 부탁이면 약해지는 거 알면서 이러네. 그치?”

하지만 가문의 인장이 지워진 마차를 타고 외진 곳에 도착해 내릴 때까지 요한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진짜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줄 거야?”

“나 충분히 가르쳐 줬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그게 뭘 가르쳐 준 건데.”

요한은 그런 내 볼을 잡아당기며 장난쳤다. 나는 삐져서 괜히 길도 모르면서 앞으로 직진했다. 그러자 요한이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나쁜 놈이었네’ 하며 내 뒤를 쫓아와 달래줬다.

하지만 결국 요한은 고집대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길을 쭉 걸어갔다.


“겨울이 왔는데 아직 핀 꽃이 있어.”

슬슬 추워지고 있어서 꽃이 다 시들었는데, 길가에 희고 노란 작은 꽃들이 보였다.


“네가 올 줄 알고 환영하기 위해 피었나 봐.”

요한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깍지 껴 잡은 손을 흔들었다.


“저 꽃도 다 요한이 준비한 거지?”

“음, 맞아. 가는 길에 아무것도 없으면 안 예쁘잖아.”

“그래도 꽃이 어떻게 피게 할 수 있어?”

“넘치는 부와 권력으로?”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먹은 게 별로 없어서 기운이 없었는데.’

기분 전환이 되어서인지 멀쩡해진 것 같았다. 희고 노란 꽃들이 핀 길을 쭉 걸어가자,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이 나왔다.

요한이 내 어깨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나 잃어버리면 안 돼. 알았지?”

“응. 그럴게.”

다행히 지금 보이는 시장은 식재료가 아니라 꽃 시장 같았다. 속이 뒤집힐까 걱정했는데 미리 다 계획해 놓은 모양이다.

요한은 시장 상인 앞에 서서 말했다.


“가장 예쁜 꽃다발로 하나.”

상인이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오, 귀하신 분들 같은데 이 시장에는 어쩌다 오신 거요?”

“부인과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려고.”

“키햐, 아주 사랑꾼이구먼. 하기야 저렇게 예쁜 부인이면 그럴 만하지. 내 가장 예쁜 꽃으로 엮어서 드리리다. 올해 마지막 꽃 중 가장 예쁜 꽃일 거요!”

상인은 다홍색 꽃들을 엮어 내 품에 안겨주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너무 잘 어울리는 부부라 특별히 정성을 담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어울리나 봐.”

요한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러자 요한이 상인에게 제법 큰 돈을 던져주며 말했다.


“보는 눈이 있군. 자, 이제 쭉 가보자.”

 

 
상인이 금액을 확인하고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선물받은 꽃다발을 안고, 요한의 품에 보호를 받으며 시장 끄트머리를 향했다.


“저 집으로 들어가면 돼.”

“저 집?”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사이로, 유난히 멀쩡해 보이는 집 한 채가 보였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저기서 데이트를 할 예정이거든.”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박하고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평소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거나, 큰 선물이 놓여 있거나 하진 않았다. 정말 깔끔하고 단란해서, 따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집이다.


“여기 누가 살던 집이야?”

“아니. 그냥 내 소유의 집인데. 오늘을 위해서 급하게 꾸며놓았어.”

벽난로에서 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다. 훈풍에 나는 입고 있던 케이프를 벗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집 너무 좋다.”

블란쳇 공작저나 별장에서 봤던 그런 크고 아름다운 집은 아니다. 하지만 여태 왔던 곳과 달리 안락한 느낌이 있었다.


“저기 걸려 있는 건 내 그림이네.”

내가 연습 삼아 그렸던 해바라기 그림이 거실에 걸려 있었다. 오랜만에 붓질해서 서투른 솜씨가 그대로 드러나는 그림이다.


“일부러 걸어뒀지. 잘 어울리지?”

“응. 이 집을 위해 일부러 저 그림을 그린 건가 싶을 정도로 어울려.”

언제 준비한 건지 요한이 따듯한 코코아를 머그잔에 따라와 내게 건넸다.


“집 구경은 다 했어?”

“응. 다 했어. 엄청 예쁘다.”

나는 소파에 앉으며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이 집에는 왜 데려온 거야? 도대체 무슨 데이트를 하려고?”

“이 집은, 너와 내가 단둘이 있고 싶을 때 오려고 만든 집이야. 최대한 평범한 느낌으로,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게.”

“…….”

갑자기 말문이 콱, 막히는 기분이다. 마주 앉은 요한이 자상하게 웃었다.


“블란쳇 공작저도 좋지.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 완전 다른 상황이었다면.”

“…….”

“평범하게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지냈다면 이런 집에서 살 것 같아서 만들어봤어. 급하게 준비하느라 좀 부족한 데가 있기는 한데, 최대한 빨리 보여주고 싶었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상상하게 됐다.

복수자와 복수 대상이라는 복잡하게 꼬인 관계없이, 고귀한 귀족 남자와 비천한 평민 여자라는 신분 같은 것 없이 요한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우리 둘의 모습.


“그래서 저 그림을 걸어뒀구나.”

저 해바라기 그림은 요한한테 선물로 주려다 부족해서 버리려고 했던 그림이다.

그때 요한은 근처에 다른 이파리를 멋대로 그리며 말했다.


‘자, 이제 이 그림은 내 그림이기도 하니까 부인이 함부로 버리면 안 돼. 우리 두 사람 그림이니까.’

 
말장난 같은 이야기였지만, 나는 웃으며 그 그림을 요한한테 선물했다.

그때 느꼈던 감동이 진하게 몰려왔다.


“그러게, 그랬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어떤 모습이든 잘 지냈겠지.”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여유롭게 살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생계 문제도 더 고민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생계 걱정하게 만들겠어?”

“그것도 그렇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집을 유심히 바라봤다.


‘요한이 일일이 신경 쓴 게 보여.’

방에 걸려 있는 옷장엔 내가 피크닉 갈 때 입었던 옷들이 있었고, 식탁 위에 놓인 예쁜 화분 옆에 저번에 선물했던 부부 인형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매번 요한한테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쩌지.”

붉어지던 눈시울을 감추며 환하게 웃었다.


“이런 아이디어들은 도대체 다 어디서 나는 거야?”

“너만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모르겠는데.”

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부엌으로 잡아끌었다.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야. 내가 맛있는 밥 해줄게.”

“요한이 직접 해주게?”

“그럼. 내가 못하는 게 있을까 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직접 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요한은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본격적으로 요리에 나섰다. 난 드러난 팔뚝을 보다가 괜스레 시선을 돌렸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너는 거기 앉아서 날 지켜봐 주면 돼.”

나는 맞은편에 앉아 요한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요한이 해주는 요리를 먹고 토하면 안 되는데.’

요즘 먹는 요리마다 다 게워냈더니 벌써 걱정됐다. 하지만 난 턱을 괴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한, 지금 해주는 요리는 무슨 요리야?”

“가벼운 파스타랑 감자 수프,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빵.”

“일반 가정식이네.”

“이런 건 다 어울리게 준비하는 게 좋잖아?”

집무실이 아닌 주방에 서 있는 요한은 평소와 다른 이색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화르륵-

파스타를 볶는 모습을 가만 보고 있으니 설렜다. 요한이 너무 멋있어서,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설레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원래 요리를 이렇게 잘했어?”

“사실 처음부터 잘하진 않았어. 원래부터 고급 음식만 먹었던 건 아니거든.”

예상외의 대답에 내가 눈을 끔뻑거렸다. 요한은 간단하게 스튜를 끓이며 답했다.


“한때 신분을 위장한 채 살 곳도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거든. 그땐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 먹었지.”

“……하긴.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테니까.”

“당연히 요리도 자연스럽게 몇 개는 할 줄 알게 됐어. 직접 해서 먹는 게 더 저렴하니까.”

요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슬픈 과거를 말했다.


“그래도 난 능력도 좋고, 제법 운도 좋았지. 머리 쓰는 건 자신 있어서 금방 내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거든.”

“진짜 대단하다.”

새삼 요한의 성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


“이 요리는 내가 처음으로 마련한 돈으로 차려본 메뉴야. 그다지 좋아하는 것들도 아닌데, 돈을 벌면 꼭 해 먹고 싶었어.”

“이유가 따로 있었어?”

“응. 일하던 곳의 가족들이 가정식으로 이렇게 자주 차려 먹더라고.”

차분한 목소리 속 공허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때의 요한이 느끼고 있었을 고독감을 공감했다.


“……나라도 너무 먹고 싶었을 것 같아.”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되었던 요한한테, 가족들끼리 단란하게 먹는 요리는 어떤 의미였을까.


“부인이 먹고 싶었던 빵.”

요한은 흰 빵을 꺼내 썰었다. 안에 송송 박힌 견과류를 보니 아주 고급 빵이었다.


“이 빵이랑은 완전 다른 빵이지?”

“응. 완전 달라.”

“하지만 그래도 오늘 부인한테 준비한 빵은 이 빵이야.”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지 요한의 요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잘 차려진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사실 처음에는 부인이 먹고 싶다던 그 빵을 어떻게든 만들어주고 싶었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 중요한 건 빵이 아닌 것 같더라고.”

나는 내 앞에 천천히 접시를 내려놓는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건 지금 내가 부인한테 가장 주고 싶은 음식이야. 그때 먹었던 그 빵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한번 먹어봐.”

“…….”

“처음 그 빵을 먹었을 때, 부인은 마음이 어땠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식기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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