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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좋은 아빠 (136/182)


136화 좋은 아빠
2023.03.21.


나는 계속 배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배를 쓰다듬어도 실감 나진 않았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헨리 씨는 사라지고 요한과 나 둘만 남아 있었다. 요한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혹시, 에스텔 너는 임신한 게 달갑지 않아?”

“어?”

어쩐지 조심스러운 어조에 나는 빠르게 손사래 쳤다.


“아니야. 막상 임신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실감 나지 않아서 그랬어.”

“다행이다.”

요한은 내 두 손을 마주 잡고 눈썹을 부드럽게 내려 웃었다.


“설마 네가 원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거든.”

“그럴 리가 있어, 내가 얼마나 아기를 기다렸는데. 요한도 잘 알잖아.”

“그럼, 나도 잘 알지.”

요한이 뭔가 그리움이 잠긴 듯한 얼굴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도 막상 본인 일이 되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잖아. 그걸 걱정한 거지.”

“그렇지 않아. 조금 놀라서 그래.”

“그런 거라면 다행이고.”

마주 잡은 요한의 손이 따듯했다. 나는 요한의 붉은 눈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요한은 내가 임신한 게 기뻐?”

“당연하지.”

“……좀 신기해.”

내 뜬금없는 말에도 요한은 나른한 웃음소리를 내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하루 종일 기운이 없었는데 요한이 나를 안아주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뭐가 그렇게 신기해?”

“아니. 그냥 이 모든 상황이 좀 신기해.”

나는 갑자기 부잣집에 입양되는 행운을 얻게 된 고아원 소녀처럼 놀란 기분이었다.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져도 되는지 싶고, 이대로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요한도 나와의 아기를 바랐지.’

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 한편에는 막상 아기가 생기면, 좀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괜한 걱정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참 걱정이 많다니까.’

요한은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깍지를 끼며 웃어줬다.


“내가 얼마나 너와의 아기를 기다렸는데. 물론 우리 사이에 룬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의미가 좀 다르잖아.”

“그건 그래.”

“에스텔, 내 가족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다정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흐물흐물 녹아들었다.


“앞으로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 물론 쭉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도 노력할 거고.”

사실 가족을 가지고 싶다는 건 내 오랜 꿈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내 소원이 이뤄진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마워.”

그런 생각을 하자, 뒤늦게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내 자신이 우습지만, 배 속에 아기가 생긴 게 무척 좋아졌다.


“나도 아기한테 좋은 엄마이자, 부인이 되도록 노력할게.”

요한은 대답하는 대신 규칙적으로 내 등을 두드려줬다. 나는 그 토닥임을 즐기다 요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에 파고들었다.


“뭔가 진짜 부부가 된 기분이야. 기분이 진짜 이상해.”

“나도 그래.”

그 전까지의 우리 사이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감회가 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요한과 눈을 마주치자, 전과 다른 끈끈함과 유대감이 더해진 것 같기도 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 안에 우리의 아기가 있다는 거잖아.”

요한의 큰 손이 내 배를 부드럽게 쓸었다.


“아무래도 네가 그렇게 찾는 그 빵을 만들어주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어.”

“솔직히 어려울 것 같은데. 먹고 싶은 다른 음식이 없나 더 생각해 볼게.”

“부인, 나 못 믿어?”

요한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한테 불가능한 건 없어. 무조건 네가 만족하는 그 빵 찾아올 테니까 기대하고만 있어.”

어쩐지 과할 정도로 비장한 표정이라 웃겼다.


“알았어. 기대하고 있을게.”

“그리고 내가 들어보니까 임신 초기에 먹고 싶은 걸 못 먹으면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고.”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글쎄, 설령 너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난 너한테 조금이라도 아쉬운 기억을 주고 싶지 않아. 블란쳇 공작가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만들어낼 거야.”

하지만 확신 어린 그 태도와 달리 요한은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너무 부드러웠던 것이다.


“그때 먹었던 목이 막히는 느낌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최근 너무 잘 먹어서 그런가, 그때 느낌이 안 나는 것 같아.”

“……요즘 먹는 것도 없잖아.”

“그래도 그 빵 먹었을 때에 비하면 얼마나 잘 먹는데.”

요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뭐라고 여러 사람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네.’

하필 먹고 싶어도 왜 그런 이상한 음식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옆에 있는 룬이 나를 걱정스레 봐주었다.


“스테리 꼬르르 배고파요.”

“에이, 괜찮아. 잠깐만 이러는 거야.”

“루니 스테리 꼬르르 하묜 슬포.”

룬은 최근 자기가 엄청 빠진 딸기를 으깬 디저트를 내 입에 넣어주었다.


 


“이건 룬 거잖아. 룬이 먹어야지.”

“루니 꼬라서 스테리 주는 고야. 스테리 맘마 머고야 해.”

룬은 토실토실한 손으로 숟가락을 내 입에 들이밀었고, 나는 웃으며 딸기를 먹었다. 다행히 토하지는 않았다.


“아이, 맛있다. 룬이 줘서 그런지 더 맛있네.”

“지쨔지? 꼬르르 하묜 루니 꼬 주께. 스테리 아야 하묜 안 대요.”

어린 룬의 눈에도 내가 잘 못 먹어서 마르고 있는 게 티 나는 모양이다.


“알았어, 그러니까 남은 건 룬이 다 먹어야지. 이제 내가 먹여줄게.”

룬은 내가 입에 간식을 넣어주자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먹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스테리 거라 더 조하!”

“그래? 주방장한테 자주 해달라고 해야겠네.”

한창 룬이와 시간을 보내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폭 누웠다.


‘기운 없다.’

아까 룬이 준 걸 조금 먹기는 했지만,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누워 있기만 하는데도 현기증이 났다.


‘왜 요한이 먹고 싶은 거 못 먹으면 서럽다는지 알겠어.’

예전에는 그렇게 좋아했던 음식을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히니까 짜증이 나는데, 정작 먹고 싶은 음식을 입에도 대지 못하니 분통이 났다.


‘아무거나 잘 먹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요한이 가져다준 빵은 내가 말한 조건과 비슷했지만 어쩐지, 그때 그 느낌이 나지 않아서 입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한 입을 삼키고 나면 토하게 됐다. 괜히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남몰래 눈가를 훔쳤다.


‘도대체 왜 그 빵이 그렇게 생각나는 걸까. 그 빵 말고 다른 건 잘 못 먹겠을까.’

솔직히 그때 주방에서 훔쳐먹었던 그 빵은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특별한 빵이었던 건 아니다.

사용인들이 먹고 남겨져 방치된 빵이었으니까.


‘하도 딱딱해서 침으로 겨우 녹여 먹었던 거라 맛있을 수가 없는데…….’

이런 사소한 걸로 고민하는 것도 우습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기운이 없어 다시 까무룩 잠자리에 들었다.

***

요한은 바쁜 와중에도 수시로 에스텔의 상태를 확인했다. 페트리샤가 현재 에스텔의 식사 상황을 보고했다.


“그렇게 잘 먹던 고기를 못 먹고 있으니 문제가 좀 심하군.”

“예, 특히 한창 몸을 보신하셔야 할 때 잘 드시지 못하니 몸이 더 약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보약이라도 필요한 것 같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보약도…….”

에스텔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헨리 씨가 주는 보약을 어떻게든 먹고 웃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보약도 게워내 버렸다.


‘미안. 그래도 다 토하지는 않았어. 다음에도 또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아.’

 
이대로는 안 된다.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할 줄 전혀 예상 못 했던 요한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다른 산모들도 다 이 정도로 심하나?”

“산모마다 개인차가 심하긴 합니다. 도련님의 어머니께서도 입덧이 심하셨지요.”

“그때 어머니는 어떻게 했지?”

“마님처럼 특수한 음식을 요구하시지는 않아서 경우가 다르긴 했지만, 아버님께서 마님이 드실 음식을 직접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예. 마님께선 주인님의 아버님께서 눈앞에서 직접 요리해 주시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물론 산모마다 다르니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골똘히 고민하다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야지. 직접 요리한다면 어떤 요리가 좋으려나.”

“속이 편해지는 간단한 요리를 준비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렇지. 속이 편한 요리라.”

요한이 몇 가지 후보를 떠올리듯 종이에 글씨를 적었다. 페트리샤는 그런 요한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께선 참 많이 변하셨습니다.”

“……내가?”

“예. 솔직히 저는 그 전까지의 주인님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복수에 잠겨 있었으니까요.”

지금 요한은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남자였다. 문제 삼을 구석이 없기는 똑같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에스텔을 위해 일에만 몰두하지도 않고, 새로운 즐길 거리를 찾아 에스텔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다.


‘평범한 사람처럼.’

페트리샤는 달라진 요한을 보고서야 복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요한이 응원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는 것을 자각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그것 하나만을 쥐게 된다. 그의 인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요한의 인생엔 복수 외에도 많은 것이 가득했다.


‘이게 맞는 거지.’

요한의 부모님은 좋은 사람이었다. 억울한 죽음을 겪었더라도 그들은 복수보다는 아들의 행복을 바랐으리라.


“마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잘못된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때가 비정상적이었던 겁니다. 복수하는 와중에도 그 이후의 미래를 계속 생각하는 게 정상이니까요.”

그러니 지금 요한은 진정 그들의 죽은 가족이 바랐던 소원을 이뤄주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돌아가신 가족분들도 지금 주인님을 보시면, 행복해하실 겁니다.”

“정말 그럴까?”

“확실합니다.”

“페트리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그럴지도.”

요한의 시선이 집무실 한구석을 향했다. 거기엔 에스텔이 그려준 블란쳇 공작가의 문장이 액자로 걸려 있었다.

페트리샤 역시 요한과 같이 에스텔의 그림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저 자리에 새 가족 그림이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벌컥-

베티가 급하게 문을 열었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마님이 보이지 않아요!”

“뭐라고?”

요한이 급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이 새벽에 어디로 사라졌단 건가?”

“저도 마님께서 당연히 주무실 줄 알고 기다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봤는데 마님이 보이지 않으셔서…….”

새벽 4시.


‘너무 늦은 시간이다.’

“부인이 자주 있는 곳은 확인해 봤나?”

“우선 주인님께 보고하러 달려왔습니다. 지금 바로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알았다.”

요한은 급히 일어나 사용인 전부를 소집했다.


“당장 부인을 찾아. 홑몸이 아닌 만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서둘러라!”

새벽의 어슴푸레한 공기에 잠겨 있던 블란쳇 공작저가 일시에 불이 확 커졌다.


“마님! 마님!”

“암습의 흔적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마님께서 혼자 나가신 것 같습니다.”

“평소 자주 드나드시던 화실이나 서재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도대체 마님께선 이 시간에 어디로 가신…….”

에스텔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요한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에스텔.’

쿠르릉-

말갛던 하늘에 천둥이 치며 어두컴컴해졌다. 차가운 비가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스텔! 어디 있어?”

요한이 우산도 쓰지 않고 에스텔을 찾았다.


“에스텔!”

가뜩이나 번개를 무서워하는 에스텔이다. 최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힘도 없을 텐데.


‘이러다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요한은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무서운 생각을 할수록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에스텔이 혼자 갈 만한 장소.’

불현듯 요한은 한 장소가 딱 떠올랐다. 그가 어두운 새벽을 헤치고 에스텔을 향해 달려갔다.

***

콰가강, 쿠웅-

번개가 섬뜩하게 내리쳤다. 요한은 망가진 나무 틈을 내달려 숲의 중앙에 도착했다.

그 사이로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에스텔!”

요한이 절규하듯 에스텔을 불렀다. 에스텔은 등만 보인 채 안쓰럽게 그대로 비를 맞고 있었다.


“에스텔, 왜 여기에 있어!”

요한은 에스텔을 찾자마자 그녀를 끌어안았다. 계속 비를 맞고 있었는지 몸이 엄청 차가웠다.


“……에스텔?”

에스텔의 동공이 풀려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요한의 품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여기에도 없네.”

“에스텔, 괜찮아?”

“아기가 생겼다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에스텔은 생각에 잠긴 듯 울먹거렸다. 그녀의 손에서 부스러기 같은 게 보였다.


‘빵인가?’

그녀가 요한이 왔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축축하게 젖은 빵을 입에 넣었다.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지내면 칭찬해 줘야 하잖아요.”

“…….”

“진짜 너무해요.”

요한은 마법으로 그녀가 비를 맞지 않게 했다. 그의 품에 한참 안겨 있던 에스텔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요한? 왜 여기에…….”

“네가 사라져서 걱정했지.”

“아, 그랬겠다. 내가 왜 갑자기 나왔지.”

에스텔은 죄책감 어린 얼굴로 요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요한은 그런 에스텔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네가 무사하기만 하면 됐어.”

“괜히 걱정시켜서 미안해. 나도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어. 한참 자고 있었는데…….”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

요한이 쪽, 에스텔의 이마에 키스했다.


“덕분에 어떻게 하면 될지 알겠으니까.”

이제 요한은 어떻게 해야 에스텔이 원하던 빵을 줄 수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중요한 건 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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