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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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임신
2023.03.17.
블란쳇 공작저, 고풍스럽고 화려한 방.
어두운 조명이 원탁으로 된 테이블을 고요하게 비췄다. 요한은 원탁에 둘러앉은 블란쳇 공작가의 중진들을 둘러봤다.
“그래서 부인이 말한 빵은 구했나?”
“…….”
원탁에 앉은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요한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아직 제대로 된 방법이 마련되지 않았나?”
요한의 목소리에 노기가 스며들었다.
“우리 블란쳇 공작가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됐나?”
“…….”
“실망이군.”
분위기는 매우 암울했다.
요리사가 요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일부러 딱딱하고 말라붙은 빵을 만들려도 해봤지만, 차마 마님께 그런 빵을 가져다드릴 수는 없어서.”
“리베르탄 공작가에 방치되었을 상황과 비슷하게 빵을 노출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에리히의 질문에 요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상태가 너무 각양각색인 데다 위생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 마님한테 상한 빵이나 가져다드리라는 거야?”
에리히의 발언에 베티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에리히는 순간 울컥해서 답했다.
“그러면 마님께서 계속 그 빵을 찾고 계신데 아무것도 가져다드리지 말라고?”
“아니. 그래도 건강을 해치는 빵은 아니지!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밖에 없냐?”
“베티 너는 얼마나 잘났다고 그러냐. 획기적인 방법이라도 찾았어?”
그러자 베티가 우쭐한 표정으로 에리히에게 턱을 들었다.
“오빠보단 낫지. 주인님, 일단 저는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마님이 드셨을 상황을 어떻게든 추정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베티는 가져온 문서 한 움큼을 책상에 소리 나게 올려두었다. 요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당시 리베르탄 주방장은 이미 죽었을 텐데.”
리베르탄의 주방장이던 남자는 리베르탄 공작가답게 악명이 높은 자였다.
‘에스텔을 학대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지.’
다른 사용인들과 합심해서 일부러 이상한 요리를 식사랍시고 보내거나 굶기는 일도 다 주방장의 조력이 있어서 가능한 거였다.
그래서인지 블란쳇 공작가는 진작 그 주방장이라는 자를 고통 끝에 죽게 만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예, 당시 주방장은 물론 악질적인 사용인들까지 모두 벌을 받아 제대로 조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긴 했습니다.”
베티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찾아본 결과 마님께서 어린 나이였을 때의 주방장은 그때 저희가 처리한 주방장과 다른 사람이더군요.”
“……그래?”
“예. 더군다나 시간이 흘러 교체된 사용인이 있기도 해서 어렵사리 정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은퇴한 사용인들의 행방은 페트리샤 님이 알아봐 주셨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페트리샤를 향했다. 그러자 페트리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마님을 보좌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은퇴한 사용인들은 대부분 리베르탄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고 잠적한 상태였다.
자칫 잘못해서 반역죄로 얽히는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그런 자들을 일일이 수소문해 찾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페트리샤는 뻐기기는커녕 오히려 근심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부디 이 방법으로 마님께서 말씀하신 그 빵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주방장, 이 자료들이면 그 빵을 구현해 볼 수 있겠습니까?”
“충분히 가능은 할 것 같습니다만…….”
주방장이 아주 치밀하게 조사된 자료를 보며 목소리를 떨었다.
“병약한 마님께 소화하기 어려운 딱딱한 빵을, 그것도 상했을지 모를 음식을 드려도 될지…….”
“그 부분은 걱정 마라.”
요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마법으로 해결할 테니까.”
아직도 에스텔은 식사를 잘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 눈치를 봐서 억지로 먹기는 하지만…….’
은연중에 그때 말한 그 딱딱하고 말라비틀어진 그 빵을 찾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다른 음식을 먹기만 해도 게워내는 걸 보면 꼭 그 빵을 찾아내야 할 것 같았다.
‘귀하고 좋은 음식도 아닌데.’
하필 비싸고 좋은 음식을 찾는 것도 아니라 요한은 마음이 더 애틋했다.
“모두 최선을 다해 그때 그 빵을 재현해 주길 바란다.”
그렇게 14회 에스텔 추억의 음식 찾기 회의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회의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맛이 아닌 것 같아.”
“그래?”
일부러 마법으로 발효까지 시킨 빵을 먹은 에스텔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좀 더 고소한 맛이 씹혔던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네.”
“…….”
“이렇게 고생해서 계속 이상한 빵을 만들어올 필요 없어.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가 보지.”
***
퀴퀴하고 추레한 황궁 감옥. 간수가 성의 없이 벌레로 우글우글한 썩은 음식을 넣어주었다.
“배식이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시체처럼 늘어져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간수가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쯔쯔, 지들이 아직도 공작 부부인 줄 아나. 아직도 저러고 있네.”
“저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지. 리베르탄 공작가가 저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재판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추레한 황궁 감옥으로, 그보다 못한 식사로 이송되었다.
대역죄인이기에 다른 죄수들과 함께 섞이지는 않았으나, 대우는 점점 끔찍해졌다.
그 덕에 미남미녀로 이름을 날리던 외견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해쓱하게 말라붙은 피부와 제대로 씻지 못해 파리가 날리는 외향은 보기만 해도 눈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더러웠다.
“저런 자들이니 친딸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렸겠지.”
“악독한 리베르탄 핏줄이 어디 갔겠어. 지들 같은 딸을 낳아 지들 같은 대우나 당했던 거지.”
예스텔라 이야기가 나오자, 축 늘어져 있던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몸을 움찔했다.
‘스텔라는…….’
공작가의 몰락, 블란쳇 공작의 모진 고문, 나아질 리 없는 비참한 앞날.
하나같이 두 사람에겐 끔찍한 일투성이였지만, 두 사람을 의욕조차 잃게 만든 건 스텔라의 존재였다.
앙칼진 미녀였던 리베르탄 공작 부인 로자리아는 스텔라 소식을 알고 난 뒤 큰 배신감을 느껴 식물인간처럼 몸져누웠다.
간혹 정신을 차릴 때도 환상 속에 갇힌 것처럼 ‘우리 아가, 스텔라, 어디 있니?’ 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공작인 데미안은 로자리아보다는 나았으나 그 역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로자리아, 정신 차려.”
데미안이 겨우 일어나 히히 웃는 로자리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독촉에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픽 쓰러져 버렸다.
‘성국에서 스텔라가 우리를 구하지 못하게 막았던 게 아닐까.’
요한과의 고문에서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그 모든 게 스텔라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데미안은 스텔라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우리가 계속 그 애의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그 애가 그렇게 변한 걸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생각을 되짚을수록 흉터로 남은 스텔라의 변명이 꿈틀거렸다.
‘부모님의 죄가 제 죄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상처받은 건 저예요! 멋대로 가짜를 들여서 저를 힘들게 했잖아요.’
‘요한, 제 부모님의 허물로만 저를 판단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요.’
‘제가 뭘 했다고요? 전 한 게 없어요. 모든 건 다 저희 부모님이 저질렀어요. 제가 얼마나 어렸는데요.’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에스텔을 학대한 건, 예스텔라 때문이 컸다.
세뇌의 공백이 풀리자 의문스러웠던 행동이 설명되기 시작했다. 로자리아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에스텔을 원수처럼 쥐어 잡았던 것도 다 스텔라가 오간 뒤의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그 애가 우리한테 그래.’
데미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물며 피가 섞이지 않은 에스텔은 항상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게 애달픈 애정을 보여줬다.
두 사람의 태도가 너무 달라서 비교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스텔라한테 우리가 진짜 부모이긴 했을까?’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스텔라가 세상에서 제일 귀했다. 부족한 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랑을 주고자 했다. 이미 더럽혀진 손을 더 추악하게 물들이더라도 스텔라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스텔라를 위해서란 이유로 계속 고통받아야 했던 에스텔.
데미안은 스스로 믿을 수 없게도 큰 상처 속에서 에스텔을 향한 제 나름의 부성애를 자각했다.
‘그토록 조그맣고 착한 아이였는데.’
뺨을 맞고도 눈물 흘릴 줄 모르고 얌전히 매달려 있던 착한 아이였다. 시선과 애정이 안 가려야 갈 수 없던 예쁘고 고운 아이.
혹여나 애정이 갈 것이 두려워 더 모질게 괴롭히고, 스텔라가 상처받을 것이 마음 아파 괴롭히고 학대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퉁퉁 부은 뺨으로 예쁘게 웃으려고 애쓰던 어린 에스텔이 떠올랐다. 스텔라를 위한 아이였지만, 사실 그 아이를 진짜 딸로 키웠다면 그들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데미안은 눈앞이 껌껌해졌다.
‘또 정신을 잃는 건가?’
최근 간수들이 주는 상한 음식을 먹었던 탓인지 데미안은 갑자기 정신을 잃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뒤늦게 감옥에서 눈을 떴을 때와 달리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아빠, 정신이 좀 드세요?”
차가운 손수건이 데미안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데미안은 눈을 끔뻑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스텔라?”
“네. 스텔라예요.”
스텔라가 울먹거렸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가짜만 잘 막았어도 이렇게 고생시키지 않았는데.”
“……그러냐.”
데미안이 어색하게 스텔라의 손길을 피했다.
“여기는 어디냐, 분명 감옥에 있었는데. 스텔라 네가 우리를 꺼내준 게냐?”
“죄송해요. 여긴 두 분의 꿈속이에요.”
스텔라가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고개를 슬프게 가로저었다.
“저도 갇혀 있는 터라 두 분이 현실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꿈으로 뵈러 오는 것밖에 하지 못해요.”
“…….”
“아빠는 제가 반갑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스텔라는 억울한 얼굴로 데미안에게 말했다.
“설마 요한 님 앞에서 제가 한 말 때문에 속이 상하신 건 아니시죠? 그건 상황을 모면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데미안의 태도가 변한 이유는 그것 하나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스텔라가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구명에 관심도 없었다는 것, 부부가 슬퍼하는 것을 알면서도 필요에 의해 살아 있다는 것을 모르도록 세뇌시켰던 것. 그 모든 것이 부모로서 서러웠다.
하지만 스텔라는 그 하나만 문제라도 되는 듯 말했다.
“아빠가 저한테 그러시면 안 되죠. 제가 아빠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스텔라의 입매가 삐죽 나왔다.
“아빠마저도 그러시면 제가 이 상황을 어떻게 견뎌요. 아빠만큼은 친딸인 제 편을 계속 들어주셔야 하는 거잖아요.”
“미안하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아니에요, 아빠도 많이 힘드셨을 테니까요.”
스텔라는 데미안의 사과에 기분이 풀려 다시 푸른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말인데, 아빠한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아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에요.”
“내가?”
“네. 마음 아프지만 제가 엄마 아빠 두 분을 다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 와중에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데미안은 ‘좋은 기회’라는 말에도 왠지 속이 바짝 탔다.
“어떤 좋은 기회인데?”
“아빠도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아빠를 배신한 가짜가 원망스러우시죠?”
스텔라는 신이 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환해진 그 얼굴은 어린 시절 리베르탄의 작은 천사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엄마 아빠의 도움만 있으면 그 애에게 복수할 수 있어요.”
“분명 대가가 만만치 않을 텐데.”
“네. 엄마 아빠의 생명력이 조금 필요하긴 해요. 하지만 고통 같은 건 전혀 없을 거라고 했어요.”
스텔라가 데미안의 눈치를 슬쩍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데미안은 무어라 말할 기력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생명력?”
데미안이 기운 없이 팔을 툭 떨궜다.
“그거면 되느냐?”
하지만 스텔라는 눈치채지 못하고 밝게 말했다.
“네! 그거면 돼요! 역시 아빠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는군요. 어차피 두 분께선 더 하실 것도 없잖아요. 그 꼴로 더 살아봤자 뭐 해요. 어차피 꺼질 생명력이라면 저를 위해 쓰면 더 좋은 건데.”
“…….”
“엄마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그 가짜만 없애면 제가 그 가짜의 자리를 차지해서 행복해질 텐데 왜 그걸 모르는 걸까요? 진짜 아빠라도 제 마음을 이해해 줘서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
헨리 씨가 나를 앉혀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몇 번 확인해 봐도 확실합니다. 마님의 배 속에 아기님이 계신 것 같습니다.”
“정말요?”
“예. 축하드립니다, 마님.”
요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등을 토닥여줬다. 나는 요한을 보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요한은 내가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저택 사람들 다 눈치채고 있었을걸. 아무리 봐도 네 상태가 임신 초기 증상이라서.”
나는 멍하니 배에 손을 얹었다.
‘이 안에 아기가 있다니.’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요한과 내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