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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이렇게 사랑받는데. (133/182)


133화 이렇게 사랑받는데.
2023.03.10.



 
요한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제 안녕.”

멍하니 요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증오로 가득한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요한의 얼굴이다.

새삼 요한이 내 앞에서 보여줬던 그 표정들이 전부 달콤하게 감춰진 가짜가 아닌가 싶었다.


“-에스텔!”

그 순간 따듯한 온기가 내 양어깨를 확 잡았다.


“왜 갑자기 몸을 떨고 있어, 어디 아파?”

거울이 깨지는 것처럼 환상이 조각조각 깨졌다. 증오로 가득 찬 얼굴 사이로 내가 알던 다정한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아, 요한.”

“……내가 어젯밤에 너무 무리시켜서.”

“그런 거 아니었어.”

요한의 눈빛이 집요하게 내 얼굴을 살폈다. 내가 숨기고 있는 아픔이 있는지 찾아내려는 듯한 시선이다.


“몸 약한 부인을 배려하지 못했나 봐.”

별다른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는지, 요한이 나를 끌어안으며 포근하게 등을 두드려줬다.


“다음엔 좀 더 신경 써야겠네.”

“어떻게?”

“일단 부인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지. 몇 번이고 할 수 있게.”

“그러면 배려하는 게 아니잖아.”

“다음에도 자제할 자신은 없거든.”

요한은 정수리에 입술을 맞추며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요한이 나를 죽이려 했구나.’

지금 내 앞의 요한이 완벽하게 느껴질수록 방금 내가 본 요한의 모습이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게 요한이 가장 감추고 싶어 했던 진실.’

어쩐지 요한의 얼굴을 보면서도 평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 있었나 봐.’

과거 요한이 나를 증오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달콤한 요한의 겉모습에 속지 않기 위해 수없이 다독였는데, 이제 와서 새삼 충격적으로 느낄 필요가 없는데.

그래도 난 요한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면 왜 나랑 결혼했는데?’


‘너를 사랑해서 결혼한 거야.’

요한이 내게 해줬던 말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 잊으려 했던 모양이다.

그는 리베르탄의 입양아인 나를 증오했고, 그래서 복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결혼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러했다.

요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그러자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안겨 있는 게 좋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요한은 내 앞에서 나를 증오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잖아.’

요한은 항상 나를 위로해 주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요한을 보자 놀랐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과거야.’

요정의 힘이 강해지면서 전보다 더 뚜렷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저 시기는 나와 요한이 막 결혼했던 때였으리라.


“부인이 좋아하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안아줘야겠네.”

“요한.”

나는 요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요한은 내가 요한을 속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그러자 요한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지금 자수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궁금해서 그냥 물어보고 싶었어. 요한의 생각이 궁금해서.”

“음, 어떤 거짓말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렇겠지?”

이미 과거에 벌어졌던 일은 다 묻어버리기로 약속했다. 제 턱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고민하던 요한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떤 거짓말이어도 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왜?”

“부인을 사랑하니까.”

요한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보듯 내 두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부인을 용서하지 않으면 이렇게 입도 못 맞추고, 계속 보기도 어려울 거 아냐. 나한텐 그게 더 견디기 어려울 것 같네.”

“그러면 내가 요한을 속여도 상관없다?”

“물론 웬만하면 속이지 않는 게 좋겠지, 부부끼리는 비밀이 없는 게 중요하니까.”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응?”

“굉장히 고민거리가 많은 표정을 하고 있잖아. 난 화내지 않을 테니까 솔직하게 얘기해 줘.”

아무래도 요한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방금 나…….’

하지만 이미 우리 두 사람은 과거에 대해서는 완전히 묻고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전까지 서로에게 했던 거짓말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던 것이다.

특히 요한은 입양아인 나를 원망한 적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느낌이 왔다.

내가 모든 것을 다 까발린 순간, 지금 요한과 있는 것처럼 마음 편히 서로를 보지는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고, 지금 요한은 그때의 요한과 다른데 굳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내가 학대받았다는 사실을 감췄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랬지.”

“아직 그런 생각을 해?”

“그렇지만 요한을 속인 건 사실인걸.”

“이거 안 되겠네. 자책하는 버릇이 또 도진 걸 보니 벌을 줘야겠어.”

요한이 장난스럽게 화인을 남긴 내 쇄골 부근에 이를 댔다.


“왜 이렇게 깨무는 걸 좋아하는 거야.”

“모르겠어. 전생에 개였나?”

요한은 내 몸에 남긴 자국이 만족스럽다는 듯 덧그리며 입을 맞추고, 깨물어 자국이 더 선명해지게 했다.

따끔한 감각과 묘한 열기가 차올랐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발정 나는 걸 보니 아주 심각하긴 해. 부인이 좀 받아줘야겠는걸.”

“요, 요한. 어제 했잖아.”

“오늘은 안 했지.”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던 스킨십이 점점 농도가 짙어졌다. 슬쩍 마주치는 붉은 눈동자에 욕망이 가득했다.


“어제 무리시켰으니까 오늘은 조금만 할게.”

“조금만?”

“응. 설마 아침부터 어젯밤에 한 것처럼 하겠어? 나 믿지?”

이미 요한의 몸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맹수처럼 단단하게 격양된 근육이 나를 강하게 옥죄었다.


“……믿음이 크게 안 가는데.”

요한은 씩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키스했다. 숨을 모두 빼앗아가는 듯한 격한 키스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갈증 난다는 듯 혀를 섞던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해줄게.”

요한의 조급한 마음이 전염되는 것처럼, 그가 내 몸을 탐할수록 나 역시 나를 잃고 그를 붙잡게 됐다.


‘……그래, 과거의 요한은 내가 리베르탄에서 학대받은 걸 몰랐잖아.’

어차피 요한이 과거의 나를 증오했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렇게 죽이고 싶었던 여자를 사랑하게 된 요한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토록 선명하게 증오하던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해야 했던 요한. 결국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요한.


‘모두 쉽지 않았겠지.’

요한이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잡으며 똑바로 시선을 맞추게 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섬뜩한 눈빛이다.


“딴생각하지 마.”

나는 숨을 헐떡이며 움찔했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지금 나한테만 집중해.”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요한의 몸이 더 격렬해졌다. 단단한 육체가 부서질 듯이 내게 부딪쳐왔다.


‘다 너 때문이다.’


‘네가 살아 있기 때문에 네 주변이 모두 불행해지는 거다. 더 이상 주변을 망치지 말고 죽어버려.’

저주받은 마물의 목소리가 언뜻 머릿속에 스쳤다.


‘네가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건 착각이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으냐, 결국 너는 버려지게 될 거다.’

우리의 몸이 하나가 되었다.

숨을 더 쉬지 못할 정도로 턱 막히며 찌릿한 충족감이 따라왔다.


‘저딴 말에 휘둘리지 않을 거야.’

요한의 애정이 더 거칠고 집요하게 퍼부어졌다. 나는 마물과 과거를 모두 잊고 정신없이 요한에게 매달렸다.


‘내가 불행해질 리 없어.’

이렇게 소중히 사랑받고 있으니까.

***

[부인은 뒤늦게 도망치는 괴물을 발견했습니다.]

[“기다려요!”]

[하지만 괴물은 부인의 말에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괴물을 쫓아 뛰어갔지만, 이미 괴물은 첨탑 꼭대기에 서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위험한 높이였습니다. 하지만 괴물은 그 높이가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 아래에서 부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괴물은 자신을 부르는 부인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등진 채 서 있었습니다.]

[첨탑 아래로 괴물이 죽인 전 부인들의 환영이 보였습니다. 모두 사랑이 식고 증오로 물들어버린 얼굴이었습니다.]

[전 부인들이 괴물의 파멸을 비웃으며 환영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미안해.”]

[부인이 괴물에게 무언가를 말할 새도 없었습니다. 괴물은 부인을 등진 채 첨탑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

뜨거웠던 여름을 거쳐 벌써 추운 겨울이 오고 있었다.

쫘악-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를 갈기갈기 찢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 종잇조각을 흩뿌린 다음 다시 종이를 잡았다.

종이에는 아름다운 숲이 그려져 있었다.

물론 평범한 숲은 아니다. 저마다 삐죽삐죽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꼬여 있거나, 이파리가 날아다니는, 블란쳇 숲이었다.


“이것도 아니야.”

베티는 신기하고 아름다운 숲이라고 했지만, 내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내가 아는 그 모습이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아무리 그려도 생생함이 부족해.’

내가 알던 나무들은 아주 소란스러웠다. 요란스러운 웃음소리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절로 기분이 풀어질 때가 많았다.

쫘아아악- 쫘악!

나는 망설임 없이 숲을 그린 그림을 모두 찢어버렸다. 바닥에 쌓이는 종잇조각이 늘어갔다.

거침없던 내 손이 멈칫했다.

요한을 그린 그림이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그린 요한이 다정하게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요한.”

나는 그림 속 요한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인에게 제대로 보여줄게.’

요한은 내게 한 가지 약속했다.


‘블란쳇 공작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부인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번 편하게 쉬면서 지켜봐.’

그렇게 그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래도 예스텔라를 구명하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하던 성국은 도리어 부패한 신관들의 덜미만 잡히고 말았다.

성국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면서 아테아 교는 신망을 점점 잃었다.

결국 성국은 노선을 완전히 바꿔 예스텔라가 ‘신마저 속인 끔찍한 악녀’라며 예스텔라의 죄를 폭로했다.

[성녀 행세하던 예스텔라 리베르탄, 주위에 있던 여자 신도를 끝없이 질투하고 몰아내는 행보를 보이고…….]

[추가 피해자 속출, “성녀님께서는 하루 종일 자신의 비위를 맞추게 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추기경들 연이어 증언, “성녀님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지만, 신성력 때문에 차마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다 저희의 죄입니다.”]

[예스텔라 리베르탄, 성녀 행세를 하던 중에도 블란쳇 공작을 향한 탐욕을 드러내며…….]

물론 성국만이 아니었다.

예스텔라와 친분을 맺었던 귀족 가문들은 그런 성국과 경쟁하듯 그녀의 죄를 떠벌렸다.

[예스텔라 성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기부금 말고도 다른 문제로 여러 돈을 갈취했으나…….”]

[“걸핏하면 블란쳇 공작 부인 얘기를 뜬금없이 꺼내고는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리베르탄 공작가의 입양아였던 현 공작 부인을 계속 헐뜯은 것도 성녀의 수작일 가능성이…….”]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 자신을 추앙하는 남자들과 주선 기회를 주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솔직히 언제 이렇게 많은 행동을 저질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명예로운 펠시스 후작가, 그 실체는 리베르탄 공작가나 다름없는 괴물!]

[펠시스 후작, “펠시스 후작가가 그동안 제국에 해온 헌신을 믿고 기다려달라.”]

[블란쳇 공작, “펠시스 후작의 변명은 과거의 영광을 핑계로 면피하려는 어설픈 수작질.”]

[펠시스 후작가의 지하실이 계속 드러나면서 과거 블란쳇 공작가의 반역죄에도 가담했다는 것이 정설로 밝혀지며…….]

거기다 원작 남주 가문이었던 펠시스 후작가도 완전히 무너졌다.


‘이게 요한의 솜씨인가?’

3개월쯤 지난 것뿐인데, 펠시스 후작가는 이미 천하의 쓰레기 가문이 되어 있었다.


 

***

펠시스 후작이 황제를 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저는 억울합니다. 제게 죄가 있다면, 황실에 충실한 죄밖에 없습니다.”

“후작, 이미 상황은 끝났네.”

황제의 단언에 펠시스 후작이 현실을 부정하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서 나서주신다면…….”

“짐이 왜 그래야 하지?”

“펠시스 후작가의 죄가 펠시스만을 위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펠시스 후작은 마지막 동아줄을 잡듯이 발악했다.


“제가 어디 저 혼자 죽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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