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네 전부를 가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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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네 전부를 가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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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네 전부를 가지겠어
2023.03.07.
짧은 순간 서로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의 손은 눈빛만큼이나 빠르게 내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게 할게.”
일부러 느릿하게 내뱉는 목소리가 억지로 누른 것처럼 딱딱 끊어졌다. 그 말을 증명하듯 그의 손은 점점 조급해졌다.
드레스 사이로 흉터가 다시 드러났다. 밝은 빛 아래에서 드러난 흉터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왜 숨기려 해?”
요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나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보기에 별로 좋은 건 아니니까.”
“아닌데.”
그가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엄지로 흉터를 문질렀다.
“내가 보기엔 너무 예쁜데.”
“거짓말.”
“진짜야.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뭐 해.”
“내 기분을 낫게 해주려는 목적일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럴 거라면 조금 더 부인이 납득하기 쉬운 소리를 했겠지.”
흉터를 진득이 보던 요한이 하나씩 정성스레 입술을 맞췄다. 긴장감이 허리를 타고 찌르르 올라왔다.
“내 솔직한 감상이야. 부인의 몸에 있어서 그런가, 다 너무 예뻐.”
요한은 입술을 맞춘 채로 나를 힐끔 올려다봤다.
너무 자극적인 눈빛이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요한이 짐승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쪽, 소리 내어 다시 한번 흉터에 입을 맞췄다.
“너는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잖아,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도.”
뜨겁고 촉촉한 감촉이 달라붙었다. 내가 요한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요한의 손은 내 몸을 덧그리며 감쌌다.
그의 손길과 눈길, 접촉 하나하나에서 나를 향한 애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나 이렇게 사랑받고 있구나.’
그 순간 나는 블란쳇 나무들이 사라진 순간부터 거대한 고독감에 지배당하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요한이 세상과의 동아줄처럼 붙잡고 연결해 주고 있다는 것도.
‘……우울하게 생각하지 말자.’
최소한 요한의 사랑만큼은 진짜였다.
당장 내 눈앞에서 실체를 가진 채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있었다. 요한의 얼굴이 예상하지 못한 부근까지 치고 올라갔다.
“부끄러워하지 마.”
요한은 막아서려는 내 손길을 가볍게 처리하며 씩 웃었다. 그 상황에서도 계속 마주치는 눈빛이 너무 자극적이다.
“나한테 다 보여줘. 네 전부를.”
“그렇게 일일이 말하면 더 부끄러운데. 차라리 불이라도 끄고-”
“싫은데.”
요한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한테는 너무 중요한 문제라서.”
“그, 그게 무슨!”
“그동안 참아왔던 만큼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잡아먹을 생각이거든.”
어느샌가 올라온 요한이 내 몸을 차지하고 지배했다. 그가 입술을 맞춰 온기를 얽어왔다.
“이 정도는 양보해. 남편을 계속 안달 나게 했으면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근육질로 단단하게 단련된 육체가 나를 내리눌렀다. 그의 체향이 온기를 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쌌다.
“잠깐, 요한.”
“기분 좋지?”
첫날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기는 했으나, 이런 느낌을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에스텔, 사랑해.”
내 두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요한의 큰 손이 위압적으로 내 손을 내리눌렀다. 꼼짝없이 요한이 하고 싶은 대로 내 온몸이 휘둘렸다.
이성적인 사고가 점점 끊기며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가는 와중에도 나는 눈앞의 요한을 바라봤다.
중요한 건 요한이 있단 거다.
윤기 나는 결 좋은 흑발,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한 이목구비 사이로 두드러지는 짐승처럼 날카로운 붉은 눈동자.
‘내가 아는 요한이 아닌 것 같아.’
근사한 신사처럼 보였던 남자가 날 것의 감정을 드러내며 맹수가 되어갔다. 요한이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야만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보았다.
나는 그것이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만이 우아한 껍질 속에 감춰진 요한의 실체를 끌어낸 것 같아 기꺼웠다.
‘요한은 내 거야.’
다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
본래 요한이 계획했던 첫날밤은 이렇지 않았다. 가뜩이나 상처 많은 에스텔을 위해 더 부드럽고 달콤한 경험을 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에스텔은 그의 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에스텔.”
요한은 사랑스러운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해, 에스텔.”
여자는 이름에 반응하듯 온몸을 움찔했다. 그가 자극을 가하는 대로 그대로 모든 것이 드러나는 가냘프고 아름다운 에스텔.
그런 여자는 그의 음험한 소유욕을 충족시켰고, 더 크게 지배하도록 갈망하게 했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든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가지고 싶은 거라면 내가 다 가지게 해줄게.”
거친 그의 손길이 닿기엔 너무나도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던 에스텔, 이렇게 정신없이 탐하고 있는 와중에도 사라질 것처럼 아스라해 보이는 여자.
‘내가 너를 가졌어.’
에스텔을 괴롭히던 리베르탄도 처리하고, 펠시스 후작가도 없앴다. 다른 방해꾼들 역시 등장하자마자 모조리 없애버릴 거다.
그러니 그녀는 계속 그의 곁에 있을 거다.
그에게서 감히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빼앗아갈 존재는 없으니까.
‘그런데 왜 네가 사라질 것 같지?’
물기에 젖은 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요한은 눈물 한 방울마저 아깝다는 듯 갈구하며 입을 맞추고 핥았다.
애달프게 빛나는 여자는 요한에게 기이한 잔인함과 폭력성을 일으켰다. 요한이 자제력을 잃고 여자를 탐했다. 열락에 젖은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더 빠져들게 했다.
이성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너는 언제나 그랬지.’
그저 복수 대상을 위해서 들였던 여자, 그녀가 학대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요한은 제 근본적인 부분에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요한은 복수라는 거대한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리베르탄에게 잔인하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래도 요한에게는 긍지가 있었다. 최소한 그의 복수는 정당했기 때문에. 설령 리베르탄과 같은 존재로 타락하더라도 그는 상관없었다. 최소한 같은 존재를 벌한 것일 터이니.
그런데 에스텔의 존재는 그 긍지를 추락시켰다.
‘아직 늦은 게 아니다.’
요한은 세뇌하듯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미 그녀는 그에게 너무 소중해져 버렸는데, 요한은 그녀를 멋대로 매도하고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에스텔의 흉터를 마주한 순간. 학대 현장을 넘어서 그녀의 인생에서 지우지 못할 낙인을 발견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자기변명할 수도 없었다.
‘너는 내 모든 것을 부정해.’
존재 자체를 요한을 더 최악의 인간으로 만들었다. 더 우스운 건, 그러고도 요한은 그녀를 놓을 수 없다는 거다.
‘내가 믿어왔던 모든 것이 너만 있으면 다 무의미해지고, 복수도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잖아.’
겨우 호흡하던 에스텔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의 가녀린 팔이 그를 애절하게 감쌌다.
“요한, 너는 나를 왜 아껴?”
요한이 에스텔의 뺨에 손을 대었다.
조금씩 요동치는 심장박동, 쉽게 달아오르는 얼굴, 희게 빛나는 두 뺨, 순진하게 내려간 눈매,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남색 눈동자.
“나는 네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애수에 젖은 남색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너한테는 나를 사랑할 만한 이유 같은 건 없잖아.”
어쩐지 많은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요한은 에스텔의 속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그렇지.”
그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여자의 쇄골을 깨물었다. 에스텔이 미간을 좁히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나한테 널 사랑할 이유 같은 건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만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요한은 그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말았다.
그녀를 가지고 놀다가 버려야 하는 순간에도 여자에게 몰입했고, 여자가 그의 목적이 되지 못할 때도, 그의 계획을 모두 망쳐버릴 것 같은 순간에도 그녀가 애달프고 소중했으니까.
그러니 그 모든 행동의 원인을, 근본을 모두 부정하게 하는 이 절절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나도 이유 같은 건 몰라.”
요한은 에스텔을 사랑했다.
“단지 너를 사랑해.”
에스텔은 복수 외에 아무것도 없던 그에게 새로운 목적이 되어버렸다.
“이제 네가 아니면 안 돼.”
영혼에 각인되어 더 이상 다른 사람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녀여야만 했다.
분홍빛이 감도는 백금발이 침대에 만개하듯 피었다. 여자는 찬란한 봄의 장미처럼 유혹적이었다.
“그러니 그런 고민하지 마. 아니, 내가 아무 생각나지 않게 해줄게.”
요한은 여자의 목덜미에 콧등을 문지르며 향취를 탐닉했다. 몽롱하고 혼미한 분위기 속에서 여자의 존재가 그의 안에서 더 선명해졌다.
“하나만 기억해.”
요한의 날카로운 눈가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요한은 한층 더 집착 어린 손길로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 가냘픈 호흡 한숨까지 차지했다.
“너는 전부 내 거야. 그리고 난 내 것을 절대 놓지 않아.”
지독한 열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
아침 햇살이 쨍쨍하게 내려앉았다.
“으으…….”
목이 찢어질 듯이 따가웠다. 나는 눈꺼풀을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온몸을 감싼 두꺼운 팔이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다.
“일어났어?”
요한이 다정한 목소리로 내 머리 쪽에 제 얼굴을 부비었다.
“많이 힘들 텐데 조금 더 쉬어.”
“……힘들게 한 사람이 누군데.”
“그러니까 잘 쉬게라도 해야지.”
요한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이게 사랑받는 기분이구나.’
나도 단단한 요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요한이 목울대를 꿈틀했다. 그가 꿈에 젖은 듯 달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좋다.”
무의식적으로 말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그냥 이 모든 게.”
요한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이렇게 네가 내 품에 있고, 함께하는 것 그 자체가 좋아. 온몸이 충만해.”
그는 망설임 하나 없이 솔직한 제 감상을 전했다. 언제나 명료한 요한을 보고 있으면 참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부끄러운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두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나도 지금 이 순간이 거짓말 같아.”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온몸이 안정된 이 감각, 평생 이 순간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나른하고도 충만한 지금 이때.
‘이게 행복이 아닐까?’
이렇게 내가 행복하다는 것 자체가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무언가를 욕심내기만 하면 다 사라졌으니까.
“……앞으로도 평생 이랬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어.”
요한이 단호하게 말하며 품 안에 있던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그렇게 해줄 테니까.”
요한의 저 오만하고도 당당한, 확신에 찬 그 말이 참 좋았다. 나한테 없는 부분이라서.
나는 가슴팍에 뺨을 부비다가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붉은 눈동자가 나와 마주치자마자 가늘게 휘어졌다.
찌릿-
그 순간 내 몸에 들끓는 요정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내 힘이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건가?’
요한의 강렬한 붉은 눈동자 사이로 섬광 같은 빛이 보였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빛이 퍼졌다.
‘도대체 무슨 진실을 보여주려고?’
아무래도 내 요정의 힘이 크게 회복되면서 전보다 더 또렷하게 ‘진실’을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요한의 비밀이라.’
일반적으로 내가 보는 것은 그 사람이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이다. 원래도 비밀이 많은 요한이,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은 뭘까.
‘보고 싶어.’
생각해 보면, 상대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을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어떤 진실은 비밀로 두는 이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때 나는 행복감에 젖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
눈을 깜빡이는 순간, 바로 나를 감싸 안고 있던 요한이 내 위에 서 있었다.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탕처럼 달콤했던 순간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 같은 살벌한 눈빛이다.
“요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불렀다.
요한은 그런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심히 나를 바라보다가, 냉소했다.
“고작 너 따위.”
요한의 검지가 내 목을 훑었다. 이전과 달리 애정 따위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게.”
숨통이 단번에 틀어막혔다.
굵은 손가락 마디가 내 맥동을 음미하듯 살살 문지르다가 점점 조여왔다.
“부인.”
요한이 나를 조롱하듯 웃었다.
“이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