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넌 날 안달 나게 해
(131/182)
131화 넌 날 안달 나게 해
(131/182)
131화 넌 날 안달 나게 해
2023.03.03.
나는 두 눈을 감고 속으로 나무를 불렀다. 나무들이 하는 말은 인간이 하는 말과 달라서 사용할 때마다 요정의 힘이 소모됐다.
-나무님들.
들어주는 이 없이 퍼져 나가는 내 목소리가 참 공허하게 느껴졌다.
-지금 많이 아파서 대답하기 힘드신 것뿐이시죠?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일어나서 말씀해 주실 거죠?
-제가 나무님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해볼게요. 그러면 다시 전처럼 웃어주실 거죠?
세상이 텅 비었다.
“아무 목소리도 안 들려.”
목이 메어 주먹을 꽉 쥐었다. 나를 품에 넣고 있던 요한이 내 턱을 쥐어 얼굴을 살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가 알아채지 못한 상처가 있을까 집요하게 훑어내리는 요한의 애정.
내가 그토록 원했던 요한의 사랑.
매번 내 불안을 잠재워주던 그의 위로. 신기할 정도로 내가 듣고 싶어 했던 말만 해줬던 요한.
“의사가 다친 곳은 없다고 했는데, 화재 현장에 너무 오래 있다가 다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몰라. 한 번 더 진찰받아야겠다.”
이번만큼은 요한이 무슨 말을 해도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괜찮아.”
“많이 아픈 것 같은데.”
“화재 때문에 놀라서 그래. 요한도 알다시피 내가 그 숲을 많이 좋아했잖아.”
“……그랬지. 그 블란쳇 숲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래서 이번 화재에 충격이 컸나 봐.”
나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한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숲에 가려고?”
“응. 어떻게 되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나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블란쳇 공작가의 나무가 아니라 다른 나무들과 대화라도 되어야 하니까.
그런데 지금 나는 아무 나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일시적으로 나무랑 대화하는 능력을 잃은 게 아닐까?’
나무는 모두 무사한 게 아닐까.
“내가 안아서 데려다줄게.”
요한이 내 허리에 손을 감았지만,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빼냈다.
“미안, 지금은 내 발로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어.”
“…….”
요한은 말없이 그런 나를 바라봤다. 요한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했다.
“고마워. 갔다 올게.”
근처에 있는 아무 신발이나 신고 숲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베티와 페트리샤를 비롯한 사용인들과 마주쳤다.
“마님! 몸은 괜찮으세요?”
“숲으로 가시는 거면 제가 데려다-”
나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두 무시하고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깥에서는 한창 어제의 화재를 수습하고 있었다.
“서둘러 자재 옮겨! 이러다 온종일 수리만 하겠어!”
“거참, 수리할 곳도 많이 없는데 그리 급하게 할 것 있나.”
“그래, 그리 큰불이 났는데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행운이지. 숲이 크게 상하긴 했지만 나무야 다시 심으면 되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안도하는 소리가 내 가슴을 할퀴었다.
‘크게 이상할 것 없는 말이잖아.’
하지만 나는 혼자 다른 공간에 버려진 것처럼 고독했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모두 가짜 같았다.
“……날씨가 너무 좋네.”
처음 나무를 만났던 날도 이 정도로 환한 날씨였다. 떠들고 있던 나무들에게 우연히 말을 걸며 내 정체를 알게 됐던 날이었다.
‘그때 내가 요정이란 걸 알고 엄청 놀랐는데.’
생각해 보면 그건 참 행운이었다. 요정이 아니었다면 원작 내용을 알고 이렇게 블란쳇 공작가에서 잘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내 편인 나무들도 만나지 못했을 거고…….’
숲에 가까워질수록 멀쩡하게 움직이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선 채 심호흡했다. 가만히 있다간 주저앉을 것 같아 넘어질 듯이 숲을 향해 달렸다.
숲 앞쪽을 수색하고 있던 에리히가 나를 보고 놀랐다.
“마님,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불씨는 다 꺼졌지만 혹시 모르니 위험합니다. 얼른…… 마님?”
하지만 나는 에리히에게 인사하지 못했다.
“…….”
에리히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나무님들.
-나무님들, 들리시는 분 없으세요?
바닥에 가득 찬 그을음, 울창하고 곧게 뻗어 있던 나무가 반토막 나 바닥을 뒹굴었다. 시커멓게 덧칠된 것처럼 까맣게 타버린 나무도 있었다.
-하긴, 대답할 수 없겠네요.
주위를 둘러봐도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말리는 에리히를 뒤로하고 한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그나마 가장 멀쩡해 보이는 나무였다.
“제발.”
기둥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요정의 힘을 불어넣었다.
‘에덴 로즈도 요정의 힘으로 다시 피어났잖아.’
그러니 운이 좋다면, 불에 타 크게 상처 입은 나무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다 예스텔라가 자기 힘처럼 쓰던 것도 결국 내 요정의 힘이었고.
‘왜 흡수가 안 되지?’
내 요정의 힘은 나무를 그대로 통과하여 허공 속으로 흩뿌려졌다. 나무를 부둥켜안은 채 다시 요정의 힘을 욱여넣었다.
“제발 통해라.”
요정의 힘은 내 말을 듣는 것처럼 나무의 안으로 고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내가 신경을 끄는 순간 바람 사이로 흩어졌다.
되살릴 수 없다는 것처럼.
“……왜.”
예스텔라는 잘난 듯 아픈 사람을 고치는 데 요정의 힘을 썼다. 어쩌면 내 힘으로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안 되지?”
불을 끌 수도 없고, 죽은 나무를 치료할 수도 없다.
-아니, 이거 블란쳇 공작저 근처 나무 쪽에서 오는 힘인데.
-그쪽에서 자꾸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멀어서 잘 들리는 건가?
저 너머에서 나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아, 그래. 들린다. 워낙 요란하게 소리치고 있었어야지. 무슨 일 있느냐?
-아, 그러니까.
내가 알던 나무들과 비슷한 목소리에 기이한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솟구쳤다. 나무를 꽉 끌어안은 채 말했다.
-블란쳇 공작저 나무님들과 대화가 안 되어서요.
-그거야 그렇겠지.
나무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살아 있지 않은 나무와 어찌 대화할 수 있겠느냐.
-……네?
-멀리까지 소리치고 있으니 목이 좀 아프구나. 우리랑 대화하고 싶으면 문양이라도 새기게 더 가까이 찾아오련.
다른 나무도 내가 알던 블란쳇 공작가의 나무들처럼 아주 자상했다. 평소처럼 아가라고 불러줄 것 같다.
‘미세하지만 목소리가 달라.’
정말 죽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손톱을 세워 나무 기둥을 붙잡고 요정의 힘을 마구 부었다. 속이 울렁거려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거짓말이죠.”
하지만 개의치 않고 무작정 요정의 힘을 부었다.
“지금 너무 다쳐서 말을 못 하시는 거죠?”
그 순간 누가 나를 나무에서 떼어냈다. 그동안 숨 쉬는 것도 잊고 있었는지 호흡이 가빠왔다.
“……에스텔.”
요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살폈다. 그리고 눈썹을 찡그렸다.
“이럴 줄 알았어. 손가락 다쳤잖아.”
나무를 세게 끌어안다가 찔린 모양이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이렇게 울고 있으면서.”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한이 나를 보며 착잡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볼 때마다 부인은 매번 울고 있네.”
“…….”
“왜 나는 너를 기쁘게 해주지 못할까.”
요한이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줬다.
“네가 이렇게 마음 아파할 줄 몰랐어. 이럴 줄 알았으면 못 보게 하는 건데.”
“요한도 어쩔 수 없었잖아.”
상황은 대충 짐작이 갔다.
‘요한이 오자마자 불을 끈 게 바로 이 상황이라는 거겠지.’
요한을 탓할 상황이 아니다. 애초에 잘못을 한 사람은 숲에 불을 지른 존재다.
‘마물.’
원망할 거면 제대로 된 상대를 원망해야 한다. 내가 환영을 본 것만 봐도 그 마물이란 존재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그러니까 걱정 마. 나는 이해해.”
“그래도 네가 슬퍼하잖아.”
요한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내 볼에 입술을 쪽 맞추며 자상하게 말했다.
“약속했던 대로 원래 네가 알고 있던 숲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줄게. 크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야.”
“내가 알던 숲으로?”
“그래. 그러니까 마음 아파하지 마. 대신 다음에도 또 울면 그때는 대가로 키스를 받아낼 테니까.”
요한이 장난스레 덧붙였다. 하지만 내 가슴은 선득하게 가라앉았다.
‘화재로 흉하고 못 쓰게 된 나무들을 모두 치우고 깨끗하게 새로 복구해 줄게.’
숨쉬기가 어려웠다.
“대신 부인이 공들여 만들고 있던 에덴 로즈 정원은 무사하니까 한동안은 거기서 쉬고. 내 솜씨 알지, 아주 완벽하게 전처럼 되돌려줄게.”
요한은 아무것도 몰라.
‘그 숲에 있던 나무와 내가 친한 사이라는 걸 모른다고.’
상식적으로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러니까 저 말은 당연해. 내가 이해해야 돼.’
미리 말하지 않은 내 잘못이니까.
“……아니. 그러지 마.”
“그러지 말라고?”
“응. 그대로 둬.”
요한은 내 얼굴을 보며 의문스럽다는 듯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복구는 언제가 해야 할 일이야. 내가 무리할까 봐 걱정하는 거면 그런 걱정 안 해도-”
“그대로 두라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예민하게 나왔다.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요한을 바라봤다.
“…….”
뜻밖에도 요한은 내 반응에도 화내거나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내 손을 잡고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할게. 그대로 두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고마워.”
“고마워할 일 아냐. 부인이 부탁한 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왜인지 나는 요한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요한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니까!’
스스로에게 짜증스럽게 되뇌자, 요한이 걱정스럽게 내 눈가 위에 입을 맞춰줬다.
“많이 피곤한가 보다. 이제 돌아가는 건 내가 안아줘도 되지?”
그럼에도 나는 부드럽게 파고드는 목소리를 거부하지 못했다. 요한의 온기가 내 몸을 감싸자 습관처럼 긴장이 풀렸다.
“부인, 그러고 보니 부인이 처음 블란쳇 공작가에 왔을 때 보러 왔던 게 이 숲이었지.”
그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나도 아끼는 걸 불로 잃어봐서 얼마나 마음 아픈지 이해해.”
“……미안.”
“부인이 미안해할 일이 어디 있다고 또 사과해. 내가 자꾸 사과하면 벌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 안 나?”
요한은 곤두서 있는 내 기분을 달래주려 하는 듯했다. 나는 요한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한. 내 꿈이 뭐였는지 기억나?”
“가족이 가지고 싶다고 했던 그 어린 시절의 꿈?”
“응. 지금도 그래. 난 늘 혼자였잖아. 지금이야 요한도 있고.”
나머지는 다 사라졌지.
“요한이 내 유일한 가족인걸.”
나는 악의적으로 희망찬 생각을 품고 있는 나를 비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다.
‘요한은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하지만 그건 요한 잘못이 아니다. 결국 화재는 그 망할 마물 때문에 난 거니까.
‘그리고 마물은, 나 때문에 온 거지.’
뾰족한 마음이 돌고 돌아 내 스스로를 마구 후벼팠다.
‘마물 말이 틀린 것도 없어. 네가 있으면 모두가 다 불행해지지. 최소한 너 때문에 행복해진 사람 같은 건 없잖아.’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받지 못한 나. 사랑을 구걸하다가 포기하고, 그러고도 사랑받고 싶어 하는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나.
머저리 같은 나, 에스텔.
“힘들어 보인다.”
어느새 침실에 도착한 그가 나를 침대에 앉혀두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푹 쉬어, 아니면 계속 옆에 같이 있어줄까?”
“요한.”
나는 요한의 소매를 붙잡았다.
“요한은 절대 내 곁에서 안 사라질 거지?”
그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눈빛이다.
“안 사라져.”
“나 혼자 두지 않을 거지?”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다시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나는 천천히 두 손을 뻗어 요한의 양 뺨을 감쌌다. 요한이 흠칫 굳었다.
하지만 그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할지 이미 우리 둘 다 느끼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요한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여기 계속 있어줘. 내 곁에.”
요한이 내 옆에 있는 침대 이불을 꽉 그러쥐며 말했다.
“이러면 나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오해?”
요한은 나를 휙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탐닉하듯 입을 맞췄다. 정신을 잃을 것처럼 기분 좋은 키스가 이어졌다.
이렇게 키스를 하고 있으니 나쁜 생각은 더 들지 않았다.
나는 요한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그의 호흡을 느꼈다. 내 얼굴을 감싸며 짐승처럼 키스하던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넌 날 항상 안달 나게 해.”
담백했던 그의 손길이 농익어 내 몸을 덧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