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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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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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너 때문이다
2023.02.28.
리안드로는 요한을 보고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요한과 함께 온 기사들의 손에 끌려나갔다.
“죄송합니다, 리안드로 님.”
“너희가…….”
리안드로를 끌고 가는 자들은 한때 그의 부하들이었던 황실 기사단이었다.
“저희는 황실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황실에서 블란쳇 공작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현 황제가 요한을 중히 쓰는 건 맞다. 그렇지 않다면 반역죄로 몰락했던 자를 복위시키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위세가 너무 강한 블란쳇 공작을 경계하시기도 했는데.’
펠시스 후작가가 이렇게 몰락하게 되면 블란쳇 공작가를 막아설 만한 가문이 아예 사라지게 된다.
“블란쳇 공작. 큰 실수하는 거요.”
펠시스 후작은 리안드로가 끌려가는 걸 보고도 품위를 잃지 않고 요한에게 경고했다.
“펠시스 후작가는 제국을 오래 지탱해 온 명문가. 어떤 수작을 부리더라도 모두 펠시스 후작가를 믿을 거요.”
“협상하자는 건가?”
“일종의 거래지. 본래 세상일이란 것이 그렇지 않소. 복위된 블란쳇 공작가도 크게 무리하고 싶지는 않을 텐데.”
요한은 펠시스 후작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펠시스 후작이 그런 요한을 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블란쳇 공작은 매우 이성적이고 냉철한 자다. 이리 거칠고 무도해 보이는 모습은 위장에 불과할 터.’
리베르탄에 대한 복수를 성공한 것도 그렇고,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곧장 죽여버릴 것처럼 굴었지만 아직 죽이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당장 없애버렸다면 블란쳇 공작가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게 없었지.’
그리고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스텔라의 정체가 탄로 나면서 친부모인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솟았다.
가장 크게 이득을 얻을 때가 온 것이다.
‘이젠 성국과 황실에서 보상을 뜯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
상대가 이토록 치밀한 자라는 것은 꽤 무서운 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참 다행인 일이었다.
“펠시스 후작가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주겠소.”
“대가라.”
“펠시스 후작가는 리베르탄 공작가와는 다르오. 아마 내 도움 없이 큰 이득을 보기는 불가능할 거요.”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펠시스 후작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 내 계산대로다.’
뼛속까지 귀족인 요한이라면 응할 줄 알았다. 블란쳇 공작을 설득하려면 큰 손해를 봐야겠으나, 재판장에 끌려가 몰락하는 것보단 몇 배 나은 선택이었다.
“알아서 끌고 가.”
요한은 펠시스 후작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황실 기사가 펠시스 후작의 양팔을 붙들었다.
“블란쳇 공작!”
펠시스 후작이 두 눈을 부릅떴다.
“내 말 듣지 못하였소? 내 아들의 증거 하나로는 어차피 펠시스 후작가를 무너뜨리지 못하거늘!”
“그게 무슨 상관이지?”
요한은 무심하게 툭 말했다.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요한이 펠시스 후작의 앞에 섰다. 두 사람의 눈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네가 나랑 협상할 위치인 줄 아나?”
면전에서 모욕을 들은 게 처음인 펠시스 후작은 눈을 끔뻑였다. 요한은 그런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픽 웃었다.
“자신 있어 보이니, 재판장에 끌려가서도 똑같은 소리를 지껄여보면 되겠어.”
“정말 끝을 보자는 거요? 도대체 그리 한다고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네가 뭔데 날 걱정하지?”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조소가 떠올랐다.
“내 인생은 됐고 네 인생이나 걱정해둬. 네 대에서 그 자랑스러운 가문이 끝나게 생겼으니까.”
“그런 말이 아닌 거 알지 않소!”
펠시스 후작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진심으로 펠시스 후작가를 몰락시킬 생각인가?’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까지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펠시스 후작가의 몰락이 그에게 큰 이득을 주는 것도 아닌데.
“겁에 질렸군.”
요한은 한참 머리를 굴리는 후작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걱정 마라. 펠시스 후작가가 소문대로 떳떳하면 별일 없을 거다.”
“공작, 후작가에 이러는 이유가 뭐요?”
“글쎄, 후작은 이유를 알겠나?”
“설마 내 아들이 블란쳇 공작 부인을 몇 번 건드렸던 것 때문에 앙심을 품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흉포하게 번뜩였다. 후작은 제 아들뻘인 요한의 눈빛에 눌려 위축되었다.
“건드렸다니, 다른 사람들이 듣다간 오해하겠어. 내 아들은 내 부인을 일방적으로 괴롭혔다.”
“고작 그런 일 때문에…….”
후작이 치욕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요한은 그런 후작의 얼굴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고작 그것 때문이다.”
“…….”
“그 명예롭고 자랑스럽다던 네 가문은 고작 그 이유 하나로 처참히 무너질 거다. 아주 자랑스러워하면 좋겠군.”
후작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나갔다. 기사들이 맥이 탁 풀린 것 같은 후작의 두 팔을 잡고 연행했다.
“블란쳇 공작! 후회하게 될 거요!”
막 문밖으로 질질 끌려가던 후작이 소리쳤다.
“펠시스 후작가가 무너지면 제국의 황실부터 모든 게 다-”
요한은 패자의 발악을 즐거이 귀담아들으며 후작저 복도로 나갔다. 황실 기사 사이에 있던 블란쳇 기사단장 레이몬드가 요한에게 경례했다.
“주군, 수상한 지하실을 찾았습니다.”
“안내해.”
우습게도 후작가의 지하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것도 숨긴다고 숨긴 건가?’
감히 펠시스 후작저의 지하실이 수색당할 리 없다는 오만함마저 느껴졌다. 요한은 흑마법사답게 익숙하게 지하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현장을 찾아냈다.
‘실력도 없는 게 흑마법을 사용한다고 기준도 없이 사람을 희생시켰군.’
요한을 따라왔던 황실 기사들이 지하실을 보고 기겁했다.
“서, 설마 저기에 걸려 있는 것이 저희가 말로만 듣던 그 흑마법 제단입니까?”
“도대체 펠시스 후작가 같은 명문가에서 왜 흑마법을…….”
“저기 제물로 바쳐진 듯한 시신이 있습니다! 서둘러 확보하겠습니다.”
충격에 휩싸인 사람들과 달리 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홀로 다른 단서를 찾아 나섰다.
‘여기에 에스텔과 관련된 매개체가 있을 거야.’
그때 바닥 한가운데에 생뚱맞은 지푸라기 인형 하나가 보였다. 지푸라기에 백금발을 엮어 만든 인형이었다.
‘이걸로 에스텔에게 흑마법을 걸었군.’
요한은 다른 자가 발견하기 전에 서둘러 인형을 불에 태웠다. 이런 매개체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리 좋지 않으니까.
화륵-
지푸라기 인형은 빠르게 불탔다. 타오르는 백금발 사이로 화려한 금발이 언뜻 비쳤다가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졌다.
***
거대한 불이 세상을 잡아먹을 것처럼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사용인들은 전부 물과 모래를 가져가 불을 꺼! 절대 저택까지 불이 번져서는 안 된다!”
“마차를 모두 동원해서라도 물을 계속 가져와라!”
난데없이 치솟은 화재에도 사용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진압에 나섰다.
“페트리샤 님, 이상하게 불이 잘 꺼지지 않습니다. 물을 부어도 소용없습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정말입니다!”
페트리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화재의 원인은 밝혀냈나?”
“그것이, 알 수 없습니다. 숲 어딘가에 갑자기 불이 난 것 같은데, 저렇게 커지기 전까지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습니다.”
“……평범한 화재가 아니군.”
그때 베티가 정신없이 달려와 페트리샤에게 물었다.
“페트리샤 님, 마님이 어디 계신지 아세요?”
“마님?”
“네. 마님이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요. 숲에 들어가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요.”
그 순간 페트리샤와 베티는 동시에 불타는 숲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마님!”
“마님! 위험합니다!”
***
나무가 대답하지 않는다.
“제 목소리 안 들리세요? 불 때문에 많이 아파서 그래요?”
나무들이 불에 휩싸인 것을 본 순간부터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봐도 화재는 쉬이 진압되지 않고 있었다.
‘나무들이 불타고 있어.’
정신없이 불타는 숲을 향해 달렸다.
혹시 가까이 가면 말이라도 들릴까 싶어서. 가는 길에 발견한 하인들이 나를 붙잡아도 모두 무시했다.
“최대한 화재를 빨리 진압해 줘. 부탁할게.”
“마님, 위험합니다. 어서 다른 곳으로 대피를-”
“부탁할게.”
다른 사람 말은 다 무시하고 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님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조용하다.
“들리시면 가지를 흔들어주세요. 지금 블란쳇 공작가에서 불을 끄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조금만 버티시면 돼요.”
우지끈!
불이 붙은 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불똥이 튀었는지 살갗이 따끔거렸다. 눈이 따가웠지만 꾹 참고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요정의 힘.”
내가 올라타서 놀았던 가지가 부러진다. 웃으면서 기대었던 기둥이 새까맣게 뭉개졌다. 포근하게 날 감싸주던 잎사귀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부탁이야. 어떻게든 해줘.”
나는 넘치는 요정의 힘을 숲 전체를 향해 뿜었다.
“제발.”
두 눈 사이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열심히 요정의 힘을 부어도 나무를 휘감은 불꽃은 점점 커져만 갔다.
쿵! 근처에 있던 나무가 완전히 불타 옆으로 쓰러졌다.
“요한, 요한.”
불길 때문인지 목이 매캐했다. 나는 주저앉은 채 불타지 않은 나무의 기둥에 손을 대었다.
생생한 나무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요한, 부르면 바로 온다고 했잖아. 나 지금 네가 너무 필요해.”
언제나 요한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마법처럼 와줬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와줄 거다.
“요한.”
나는 신에게 기도하듯 요한이 선물했던 팔찌를 잡고 꾹 쥐었다. 그 순간 팔찌가 투둑, 끊어졌다.
‘뭐지?’
뒤에서 나를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마님! 왜 거기에 있으세요?”
베티와 페트리샤, 뒤로 많은 사용인이 나를 발견하고 구하기 위해 걸어왔다.
“하지만 나무가…….”
나는 아직 불타는 나무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기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다 너 때문이다.
음산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는 건, 요정인 네가 살아 있어서다.
새빨간 화염 속에서 익숙한 형태가 보였다. 꿈에서 봤던 마물의 얼굴이 잔상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마물?”
-네가 살아 있기 때문에 네 주변이 모두 불행해지는 거다. 더 이상 주변을 망치지 말고 죽어버려.
마물의 모습이 예쁜 예스텔라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제 만족하나요?
예스텔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당신이 모든 걸 다 망쳤어요. 당신 때문에 요한이 불행해지고 말 거예요.
“헛소리하지 마.”
-어떻게 그를 행복하게 해줄 건데요, 그에게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줄 수도 없는 게.
갑자기 주위의 불길이 하나도 뜨겁지 않게 느껴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가짜인 당신이 요한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당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불행해질 거예요. 당신 하나만 희생했으면 모두가 다 행복해졌을 텐데.
속이 울렁거렸다. 숲으로 들어온 베티가 나를 붙잡았다.
“마님, 뭐 하고 계세요? 어서 나가요!”
“베티, 너는 저게 안 보여?”
“네? 뭐가요?”
예스텔라가 나를 보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베티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지금은 위험하니까 나가서 얘기해요.”
“너는 저 소리가 안 들려?”
웃음소리가 내 고막을 찢을 듯이 커졌다. 나는 베티의 손을 뿌리치고 귀를 틀어막았다.
“마님. 지금 너무 위험해요.”
“귀가 너무 아파.”
그때 익숙한 큰 손이 우리를 막아섰다.
“내가 안고 가겠다.”
익숙한 저음이 들리는 순간, 나를 괴롭히던 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요한?”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남자가 나를 꽉 안아 들었다.
“매번 부인한테는 너무 늦게 도착하네.”
평소보다 급히 왔는지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품만은 여전히 따듯했다.
“당장 구해줄게. 같이 나가자.”
“요한.”
“왜, 부인.”
불길이 매섭게 타고 있는 와중에도 요한이 있으니 안심이 됐다.
“……나무들을 구해줘.”
든든한 내 흑막,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내 남자주인공이었다.
“걱정하지 마.”
때맞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요한은 그런 나를 품에 묻으며 말했다.
“내가 다 해줄게. 푹 쉬어.”
***
어느새 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머리맡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연히 화재가 벌어졌다는 게 말이 돼?”
“하지만 불을 다 진압했어도 원인을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화재가 계속 진압되지 않았던 건?”
“그것도 의문입니다만, 아마 한창 불이 커지는 중이라 효과가 없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불길이 꺾였으니까요.”
“그러면 그 숲에 있던 나무들은 어떻게…….”
나무 소리에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요한과 레이몬드가 보였다.
“나무들은 어떻게 됐어?”
“……내가 도착했을 때는 불이 너무 진행된 뒤로 아예 타버린 나무까지는 구할 수 없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그러자 요한이 나를 꽉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여줬다.
“다행히 부인이 아끼던 에덴 로즈 정원은 전부 무사해.”
“…….”
“화재로 흉하고 못 쓰게 된 나무들을 모두 치우고 깨끗하게 새로 복구해 줄게.”
나는 요한의 품에 멍하니 안긴 채 중얼거렸다.
“……진짜 목소리가 안 들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