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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위선자 (129/182)


129화 위선자
2023.02.24.



 
리안드로가 불손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노려봤다.


“아무리 저를 설득해야 한다 해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요.”

“리안드로,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펠시스 후작은 경솔한 아들의 대답에 화가 나기는커녕 황당해서 분노가 가라앉아버렸다. 후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워도 한참 잘못 키웠어. 분명 훌륭한 후계자로 키웠다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펠시스 후작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리안드로, 그간 블란쳇 공작 부인을 노린다면서 온갖 소란을 벌이는 동안 네가 무사했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했느냐?”

“그때 저는 황실 기사단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제 책임을 다했습니다.”

“정녕 세상일이 그렇게 깔끔하게 해결된다고 믿는 게냐?”

펠시스 후작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후작의 반응에 리안드로는 등골이 싸하게 식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게 또 있다는 겁니까?”

당황한 리안드로가 흥분해서 물었다. 펠시스 후작이 손으로 메마른 얼굴을 쓸었다.


“그때만이 아니다. 다이아나 공주가 탈출한 현장에서 네가 발견되었을 때 너는 별다른 취조 없이 풀려날 수 있었지.”

“그건 제가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아, 세상이 왜 그리 쉬이 네 말을 믿어준다고 생각하느냐?”

그 순간 리안드로는 결백을 주장하던 에스텔이 떠올랐다.


‘맞아요, 전 악녀예요. 그 대답을 원한 거 아니었어요?’

결국 에스텔이 옳았다. 그녀는 악녀가 아니었고, 세상이 그녀를 악녀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에스텔이 그렇게 된 이유는 악독한 사람들한테 잘못 걸려서다.’

그런데 제 아버지, 펠시스 후작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것이 제 오만한 착각이었음을 실감하게 됐다.

어쩌면 리안드로 역시 에스텔을 저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을 테니까.


“……제가 펠시스 후작가의 후계자라 그랬던 겁니까?”

“그래, 다 펠시스의 힘이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펠시스 후작의 얼굴에 자긍심이 스쳤다. 그는 조금의 수치심도 없어 보였다.


“우리가 명예롭고, 그 누구보다 정의로운 가문이라 믿고 있었기에 다들 너를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었던 거다.”

“……하나 실제로 펠시스 후작가는 부정하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건 다들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다는 거지. 그리고 넌 그 근본적인 믿음에 문제를 일으킬 뻔했다.”

리안드로는 펠시스 후작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지르고 싶었다.


‘왜 그리 떳떳하십니까?’

리안드로를 가장 명예로운 기사로 키우고자 했던 아버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위선적인 가면마저 사라진 펠시스 후작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펠시스 후작가의 정의가 무너지게 되면 리안드로 너 역시도 멀쩡하지 못할 거다. 설령 멀쩡하다 해도 지금까지처럼 살지 못할 거다. 모두 네 행동을 불신하고 의심부터 하고 보겠지. 그런 걸 바라느냐?”

“…….”

“지금까지는 치기로 봐줄 수 있다. 하지만 흑마법은 다르다. 정의 같은 순진한 생각은 버리고 네가 해야 할 게 뭔지부터 알거라.”

리안드로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얼굴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에스텔, 그래서 나를 미워했던 거였습니까?’

역겹고, 끔찍하다.

하지만 더 끔찍한 건 그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를 쉬이 뿌리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가 조사가 들어오는 것을 다 막았다. 흑마법을 막 접한 네가 그리 대단한 걸 할 수도 없었을 터, 증거를 모두 인멸하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리안드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펠시스 후작의 예상과 달리 리안드로가 사용한 흑마법의 증거는 확실하게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에스텔을 손에 넣고 싶다는 욕심에 흑마법을 무리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후작가의 지하실에는 대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억지로 바친 희생양과 제물, 가치를 잃어버린 가문의 상징까지, 전부.


“문제는 요한 블란쳇 공작이다.”

“그자가 왜 나옵니까?”

“블란쳇 공작이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고발했다. 네가 저지른 사고가 많다 보니 무시하기가 쉽지 않아.”

“……부정한 흑마법을 쓰는 그자가, 저희를 흑마법으로 고발했단 말입니까?”

펠시스 후작은 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자상하게 등을 토닥여줬다.


“흑마법을 썼다는 증거가 없으니, 사용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지.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당사자인 네가 중요하게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어느새 후작은 다시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평생 리안드로가 알고 있던 그 얼굴이었다.


“재판에 끌려가기 전에 너는 성녀 행세하던 그 되먹지 못한 것에게 온갖 죄를 뒤집어씌우거라.”

“……예?”

“어차피 이상한 수법까지 써가며 얼굴도 숨기고 있었으니, 우리도 그 악녀한테 조종당한 피해자인 척하면 모두 믿어줄 거다.”

펠시스 후작은 그런 제 계획이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격려의 의미로 아들을 두드려주었다.


“그러면 아들아, 이번만큼은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아버지, 제가 흑마법을 사용했던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쿠웅! 쿵!

저택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펠시스 후작이 리안드로를 보며 말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

펠시스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가문의 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주군께선 도련님이 보낸 편지를 보고 바로 도련님을 찾아오신 겁니다.”

“그래. 네가 내게 흑마법을 쓰겠다고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느냐.”

“전 그런 편지를 쓴 적 없습니다.”

“뭐라? 그러면 도대체 누가 알고 그런 편지를 내게 보냈단-”

펠시스 후작저 바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악! 펠시스 후작님을 불러와!”

“이곳은 펠시스 후작저입니다. 아무리 블란쳇 공작님이셔도 함부로-”

리안드로와 후작은 누가 말할 것도 없이 급히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달려갔다.


‘기사들?’

습격을 당한 것처럼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이 보였다. 흔적을 따라가자 그 끝에는 손님용 응접실이 나왔다.

요한이 응접실의 가운데에 앉아 그들을 반겼다. 주인이라도 되는 양 구는 오만한 태도에 후작이 눈썹을 찌푸렸다.


“블란쳇 공작. 이게 무슨 짓이오?”

“네 아들이 흑마법을 사용한 증거는 잘 처분했나?”

후작과 리안드로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요한이 굳은 표정을 보며 픽 웃었다.


“이런, 내가 너무 이르게 도착했나 보지.”

“…….”

“이거 안타까워서 어쩌나. 부자가 나란히 재판장으로 끌려가게 생겨서.”

 

***

하늘이 새하얗게 빛났다.

나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내 피를 이은 요정들을 증오한다는 것을 안다. 배신감을 느꼈겠지.]

[배신감?]

쿠르릉, 소리와 함께 환했던 하늘이 조금씩 새카만 빛으로 물들어갔다.


[나의 신이시여. 고작 그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부정한 존재입니다. 그 부정한 요정들이 당신을 타락시켜 없애 버렸던 겁니다.]

듣기만 해도 생생한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저건 도대체 무슨 소리지?’

그때 새카만 어둠 사이로 익숙한 것이 보였다.


‘이시도르 씨랑 있을 때 봤던 그 마물인 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붉은색이던 마물의 눈동자는 보라색이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움직여 나를 바라봤다.


[부정한 존재가 발버둥 치는구나. 그래 봐야 너흰 말살당해 없어질-]

그 순간 나는 잠에서 번뜩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익숙한 온기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공허해졌다.


‘요한이 없네.’

바깥을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또 얼마나 잔 거지?’

똑똑똑!

베티가 경쾌하게 문을 두드리며 나를 반겼다.


“마님, 정신이 좀 드셨나요?”

“아, 응.”

“간밤에는 두 분께서 좋은 시간 보내셨-”

갈색 눈동자를 굴려 침대를 바라본 베티는 제 입을 톡 때렸다.


“죄송해요.”

“아니야. 나는 좋았어.”

“……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제 나는 요한이랑 솔직하게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어. 이제 요한도 베티 네가 알고 있는 내 흉터에 대해서도 다 봤고.”

“아, 그러셨군요.”

베티의 표정이 밝아졌다.


“보세요, 주인님께서 마님의 흉터에 대해서 마음 아파해 주실 거라고 했잖아요. 그쵸?”

“응. 요한이 진짜 잘 위로해 줬어.”

물론 난 요한에게 아직 내 정체에 대해서만큼은 말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요정 얘기까지 할 틈이 없었지.’

내가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학대받았던 얘기를 주로 해서인지, 요정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다.


‘오늘 요한이 오면, 꼭 말해야지.’

이제 나는 더 비밀을 만들지 않을 거다.


‘원작에 대해서도 말할 거야.’

솔직히 요한이 뒤늦은 고백에 배신감을 느끼거나 실망할까 봐 여전히 무섭긴 하다. 하지만 요한은 내 흉터를 보며 울어줬다. 그리고 난 그런 그를 보며 크게 위로받았다.


‘요한, 나도 노력해 볼게.’

부부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하니까!


“마님.”

물끄러미 나를 보던 베티가 내 두 손을 잡아주며 해맑게 웃었다.


“잘 풀려서 정말 다행이에요. 사실 일이 잘못될까 봐 많이 걱정했거든요. 이제 두 분 모두 행복해지시는 일만 남았네요.”

“고마워. 이게 다 베티가 자기 일처럼 신경 써준 덕분이야.”

“그렇지 않아요. 마님이 잘하셨기 때문이죠.”

베티는 내 두 손을 토닥여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티의 환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잘 풀렸다는 게 실감 났다.


“배고프시죠?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주방장한테 얘기해서 특별히 더 신경 써달라고 말해 둘게요.”

“부탁할게. 참, 베티.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나는 문을 나서려던 베티를 붙잡고 내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금고 안에 넣어두었던 위조 신분증을 꺼내주었다.


“마님, 이건…….”

“베티도 알지만, 내가 도망갈 때 쓰려고 구해뒀던 거야. 베티가 알아서 처분해줘.”

신분증을 받아 든 베티가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응. 이제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놓지 않으려고.”

대비책을 마련해놓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요한과 부딪쳐 해결하기는커녕 도망칠 생각부터 하고는 했다.


‘앞으로는 계속 요한의 곁에 있을 거잖아.’

그러니 나는 도망칠 길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베티가 알아서 처리해 줘.”

“마님께서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베티는 복잡한 표정으로 위조 신분증을 꼭 쥐고 떠났다.


‘기분이 복잡하네.’

꽤 많이 고민해 보고 내린 결정이지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 정신이 드니?

-우리 목소리가 들리니? 아아, 아아!

나무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네, 저 들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러자 나무들이 급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기는, 네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말을 걸었지.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계속 대답을 안 하더구나. 무슨 일 있었니?

-저한테 계속 말을 거셨다고요?

-그래. 아무 말도 안 들렸니?

-네.

나무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참 이상하구나.

-혹시 그동안 이상한 일 없었느냐.

-그러고 보니 이번에 되게 무서운 괴물을 봤어요. 생긴 건 약간 짐승을 섞어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자기들끼리 수다스럽게 떠들던 나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 나무가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

-마물이요?

-마물을 만났느냐?

나무의 목소리를 타고 긴장감이 퍼져왔다.


‘그 괴물이 마물인가?’

하지만 마물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이상하게 그 괴물이 ‘마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찾고 있던 구멍에 딱 맞는 퍼즐 하나를 찾은 것처럼.


-맞는 것 같아요. 마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나무에게 물었다.


-마물이 도대체 뭐예요? 마물에 대해 아는 게 있으세요?

그 순간 갑자기 나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고요한 바람만 스쳤다.


-갑자기 불길하게 왜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거예요? 말하기 힘든 거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으니까…….

그때 창문 밖으로 붉은 무언가가 넘실거리는 게 보였다. 워낙 실감 나지 않는 광경이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저건…….”

시뻘건 화염이 나무들을 불사르고 있었다. 저택의 사용인이 혼비백산해서 외쳤다.


“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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