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너무 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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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너무 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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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너무 흉하지?
2023.02.21.
혀끝을 맴도는 초콜릿 맛에 집중했다.
하지만 다른 곳의 감각이 더 선명했다.
요한의 손이 오목 파인 등골을 타고 내려가 허리를 감쌌다. 바스락거리는 옷감 위로 그의 열기가 느껴졌다.
“……요한.”
나는 열기 오른 숨을 내쉬며 잘생긴 요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운이 살짝 내려가며 근사한 몸이 보였다.
매일 보던 얼굴인데 요한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오늘따라 더 멋있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두드러졌다. 지그시 나를 보던 요한이 더욱 가까워졌다.
“긴장하지 말라니까.”
“그렇게 말해도 긴장되는데.”
“그건 그렇네. 긴장을 풀게 하는 게 내 역할인데.”
요한이 욕망이 배어 더 낮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혀에 남은 초콜릿에 더 집중해봐.”
요한이 시키는 대로 초콜릿에 집중하자, 침을 꿀꺽 삼키게 됐다. 아직도 혀끝에서 진한 초콜릿 맛이 느껴졌다.
그때 그가 입술을 맞춰왔다.
요한의 숨결이 빠르게 내 몸을 파고들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온몸의 감각을 자극했다.
호흡이 부족해진 내가 그의 등을 힘겹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요한은 내게 입을 맞춘 채로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조금 더 거칠게 숨을 얽었다.
온몸이 그로 가득 차는 기분이다.
정신이 빠져나갈 것 같은 키스다.
“자, 잠시만.”
그와 맞닿아있는 부분은 입술인데도 발가락까지 곱아들며 온몸에 열이 올랐다. 요한이 희열에 잠긴 목소리로 내 목을 깨물었다.
“예쁘네.”
나른한 웃음기가 달콤한 분위기를 적셨다.
“내 자국이 다 남고.”
그의 입술이 내 어깨와 쇄골을 맞추고 천천히 내려갔다. 요한이 움직이는 위치마다 긴장돼 솜털이 바짝 섰다.
‘이렇게 가다 보면…….’
긴장되던 순간이 다가왔다.
‘이미 마음먹고 있던 일이잖아.’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눈을 꾹 감았다.
‘요한은 내가 학대받은 줄 알아.’
그리고 학대받은 나를 대신해서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내 흉터를 보고 실망해서 떠날 리 없다.
‘요한을 믿어야 해.’
요한의 손이 천천히 내 슬립을 문지르며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동안 내가 계속 감추고 싶었던 비밀이 드러났다.
요한이 손을 멈췄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파르르 떨며 겨우 눈을 떴다.
요한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내 흉터를 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며 내 흉터를 집요하게 살폈다.
이상하게 무서웠다.
눈가가 붉어지며 숨이 막혀왔다.
숨 막히는 고요가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심판받는 죄인처럼 가만히 요한을 보고 있었다.
“……에스텔.”
요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응, 요한.”
“이거, 흉터 맞지?”
“요한이 생각하는 거 맞아.”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목소리에 스민 물기는 어쩔 수 없었다.
“…….”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요한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평소라면 요한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든 파악하려 했을 거다. 나는 타인의 감정을 제법 잘 읽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 요한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의 생각을 읽는 게 두려워졌다. 그래서 난 두 손을 모아 내 얼굴을 가렸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
다행히 요한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내 흉터를 보고 혐오스러워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나머지 부분은 다 외면하고 싶었다.
“미안.”
내가 버티기 힘든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끼면, 요한의 앞에서 평소처럼 잘 지낼 자신이 없어서.
“미리 말하지 못해서.”
무서운 불안이 온몸을 지배했다. 차라리 먼저 말할 걸 그랬다는 후회도 들었다.
“일부러 속이려고 말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어. 차마, 말할 자신이 없었어.”
“에스텔, 손 치워봐.”
“나 너무 흉하지?”
요한이 내 두 손을 잡고 얼굴에서 치웠다. 요한의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내 얼굴 봐, 에스텔.”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평소와 같았다. 화가 난 것처럼 격양되어 보였지만, 나를 향해 지어주는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나한테 화난 건 아닌 것 같아.’
요한은 턱과 손에 잔뜩 힘을 준 채 분노했다.
“내가 화난 것 같아?”
“……응.”
“그래, 화났어.”
창백해진 아름다운 얼굴에서 붉은 눈동자만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내가 누구한테 화난 것 같아?”
“모르겠어.”
“너한테 화난 게 아냐. 부인이 뭘 잘못했다고 부인한테 화를 내겠어.”
요한이 거칠어진 숨을 최대한 죽이려 노력하듯 목소리를 깔았다.
“나 자신한테 화난 거야.”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에서 정제하지 못한 살의가 흘렀다.
“이거. 이 흉터.”
내 슬립을 움켜쥔 손이 힘에 겨워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에라도 그 누군가를 찾아서 찢어 죽일 것처럼.
“누구 짓이야.”
“…….”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낸 흉터,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 내 눈가에서 눈물이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응, 맞아.”
울먹거리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나한테 그랬어. 내가…….”
“네가.”
“내가 좋은 딸이지 못하다고.”
겨우 한마디를 내뱉은 건데도 온몸이 계속 떨려왔다.
“내가 입양아 주제에 고마운 줄 모른다고 그랬어.”
“미친놈들.”
요한이 이를 아득 갈았다.
“나한테 화나지 않은 거 맞지?”
“아니야.”
“그런데 왜 나한테…….”
치솟는 요한의 분노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여기서 울면 안 돼.’
흉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서로 거짓말하지 않기로 한 만큼 최대한 솔직하게 내 얘기를 다 털어놓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떨어졌다.
“그런데 왜 화내?”
“부인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무서워?”
“무서워.”
나는 어떤 종류든 사람의 분노가 무서웠다. 그것도 상대가 좋아하는 남편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한테 화 안 난 거 맞아? 내가 그동안 너를 속여서 화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
머리가 새하얘져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한은 내 웅얼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다 알아들었는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정말 화 하나도 안 났어.”
“왜 화가 안 나?”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난 요한을 속였잖아.”
나는 목이 졸리는 사람처럼 자꾸 숨이 찼다.
“난 의도적으로 요한한테 내 흉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어. 어떻게 보면 나는 처음부터 하자 있는 신붓감이었던 셈이지.”
“……에스텔.”
“흉터뿐만이 아니야. 귀족 혈통도 아닌 입양아인데다, 소문도 끔찍할 정도로 안 좋았으니까. 요한이 그런 나를 왜 부인으로 삼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나는 문제가 많았지.”
“그렇지 않아.”
“하지만 현실이 그런걸. 지금 내 평판 하나 달라졌다 해도 딱히 바뀌는 건 없어.”
난 여전히 평민 출신 입양아고, 리베르탄 공작가는 반역죄로 몰락해 든든한 친정조차 없는 여자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어. 하지만 요한이 날 미워할 만한 이유 한 가지를 더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던 거 같기도 해.”
담담한 내 고백에 요한의 눈썹이 아픈 듯 찌푸려졌다.
“이런 나라도 여전히 사랑해?”
내 맹목적인 눈빛에 요한이 내 양 볼을 붙잡았다. 그리고 되뇌듯이 말해줬다.
“사랑해.”
“…….”
“이런 너라도가 아니라 너라서 사랑해.”
목이 멘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흉터에 시선을 주던 요한이 손으로 오돌토돌한 흉터를 살폈다.
“많이 아팠지?”
“어차피 요한도 흉터는 많잖아. 그게 더 아파 보이던데.”
“나는 네 흉터가 훨씬 아파 보이는데.”
요한의 검지가 길쭉한 흉터를 쓸어내렸다. 닿은 곳마다 열기가 올라 몸을 움찔하게 됐다.
“이 흉터를 보고 있으면, 네가 나한테 다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다 들리는 것 같아.”
“정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자꾸 상상하고 걱정하게 돼. 그래서 그런 네가 더 걱정되고 마음이 쓰여.”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나는 이런 걱정을 바랐구나.’
요한이 나를 흉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서는 이미 요한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흉터가 학대로 생긴 흉터가 맞아서 다행이야.’
솔직히 그동안 베티나 의사한테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건, 이 흉터가 생긴 원인을 알지 못해서였다.
‘큰 고통 없이 생긴 흉터기도 하고.’
왠지 아프지도 않은 흉터로 생색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 난 이게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어린 예스텔라를 위해 나를 학대하다 만들어놓은 흉터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왜 고통이 없었는지는 모르겠네.’
아무튼 그래도 학대당한 건 사실이니, 최소한 이 흉터로 요한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셈이다.
‘요한이 내 흉터를 보고도 혐오하지도 않고, 가치가 떨어졌다고 싫어하지도 않았어.’
내 기대대로 풀리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채로도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갔다.
“난 이제 괜찮아. 지금 나한테는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요한이 있잖아.”
“……그래, 내가 같이 있으니까.”
요한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하.”
하지만 내 흉터를 본 그는 분기가 다시 차오르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흉터들을 정성스레 문질러 주었다.
“흉터, 다른 데 더 있어?”
“요한이 발견한 게 다야.”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말한 요한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에스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다 해줘.”
“……무슨 얘기?”
“그냥, 하고 싶은 얘기 다. 리베르탄에서 억울했던 얘기도 좋고, 짜증 났던 얘기도 좋고, 힘들었던 얘기도 좋고. 그냥 하고 싶은 얘기 전부 다.”
요한의 품에 폭 안기자 그의 체취가 내 온몸을 뒤덮었다. 나는 눈물 섞인 숨을 들이켜며 입술을 떨었다.
“진짜 크게 생각나는 거 없는데.”
“그러면 안 해도 돼.”
요한이 큰 손으로 내 등을 토닥여줬다. 규칙적으로 내려앉는 손이 내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그러면 난…….”
갑자기 치솟은 감정이 북받쳐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니까.”
온몸에 고인 감정이 제대로 된 말이 되지 못한 채 입술 위에서 흩어졌다. 흐느낌이 섞인 숨소리만 떨어졌다.
“진짜 별건 없는데.”
“난 그 별거 아닌 게 너무 듣고 싶은데.”
요한은 천천히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손가락 위에도 입을 맞춰주었다. 눈 앞을 가려서 더 선명하게 들리는 그윽한 목소리.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다 얘기해 줘.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네 편을 들어줄게.”
단단한 그의 팔이 내 움츠러든 몸을 파고들어 감쌌다. 요한의 든든한 온기가 느껴지자,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흐느낌이 커져 울음이 되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못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자꾸 울면서 힘들어하는 것만 보이면 요한이 나한테 질릴지도 모른다.
“맞아. 요한, 나 너무 힘들었어. 진짜 많이 힘들었나 봐. 너무 많이 외롭고, 거기에서 내 편은 하나도 없었어.”
“쓰레기 같은 놈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다들 나한테만 뭐라고 했어. 그래서 최대한 잘 보이고 싶었는데, 그래도 난 미움만 받았어.”
하지만 나는 온몸에 퍼진 감정을 눈물로 내보내는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냥 내가 다 문제라서 그랬대.”
“그놈들 내가 다 처리해 둬서 다행이야. 설마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지?”
“그런 건 없었어. 거기에서 나랑 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뭐.”
한번 말문이 터지자, 우르르 모든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요한은 내가 말을 멈추고 그의 눈치를 힐끔 볼 때마다 눈물로 얼룩진 내 눈가에 입을 맞추며 나른하게 웃어줬다.
“더 얘기해 줘.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잖아.”
***
리안드로는 펠시스 후작의 지하에서 본관으로 올라갔다.
“아…… 버지?”
펠시스 후작이 가문의 기사들을 대동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리안드로 펠시스, 하나만 묻겠다.”
펠시스 후작은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너 설마, 흑마법을 사용했느냐?”
리안드로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순간 펠시스 후작이 이를 꽉 깨물며 아들의 뺨을 후려쳤다.
“네가 제정신이냐!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리안드로의 입안이 터져 피가 났다. 리안드로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반항적으로 후작을 노려봤다.
“제가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정녕 모른단 말이냐, 흑마법을 쓴다는 게 어떤 일인지 몰라?”
“압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이 펠시스 후작가의 명예가 너 때문에 바닥까지 떨어지게 생겼어!”
리안드로는 격분한 아버지를 보며 냉소했다.
“……어차피 더 떨어질 것도 없는 부정한 가문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무너질 명예였다면 지금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미친 게냐?”
펠시스 후작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까지 무엇이 네 방만함을 버틸 수 있게 해줬다는 게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펠시스 후작가가 명예로운 가문만 아니었다면 넌 진작 리베르탄처럼 재판장에 끌려갔다! 그런 주제에 뭘 잘했다고 헛소리야!”
처음으로 리안드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상상치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