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약속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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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약속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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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약속해 줄 거지?
2023.02.14.
요한이 악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악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보지?”
“또 요정.”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 요정 얘기가 계속 나오는군.”
“그거야 요정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지. 요정이 답인 문제를 계속 물어봐 놓고 그런 반응인가?”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악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악마는 어쩐지 요한이 제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한낱 피조물일 뿐인데.’
“이상한 부분에서 트집 잡지 마. 협상을 무를 권리가 있는 건 너뿐만 아니니까.”
“그럴수록 네 대답이 더 어색하게 들리는데.”
요한은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요정을 제물로 바치면 너한테 무슨 이득이라도 돌아오나?”
“하, 거참. 의심만 많아선.”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이 짚이는군.”
요한이 제 손에 마력을 조금씩 불어넣기 시작했다. 악마는 그 마력에서 위압을 느꼈다.
“하필 그 스텔라 성녀가 리베르탄 공작의 친딸이었지.”
“뭐가 그리 이상한가?”
“모든 게 다. 갑자기 성녀의 신성력이 바닥났던 것도, 내가 하필 성녀를 볼 때마다 요정에 대한 기억을 찾게 된 것도.”
솔직히 요한은 그동안 요정이란 존재를 완전히 잊고 살았다.
‘굉장히 이상하지.’
요한은 애초에 무언가를 잘 잊는 사람이 아니다. 특히 그 요정은 어린 요한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존재다.
‘그런 존재를 잊을 수 있다고?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그리고 아주 공교롭게도 그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성국에서 온 신관이 예스텔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줬을 뿐이야.’
‘신관이?’
‘그래. 그 애가, 에스텔이 가장 고통스럽게 살게 괴롭혀야 한다고 했어. 너무 지나치지 않은 수준으로 적당히! 그래야 우리 딸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바로 리베르탄 공작 부부.
그들은 악랄한 술수로 제 딸을 부활시키고도 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왜 네 생존을 알리지 않았지?’
‘아직 부모님이 알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리고 전 성녀로 살아야 하니까…….’
‘그게 뭐가 어떻다고?’
‘리, 리베르탄 공작가의 딸이 성녀라고 하면 이상하니까요!’
그때 후회하며 무너지던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꼴은 제법 볼만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리 유의미한 정보는 더 나오지 않았다.
‘성황의 목적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에스텔을 처절하게 괴롭혀서 고통스럽게 하면 된다는 명령을 들은 것에 불과했다.
‘어째서 에스텔인지, 왜 에스텔에게 그런 짓을 해야 했는지.’
하지만 예스텔라가 이성을 잃고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에스텔의 정체가 추측이 갔다.
‘가짜가 순리대로 제게 힘을 주었다면…….’
예스텔라의 힘, 신성력. 그 비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한 헛소리를 추측해 보면, 예스텔라는 에스텔의 힘을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신성력의 주인이 에스텔이라면, 에스텔의 정체는 진짜 성녀다.
‘그런데 왜 성황이 진짜 성녀인 에스텔에게 저주를 걸고 죽이려 들었던 거지?’
“이봐, 요한.”
길어진 침묵에 악마가 따분하다는 듯 혀를 놀렸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면 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나야 네가 마력을 헛되이 쓰든 말든 알 바 아니다만.”
“……그러고 보니 너.”
심상치 않은 얼굴로 요한을 보던 악마가 평온하게 되물었다.
“왜, 이제야 나와 대화할 마음이 생겼나?”
“저번에 내 부인의 쿠키를 달라고 했던 적도 있고.”
악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쿠키는 좀 잊어! 주지도 않아놓고서!”
“그래, 넌 가끔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요구하고는 하지.”
실제로 악마는 함정처럼 계산에 맞지 않는 대가를 거래 조건으로 들이밀었다. 물론 요한은 그것을 함정이라 생각했다. 진짜 목적을 가리기 위한 함정.
“그래! 너도 잘 알면서 왜 그래.”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
요한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에스텔에게 어떤 관심이 있지?”
“…….”
“그것이 에스텔의 정체와 관련이 있나?”
그러자 당황한 듯했던 악마가 돌연 무표정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널 속이긴 힘들군. 참 어려운 인간이야.”
악마의 몸이 점점 커졌다. 방 전체를 가득 채울 것처럼.
“그동안 오래 거래해 왔으니 짧은 단서를 하나 주지.”
“단서?”
“너는 악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요한이 눈살을 설핏 찌푸렸다.
“네가 신이 존재했던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래, 내가 그동안 인간과 어떤 것을 거래하며 살아왔을 것 같나?”
“악마 네 목적이 뭐지?”
“그것까지 말해줄 순 없지.”
악마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네 부인은 내 계획에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다.”
“…….”
“그러니 열심히 지켜보거라.”
요한이 더 물어볼 틈도 없이 악마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요한은 악마가 사라진 자리를 말없이 노려봤다.
‘도대체…….’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걱정하지 마, 에스텔.”
하지만 요한은 에스텔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내가 다 파헤쳐줄게. 그러니 너는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시작은 어리석게도 흑마법을 이용해 에스텔을 공격했던 펠시스 후작가였다.
***
“으으…….”
나는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겨우 일어났다. 확인해 보니 며칠간 아주 크게 아팠다가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하긴. 큰일이기는 했지.’
그래도 헨리 씨는 내 몸 상태가 아주 건강하다고 해줬다. 베티가 가져다준 식사를 마치고 나니 룬이 나를 보러 찾아왔다.
“꺄우!”
룬은 나를 보자마자 꽉 끌어안으며 내 볼에 뽀뽀해 줬다.
“스테리, 스테리. 사라나쏘.”
어쩐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는 룬의 흑발을 쓰다듬어줬다.
“내가 자고 있어서 룬이 많이 걱정했구나?”
“웅! 스테리 아야 하쟈나. 스테리 지꿈도 아야 해?”
“아니. 우리 룬이 걱정해 줘서 그런가, 하나도 안 아프고 멀쩡하네.”
룬을 꼭 끌어안자 보드라운 아기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좋아서 자꾸 뽀뽀해 주자, 룬이 까르르 웃었다.
“스테리, 루니 간지러어!”
“간지러워? 그러면 뽀뽀하지 말까.”
“우, 우우우…….”
룬이 고민하는 것처럼 빵실빵실한 두 볼을 부풀리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여울까.’
내 힘에서 태어난 아기라서가 아니라, 룬은 정말 모두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그러고 보니 좀 더 큰 거 같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몸집이 더 커졌다. 발음할 수 있는 것도 더 많아졌고.
‘이렇게 보니 요한을 더 닮은 것 같기도?’
한참 고민하던 룬이 큰 결정을 내리듯 한숨을 쉬었다.
“스테리 뽀뽀 허라카께.”
“뽀뽀하는 거 허락해 주는 거야?”
“웅, 스테리니까!”
룬과 함께 있으니 그 자체로 치유받는 기분이다.
‘아기란 참 좋구나.’
통로를 막기 위해 남아서 했던 고생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진짜 고생했지.’
이시도르 씨와 함께 요정의 힘을 다루는 수련을 하기는 했지만, 그때 내가 다뤄야 하는 힘은 차원이 달랐다.
‘요정의 기운이 뭔가 살아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마구 날뛰는 바람에 통로를 메꾸기는커녕 더 넓혀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결국, 해냈다.
‘……이시도르 씨가 알면 뿌듯해하셨겠지.’
이시도르 씨는 번번이 요정의 힘 수련에 자신 없는 나를 어색하게 위로하곤 했다.
‘너는 재능이 없는 게 아냐. 네가 요정의 힘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네 힘이 유독 큰 편이라 웬만한 요정들도 다루기 힘들었을 거다. 적응만 하면 너는 그 어떤 요정보다 강한 힘으로, 기적을 이뤄낼 수 있어.’
이시도르 씨를 떠올리자 목이 메었다.
“스테리, 아야 해?”
내가 슬퍼하는 걸 눈치챈 룬이 내 어깨를 단풍잎 같은 작은 손으로 토닥여줬다.
“울지마, 스테리. 루니 도아주께.”
“고마워.”
슬퍼하고 있으니 괜히 아기인 룬도 힘들어할까 봐 걱정이 됐다.
‘난 내 생각보다 더 이시도르 씨를 마음 깊이 담아두고 있었구나.’
언젠가 사라질 사람이라 생각하고 가까워지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헛수고였던 모양이다. 헛헛한 마음이 쉬이 채워지지 않았다.
“에스텔.”
그때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좀 어때?”
“아, 요한.”
요한의 얼굴이 살짝 초췌해져 있었다. 더 날카로워진 턱선과 깊어진 눈매 때문인지 전보다 더 퇴폐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요한이 구해주러 와서 그런가, 다 멀쩡해졌어.”
그때 룬이 재빠르게 요한에게 일러바쳤다.
“스테리 우러써!”
“그래, 에스텔이 울었어?”
“아, 룬. 그건 아파서 운 게 아니야. 요한도 오해하면 안 돼.”
“그러면 뭔데?”
“그냥 좀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어.”
나를 위해 희생한 이시도르 씨, 다른 사람에게 그에 대한 감사조차 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착잡하게 했다.
“뇨하, 스테리 토다토다 해조.”
룬이 요한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요한은 그런 룬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게 할까?”
“응! 루니는 모타니까 뇨하가 해조! 토다토다, 아라찌?”
룬은 씩씩하게 자리를 피해주겠다면서 침대에서 내려가 기어서 방을 나갔다.
“세상에…….”
나는 알아서 기어나간 룬이 잘 나간 것을 확인하고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룬이 언제 저렇게 기어 다닐 수 있게 됐지.”
“그러게, 언제 저렇게 컸나 몰라.”
요한 역시 나처럼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팔로 감쌌다.
“이제 둘만 남았네.”
“응?”
“아까 룬이 한 말 못 들었어? 내가 너를 토닥토닥해 주라잖아?”
룬이 했을 때만 해도 별말이 아니었는데, 요한이 하는 말이라서인지 왜인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렇지. 헨리 씨한테 괜찮다고 진찰받았는데 들었어?”
“방금 듣고 왔어.”
침대에 앉은 요한이 나를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앉은 뒤에야 그의 무릎 위라는 것을 자각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보다 둘만 있는데 좀 더 솔직해지면 어떨까?”
“어떤 식으로……?”
“내가 네 꿈에서 나간 뒤 아무 일도 없었어?”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집요하게 반짝였다.
“아까 룬이 울었다고 한 것과 관련 있을 것 같은데. 가능하면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어. 전부 다.”
“사실 나도 잘 모르는 게 많긴 한데…….”
“그러면 말하고 싶은 부분만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줘. 그건 가능하지?”
“진짜 별건 아니었어.”
눈을 내리깔고 있던 내가 요한과 눈을 마주 봤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저주는 해결되었고, 통로도 막아놓고 왔으니 예스텔라가 저주로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잘 해결되고 있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속엔 큰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했다.
“하지만 요한, 나도 부탁할 게 있어.”
그 순간 내 방구석에 걸어두었던 태피스트리가 보였다. 이시도르 씨를 만나기 위해 사용했던 태피스트리는 이제 그 기능을 잃고 완전히 평범해졌다.
“우리는 서로 다 말하지 못한 게 많잖아. 일부러든, 실수로든. 사실 모든 걸 다 아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
요한의 손을 붙잡고, 그의 눈을 다시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우리 지금까지는 잊고 앞으로는, 절대 서로 거짓말하지 말자.”
“…….”
“상대를 위한 거짓말이든 뭐든 거짓말은 거짓말이니까.”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당황을 모른 척하고 생긋 웃었다.
“약속해 줄 거지?”
이상하게 요한은 평소처럼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
[괴물은 지하실에 있는 부인을 발견했습니다.]
[부인은 아직 괴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괴물은 부인의 뒷모습이 떨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이제 괴물이 바랐던 행복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요.]
[그러나 괴물은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부인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깨달은 부인이 그를 배신하기 전, 성의 가장 높은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부인이 사랑이 사라진 얼굴로 그를 보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