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악취미
(125/182)
125화 악취미
(125/182)
125화 악취미
2023.02.10.
눈을 감았다가 뜰 새도 없었다.
갑자기 시야를 가득 채운 괴물의 피가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투욱, 그토록 기세등등했던 괴물이 아래만 남은 채 끈 떨어진 인형처럼 옆으로 넘어졌다.
“그렇지, 에스텔?”
요한이 눈가를 달콤하게 휘며 웃었다. 온몸을 적신 붉은 피보다 더 붉은 눈동자가 눈웃음 사이로 감춰졌다.
그가 팔에 묻은 피를 털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피가 튀어서인지 옷소매를 접어 해결했다.
“저런 개소리나 듣고 있느라 많이 피곤했겠다.”
나는 평소처럼 쉬이 요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했다.
눈앞의 요한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요한은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보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내가 그렇게 좋아?”
“……아, 응.”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요한이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해서.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야?”
“네가 있으니까.”
요한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네가 있는 곳은 어디든 다 쫓아갈 거라고.”
“…….”
“그러니 벗어날 생각 같은 건 하지 말라고.”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던 요한은 피로 얼룩진 제 손을 보고 ‘너무 비위생적이네’ 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 반으로 갈라졌던 괴물의 고개가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괴물이 입을 벌리며 사납게 웃었다.
“본인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줄도 모르고 자만하는 꼴이란.”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인가?”
요한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머리만 남은 꼴로 짖어봐야 하나도 안 무서운데.”
“네가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건 착각이다.”
괴물도 나처럼 요한을 상대하는 건 아니라고 느꼈는지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으냐. 결국 너는 버려지게 될 거다.”
“미안해, 에스텔.”
요한이 나를 보며 사과했다.
“저깟 괴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개소리를 듣게 했네. 소리도 내지 못하게 아예 뭉개버려야 했는데.”
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괴물을 발로 짓밟았다. 하지만 방금 전과 달리 괴물은 쉬이 뭉개지지 않았다.
“이거…… 재밌네.”
요한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방금 전 자신감이 마냥 근거 없는 건 아니었나 봐.”
실제로 괴물은 요한이 발로 밟고 있는데도 망가지지 않은 채 나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한번 이 남자를 끝까지 믿어 보거라. 처절하게 배신당한 뒤 절망에 빠질 네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콰득! 결국 요한의 발이 괴물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하필 마법도 안 통해서 성가시네.”
이미 괴물은 사라졌는데도 요한은 원한이 가득 실린 눈으로 괴물의 시체를 없애버릴 듯 노려봤다.
“그래도 이제 없애버렸으니 저딴 개소리는 잊어버려, 부인.”
“아, 그래.”
“……하아.”
요한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금 저딴 말을 신경 쓰는 건 아니지?”
“에이, 아니야.”
“신경 쓰는 얼굴인데.”
“…….”
“네가 아무리 표정을 관리해도 내 앞에서는 안 통해. 다 보여.”
나도 모르게 얼굴을 움찔했다. 요한은 피 묻은 손이 걸리적거린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 턱을 쥐었다. 그리고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솔직히 그래, 저런 말을 갑자기 들었는데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이상하지. 당연해.”
“요한의 마음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냐.”
“다시 한번 말할게. 내가 널 버릴 일 같은 건 없어.”
“…….”
“내 말을 못 믿고 불안해해도 상관없어. 앞으로 평생 내 곁에 있다 보면 결국 나를 믿게 될 테니까.”
진득한 붉은 눈동자와 단호한 목소리에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괴물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상관없이 요한만 의지하고 싶어졌다.
‘그래, 상대는 요정을 없애버리던 괴물이야.’
그런 괴물의 말을 믿다가 사랑하는 남자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더 바보 같은 짓이다.
“나도 요한을 믿어.”
이렇게 요한한테 의지하고, 마음을 줘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러다 너무 지나칠 정도로 의존적으로 변할까 봐 두렵다.
“앞으로는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을게.”
“역시 내 부인이야, 아주 현명해.”
요한이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 네가 더 신경 쓸 필요 없는 이유가 따로 있어. 방금 너를 공격하던 저건 흑마법의 산물이거든.”
“흑마법의 산물?”
“그래. 아마 리안드로 놈이 널 차지하기 위해 흑마법에 손을 댄 모양이야. 너와 날 갈라놓기 위해 수작 부리던 걸 보면 뻔하지.”
요한은 내가 무서워할까 염려했는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하지만 더 걱정하지 마.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서 방비를 못 했을 뿐이니까.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 따위 겪지 않게 해줄게.”
나는 다정한 요한을 보며 고심했다.
‘요한은 정말 저 괴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걸까?’
요한은 이시도르 씨도 무찌르지 못했던 괴물을 손쉽게 없앴다. 그런 걸 보면 요한의 말을 믿어 마땅했다.
‘그런데 어째 저 괴물은 그렇게 만만하게 볼 존재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요정이라 괜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리안드로는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거야?”
“확실한 증거는 더 자세히 캐봐야지. 하지만 내가 널 구해서 나오는 순간부터 그놈들은 끝이야. 이 정도 수준의 저주는 무조건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으니까.”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테리!”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룬이 나를 폭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놀라서 룬을 바라봤다.
“룬? 너는 어떻게 여기에…….”
“루 스테리 구하꼬야!”
룬이 꺄르륵 웃으며 나를 토닥토닥해 줬다. 요한이 설명해 줬다.
“룬이 널 구하러 올 수 있게 도와줬어. 정령이라 그런가, 따로 능력이 있었나 봐.”
“그러면 둘이 같이 왔던 거야?”
“처음엔 그랬는데 떨어질 때마다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더라고. 룬이 없었으면 널 빨리 구하러 오기 힘들었을지도.”
그 말을 들으니 이 작은 아기가 되게 멋있게 느껴졌다. 요한이 팔짱을 낀 채 룬에게 물었다.
“룬, 아까까지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거야. 계속 이렇게 멋대로 사라질 거야.”
“우웅…….”
룬은 대답을 회피하려는 듯 내 품에 폭 고개를 숨겼다. 나는 그런 룬의 등을 토닥여줬다.
“날 구해주러 오다가 일이 생겼던 거지, 그렇지?”
“웅.”
“룬, 구해주러 와줘서 고마워.”
룬이 남색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루니 머시써쏘?”
“응, 아주 멋있었어.”
내 품에 안겨 생글생글 웃던 룬이 요한의 팔찌를 빤히 바라봤다.
요한이 팔찌를 들어 보였다.
“아, 이건 네 마음 속에 들어오느라-”
그 순간 꿈이 깨지는 것처럼 다 같이 서 있던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 뭐지?’
모든 게 사라진다고 느낀 찰나, 묘한 통로 같은 것이 보였다.
‘저 통로는…….’
자세히 보니, 그동안 예스텔라에게 내 힘을 전해주던 통로 같았다.
‘이시도르 씨가 저주가 다 해결됐다고 했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대비해 놓을수록 좋았다.
‘저걸 다 막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내 몸에서 자각도 못 했던 요정의 힘이 끓어오르며 내 의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예스텔라는 깊은 어둠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듯한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도움을 주시려는 걸까?’
아직 예스텔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평생을 믿어온 원작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텔라, 나의 성녀야.”
도착한 곳에는 성황이 앉아 있었다. 신성해 보이는 백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성황은 과거 그녀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아름다웠다.
“많이 곤란한 모양이구나.”
“아, 아아. 성황 폐하……!”
예스텔라는 반가움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눈물을 글썽였다.
“전 믿고 있었어요. 성황 폐하께서 저를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을. 결국 저를 구해주실 것이란 것을요!”
“네게 누누이 얘기했다.”
성황은 감정이 끓어오르는 예스텔라와 달리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네 힘은 모두 빼앗아온 것이라는 것을.”
“하, 하지만……!”
예스텔라가 억울한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결국 제 힘이 되어 제가 사용하잖아요. 그러니 그건 제 힘인걸요. 그래서 성황 폐하께서 저를 성녀로 선택해 주신 거고요.”
“그래, 그건 중요하지 않지.”
예스텔라는 예상외로 차가운 성황의 반응에 움찔 눈치를 봤다.
“너는 내가 준 기회를 악용하여 성국의 명예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어찌할 셈이냐?”
“죄송해요. 제가 가짜에게 밀려 그를 구해내지 못한 탓에…….”
예스텔라가 다급하게 성황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가까워지려 하면 할수록 성황은 더 멀어졌다.
“저, 정녕 저를 버리실 건가요?”
“글쎄. 나로서는 이제 네 쓸모를 모르겠구나.”
“성황 폐하 농이 지나치세요. 저는 성황 폐하의 성녀잖아요.”
“…….”
성황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예스텔라는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성황께서 정말 나를 버리시려는 건가?’
부모님은 방해만 되고, 요한은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 성황마저 사라지면 그녀의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죄송해요, 성황 폐하.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저를 성황 폐하의 성녀라 하셨잖아요. 정말 성황 폐하께서 시키는 대로 할 테니 한 번만 기회를…….”
“걱정 마라. 넌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니까.”
엉엉 울고 있던 예스텔라는 성황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시지요?”
그러자 성황이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그렇지, 나는 예스텔라 네 편이니까.”
성황의 시선이 예스텔라의 쇄골 아래쪽에 닿았다. 리베르탄의 수호 마법, 백합 문양이 선명해지더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끄, 끄으윽…….”
불에 지지는 듯한 고통에 예스텔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 너무 아파요. 이건 도대체-”
“네게 내 축복을 나눠주는 것이다. 이로써 너는 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리라.”
예스텔라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자기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내게 힘이 생긴다고?’
힘이 생기게 된다면 당장 그 가짜에게 수모를 돌려주리라.
***
예스텔라는 검은 백합 낙인을 가진 채 사라졌다. 성황의 뒤로 마물이 그림자처럼 불쑥 솟았다.
“너도 참 지독한 악취미야.”
마물은 사라진 예스텔라를 보며 킬킬 웃었다.
“그 여자의 몸에 그나마 남은 요정의 힘을 다 빼앗은 주제에 뭘 도운 척 희망 고문시키고 있어.”
“일을 어렵게 만들 필요 없으니까.”
“그래.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네 뜻대로 안 되게 되었어, 그렇지?”
성황이 돌연 팔걸이에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 위로 검은 핏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손이 막 썩는 것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천하의 성황이 마지막 요정 하나 처리를 못 해서 이리 타격을 입다니.”
“그래도 대세는 바뀌지 않았다.”
“방심하지 마. 그러다 놓쳐서 완성 직전에 무너지게 되면 얼마나 억울해.”
성황이 핏발 선 눈으로 제 주먹을 노려봤다.
‘요정의 힘이 너무 많이 소모되었어.’
예스텔라에게 이어준 힘도 힘이지만, 이번 습격에서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아부은 게 큰 문제가 됐다.
‘앞으로는 더 조심하거나…….’
더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모험하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그 요정의 몸에 남아 있는 보호는 다 사라졌나?”
“아니, 아직 남아 있어.”
마물은 조급해진 성황을 조롱하듯 오뚝이처럼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 보호 마법은 그 여자가 가장 끔찍한 절망을 느낄 때 사라진다니까.”
“그 여자도 정말 지독하군.”
리베르탄 공작가를 이용해 끝없이 절망을 주고, 손아귀에 들어오도록 정신적으로 괴롭혀도 쉬이 절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성황.”
“방심하지 말라던 것은 너일 텐데.”
“방심하지 말란 게 괜한 걱정을 하고 있으란 뜻은 아니지.”
마물은 입을 쫙 벌리며 킥킥 웃었다.
“가장 큰 절망은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올 것이니, 그 요정의 보호 마법이 깨지기까지는 머지않았다.”
***
요한이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찡그렸다.
“왜 에스텔이 의식을 차리지 못하지?”
“죄, 죄송합니다. 분명 몸은 다 회복되신 듯한데…….”
성물을 사용하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에스텔은 멀쩡했다.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나?’
룬도 에스텔처럼 깊은 잠에 빠지듯 잠들어 있어서 다른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알았으니 나가봐. 잠시 둘이 있겠다.”
요한은 주위를 다 물린 뒤 의식을 잃은 에스텔의 손목을 잡았다. 얇은 손목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에스텔, 왜 못 일어나는 거야.”
요한이 애절하게 중얼거리며 에스텔의 주위에 겨우 구한 12개의 성물을 올려놨다. 그리고 짧게 흑마법을 사용해 악마를 불러냈다.
“흐음, 바깥 공기.”
오랜만에 소환된 악마가 방 안에 쓰러져 있는 에스텔과 요한을 보며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있어서 불렀지?”
“성물 12개로 에스텔의 저주를 모두 해주할 수 있다 했을 텐데.”
하지만 기이하게도, 성물 12개를 모두 꺼내도 에스텔에게선 저주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결과만 나왔다.
‘하지만 저주에 걸려 있다는 건 직접 확인했다.’
저주가 아니고서야 일어나지 못할 이유도 없고. 악마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요한에게 말했다.
“네 부인이 고작 성물로는 치료가 안 되는 모양이지.”
“뭐라고?”
“너도 알지 않나, 오래된 저주는 그 자체로 사람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요한이 몸을 움찔했다.
‘에스텔의 저주, 평범한 저주는 아니었지.’
내면에서 본 괴물만 봐도 그랬다.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악마와 비슷한 급의 힘을 가진 녀석이다.
“그래서 뭐가 필요하지?”
“요정.”
악마가 킬킬 웃었다.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신의 피를 이은 요정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