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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뇨하! (123/182)


123화 뇨하!
2023.02.03.



 
검은 손이 훅 치솟은 건 한순간이었다.


‘이게 뭐야.’

서늘한 감각이 온몸을 에워쌌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주위가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찼다. 오한이 들어 두 팔로 몸을 감싸며 주위를 둘러봤다.

눈이 점점 어둠에 적응하는 게 느껴졌다.


“여긴 도대체…….”

나를 덮쳤던 검은 손이 여러 가지의 형체로 변하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장 공격받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공격받을지 몰랐다.


‘최소한 내가 있던 화실은 아니야. 어딘가로 이동당했다는 건데.’

온몸을 바짝 긴장한 채 내 몸에 있는 요정의 기운은 끌어올렸다.

쿠웅-

그러자 요정의 힘과 반응하듯 검은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파동이 일며 주위가 다시 순식간에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온몸이 경직됐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두려움에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이게 갑자기 왜…….”

내 머리 위로 익숙한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새빨간 머리카락이 화려한 미녀, 리베르탄 공작 부인 로자리아와 금발의 신사 같은 데미안 리베르탄 공작이었다.


‘두 사람이 여기에 있을 리 없잖아.’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요한한테 복수당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내가 과거를 보고 있거나 헛것을 보고 있는 거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정신 차려.’

혹독하게 나를 다 잡았지만, 나는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쉽게 무너져 버렸다.

바로 저 눈.

나를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경멸하는 저 눈을 보고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두려움에 치맛자락을 쥐었다.

이제 보니 내 손이 방금 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설마…… 내가 어려진 건가?’

로자리아가 성큼성큼 걸어와 악귀처럼 입을 찢어 벌렸다.


“내 딸 살려내!”

로자리아의 거친 손길이 내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 젖혔다.


“내 딸 살려내라고 별 거지 같은 걸 딸이랍시고 데려왔는데 왜 내 딸을 살려내지 못하는 거야!”

“자,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딴 소리 하지 말고 내 딸이나 살려내라고! 너 때문에 내 딸이 죽은 거야!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거라고!”

창처럼 뾰족한 고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리베르탄 공작이 말리는 척 나를 바닥에 밀쳤다.


“여보, 저 애도 반성했을 거야.”

리베르탄 공작이 경멸 어린 눈으로 내게 물었다.


“에스텔, 네 엄마가 너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엄마의 마음에 들려면 얼마나 벌을 받아야 할 것 같니?”

리베르탄 공작은 공정한 척하면서 사실 그 누구보다 나를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나는 그나마 나를 배려해 주는 공작의 모습에 속았다가 나중에는 그 누구보다 그를 가장 싫어하게 되었다.

로자리아가 간혹 나를 딸처럼 여겨 나를 더 호되게 굴리는 반면, 리베르탄 공작에겐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런. 아직 반성을 잘 못 배운 모양이구나.”

어린 내가 우물쭈물하자, 리베르탄 공작이 비정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게 부모에 대한 예의를 가르쳐 주마.”

공작은 억센 손으로 내 팔을 확 붙잡아 끌었다. 나는 이다음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갇혀서 굶겠지.’

시간이 얼마 지났는지 알 수도 없는 어둠 속에 계속 방치해 두는 건 리베르탄 공작이 가장 즐겨 하던 벌 중 하나였다.

막 리베르탄 공작이 내 팔을 잡아끌고 복도를 지나치던 순간, 나는 근처에 있는 화병을 일부러 발로 걷어차 늘어져 있던 화병들을 죄다 넘어뜨렸다.

쨍그랑!


“너 도대체 무슨-”

순간적으로 공작이 놀라 내 팔을 놓았다. 나는 멀쩡한 화병을 들어 공작을 향해 휘둘렀다. 그동안 내가 순종적인 딸 노릇을 너무 잘해와서일까.


“크윽, 너!”

리베르탄 공작이 휘청거리며 매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여보, 무슨 소리가- 저 계집애가!”

뒤늦게 따라온 로자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호위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공작을 뒤로한 채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리베르탄 공작가라면, 나도 도망칠 수 있어.’

거의 평생을 살아온 집이다. 이곳의 지리라면 훤히 꿰뚫고 있다.


“찾아!”

“도대체 어디로 도망친 거야?”

“그래 봤자 어린 여자애 하나다. 아직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거다!”

리베르탄 공작가의 기사들이 나를 찾았다. 나는 어린아이가 숨을 수 있는 옷장이나 조각상 뒤에 숨으며 한칸 한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이대로 나갈 수 있는 건가?’

경비 인력은 바깥과 정원 전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곳과 먼 부엌 쪽으로 나갔기에 쉽게 들키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부엌으로 자주 숨어들어 가봐서 다행이지.’

그렇게 막 뒷문 쪽으로 혼자 달려가던 순간, 문 앞에 서 있는 한 소녀가 보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 있던 소녀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곤 환한 금발을 검지로 배배 꼬았다.


“어머, 벌레가 발버둥 치네.”

초상화에서 봤던 것보다 더 자라 생기 넘치는 예스텔라였다.


“멍청하게 자꾸 도망치지 마. 어차피 도망도 치지 못하는 게.”

이상하게도 어린 예스텔라를 본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예스텔라는 그런 나를 보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예스텔라에게 물었다.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잘못?”

경쾌하게 웃던 어린 예스텔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왜 궁금해?”

“당연히…….”

“넌 나 때문에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거야. 그런데 잘못이란 얘기가 왜 나오냐고. 감사할 줄은 모르고 왜 귀찮게 군담. 멍청하면 원래 그런가?”

어린 예스텔라의 표정에는 일말의 악의도 없었다. 나는 지금 이 예스텔라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력하게 몸을 떨었다.

그녀에게서 해맑은 광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린 예스텔라는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 그래.”

그녀가 내가 참 웃기다는 듯 훑어내리며 대단한 배려를 해주는 양 속삭였다.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특별히 너한테 네 주제를 가르쳐 줄게.”

“도대체 무엇을…….”

“내가 알게 된 기적이야.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지만, 내 제물로 고생해 주고 있는 너한테라면 특별히 네 운명을 알려줄게.”

어린 예스텔라가 우악스럽게 내 머리채를 쥐었다. 그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눈앞에 빠르게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시작은 리베르탄 공작가였다.

불치병으로 불운하게 죽은 친딸을 대신해서 들어오게 된 입양아인 나. 그런 내가 요한이라는 남자에게 복수당하고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였다.


“봤니, 이쯤만 되어도 충분히 이해 가지?”

마주친 푸른 눈동자가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넌 여주인공인 나를 위해 존재하는 가짜라는 걸?”

나는 잔혹할 정도로 해맑은 어린 예스텔라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원작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

그건 이때 예스텔라가 나한테 보여줬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난 요한한테 결혼하러 가기 전에서야 원작을 떠올릴 수 있었잖아?’

그전까지 원작 같은 건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봤다면, 전부터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어머, 스텔라 아가씨! 스텔라 아가씨가 살아 계셨어! 주인님과 주인마님을 모셔와!”

지나가던 하인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예스텔라가 짜증스럽게 이마를 구겼다.


“아, 일이 귀찮아졌네. 생각해 보니까, 네가 여기서 내가 살아 있는 걸 알고 있으면 일이 귀찮아지겠구나.”

예스텔라는 망설임 없이 내 목을 조르며 자비를 베풀 듯 말했다.


“안 되겠다. 진실을 가르쳐 주려 했는데 너한텐 너무 과분한 거였나 보네. 어차피 넌 나를 위해 존재하는 가짜니까 오늘 날 만난 걸 영광으로 알고 다 잊어주길 바라.”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베티는 화실로 올라가는 방 아래에서 에스텔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님께서는 주인님께서 준비한 선물을 잘 보셨을까?’

이번에 요한은 에스텔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며 베티에게 조언을 구해왔다. 에스텔이 행복하길 바라는 베티는 전심전력을 다 해 그 이벤트를 도왔다.


‘마님께서 기뻐하셨으면 좋겠는데.’

그동안 블란쳇 공작가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마님을 계속 괴롭히던 성녀의 정체가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며 그녀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죄가 낱낱이 드러났지.’

곧 있을 재판에서 예스텔라가 성녀의 가면을 쓴 채 저지르던 죄악을 만천하에 알리며 끝장낼 생각이기도 했다.


‘이렇게 리베르탄 공작가에 대한 복수도 모두 마무리되고…….’

주인님과 주인마님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베티로서는 더 바랄 것도 없는 완벽한 마무리였다.


“베티 님! 큰일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다른 시녀가 다급한 얼굴로 베티를 향해 달려왔다.


“도련, 도련님. 룬 도련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뭐라고?”

베티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어리신 도련님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단 말이야!”

삐이이이익-

저택 전체에 요란한 경고음이 들렸다. 베티의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마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거다.’

근처에 있던 하녀가 차갑게 굳은 베티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저택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냉엄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베, 베티 님. 이건 무슨 알림인가요?”

“1급 경보다. 마님께서 계신 화실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지. 너는 당장 집사장을 찾아가 주인마님의 안전에 대해 보고해라.”

베티는 결연한 얼굴로 화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빨리 주인님께 연락드리겠다.”

 

***

온몸이 검은 늪에 끝없이 잠기는 듯했다.

예스텔라의 말과 원작 내용을 떠올려보자, 어쩐지 이상했던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어쩐지 너무 배드엔딩이더라.’

거기다 원작에는 나오지도 않던 예스텔라하며, 예스텔라는 너무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싶었다.


‘뒷내용이 요한과 예스텔라의 사랑 이야기였구나.’

이상하게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다.


‘내가 갑자기 블란쳇 공작가로 가는 마차에서 원작에 대해 떠올렸던 이유.’

그건 아마 내가 리베르탄 공작가와 멀어지면서 내 요정의 힘이 점점 강해져서인 것 같았다.


‘그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원작을 바꾸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원작과 달리 살아남기 위해서 제법 많은 것을 바꾸었다. 그리고 뒷내용의 주인공이라던 예스텔라의 죄를 폭로하며 무너뜨렸다.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건 그렇다 치자.’

이제 가짜라는 말 따위로 상처받을 단계는 지났으니까.


‘그래서 뭐가 바뀌는 게 있나?’

새삼 내가 모르는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내 행동 중 바뀌어야 할 부분 같은 건 없다. 똑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기력한 걸까.’

나도 모르게 예스텔라와 나란히 서 있을 요한의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요한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붙잡던 예스텔라.


‘오직 나만이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요.’

예스텔라의 오만한 목소리가 저주처럼 맴돌았다.


‘빌려 받은 주제에.’

나약한 생각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자꾸 약해졌다.


‘요한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요한은 너무 멋있고 대단한 사람이다. 굳이 예스텔라랑 비교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그는 나 외에 더 잘나고 대단한 여자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였고, 나는 요한 외에 어떤 남자도 선택할 수 없는 위치였다.


‘요한이, 나를 사랑하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원래 그의 여주인공이 예스텔라라고 단정 지어지자마자, 자꾸 부정적인 생각만 들어서 무기력해졌다.

콰직!

그 순간 눈앞을 감싸던 어둠이 크게 일렁였다. 바로 위에서 한 줄기의 빛이 쏟아졌다. 너무 눈부셔서 눈을 찌푸리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에스텔!”

“……이시도르 씨?”

“얼른 나와. 거기에 오래 있으면 안 돼.”

이시도르 씨가 강한 힘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나는 겨우 온통 검은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시도르 씨가 여기는 어떻게 있는 거예요?”

“네 힘에 반응해서 나올 수 있던 거다.”

이시도르 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뒤를 돌아봤다. 내 뒤에는 나를 계속 삼키고 있었던 검은 덩어리들이 있었다.


‘징그러워.’

나를 놓친 검은 덩어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다행히 당장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지는 않았다.


“저건 뭔가요?”

이시도르 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요정을 죽이던 실체다.”

 

***

쾅!


“에스텔!”

요한은 급히 공작저로 돌아왔다. 에스텔의 주위에는 그녀를 간호하는 의사와 사용인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에스텔의 상태가 어떻지?”

“갑자기 온몸이 열로 들끓고 계십니다. 문제는 무슨 짓을 해도 열이 내려가지 않아…….”

의사인 헨리가 무력감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이 거친 손길로 주위 몰려든 사람을 치우고 에스텔에게 다가갔다.


“……부인.”

에스텔은 희미한 신음만 내고 있었다.


“내가 왔어.”

요한은 에스텔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뜨거운 열기와 이질적인 기운이 공존하고 있었다. 찌릿한 느낌에 요한이 인상을 썼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체질이라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성물을 써야 하나?’

베티가 생각에 잠긴 요한에게 말했다.


“주인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마님께서 화실에 올라가기 직전, 펠시스 공자께서 마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었습니다.”

“리안드로 펠시스가?”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일이었다.


“잉챠!”

그때 누군가 요한의 바짓자락을 당겼다. 요한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언제 왔는지, 이전보다 조금 더 자란 정령 아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옷을 당기고 있었다.


 


“룬?”

“뇨하! 요기!”

정령 아기가 요한을 보며 딸랑이처럼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요한이 확보했던 성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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