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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배후가 성황인가? (122/182)


122화 배후가 성황인가?
2023.01.31.



 
방은 어슴푸레한 빛으로 가득했다.

빛이 요한의 잘생긴 얼굴에 쏟아졌다. 길쭉하고 탄탄한 몸을 휘감은 검은 정장, 차가운 외모가 어우러져 더욱 스산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다.

예스텔라는 움찔하는 와중에도 요한을 보며 감탄했다.


‘너무 멋있어.’

여주인공인 예스텔라를 위한 남자주인공답게 완벽했다.

요한의 날 선 시선이 느릿하게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향했다. 요한의 등장부터 파랗게 질려 벌벌 떨고 있던 데미안이 발악하듯 외쳤다.


“브, 블란쳇 공작,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

요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가를 희미하게 올렸다.


“그게 뭐지?”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언뜻 듣기에는 무심한 듯 가볍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요한의 본성을 알고 있는 데미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흑마법이 어디까지 치유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

요한은 언제나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감옥을 찾아와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는 했으니까.

차라리 죽고 싶다고 애걸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죽음의 자유가 없었다. 흑마법 때문인지 정신이 무너질 것 같은데도 모든 감각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벌써 놀라면 안 되는데, 흑마법이 괜히 흑마법 소리를 듣는 게 아니거든.’

온갖 괴상한 실험에 당하는 와중에도 몸이 멀쩡하다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그 과정에서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그들이 어떤 괴물을 적으로 두고 있었는지 실감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나름 악인으로 불리던 자였다.

그러나 요한의 광기는, 그의 복수심은 그들조차도 기가 질리게 할 정도였다. 그 미친놈에게 고문당하며 뼈저리게 알게 된 건, 요한이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요한이 팔짱을 낀 채 데미안을 향해 턱짓했다.


“얼른 말해봐, 뭘 아니까 지껄인 거 아니었어?”

“그, 그건…….”

“내가 제대로 말할 거 아니면 입 열지도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 교육이 부족했나?”

데미안은 비처럼 식은땀을 흘렸다. 눈물처럼 얼굴 가득 차오르는 땀 때문에 데미안은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

요한은 데미안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면 어쩔 거지?”

“예?”

“그토록 그리워하던 친딸도 찾아주고, 네 무례도 참아줬잖아. 그러면 뭐라도 보답을 해야 사람이지 않나?”

데미안이 무언가를 답할 틈도 없었다. 데미안은 목이 졸리는 것처럼 두 손으로 제 목을 조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요한은 무심하게 데미안에게 말했다.


“걱정 마. 아무것도 없는 사람한테 뜯어낼 만큼 가진 게 없진 않으니.”

로자리아는 몸부림치는 데미안을 보며 예스텔라를 꽉 끌어안았다. 예스텔라는 여전히 홀린 듯 요한을 바라봤다.


‘그 가짜만 아니었다면, 저 남자가 내 것이었을 텐데.’

참혹하고 잔인한 마력, 무자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예스텔라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당장 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아쉬움을 자극했다.


‘아테아 신이시여, 어찌 그를 이리 저버리시나요, 더 그를 고통받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예스텔라는 제 운명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녀는 요한에게 자신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요한은 가짜에게 제대로 빠져 미쳐버리고 말았다.


“……요한. 정말 나를 모르겠나요?”

예스텔라는 자기연민에 빠져 서글프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 진짜 얼굴을 다시 한번 봐요. 내가 당신을 구원한 사람인데…….”

블란쳇 공작가가 멸문당하지 않았던 과거, 요한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장래가 촉망받는 소년이었다.

황가보다 고결한 블란쳇 공작가, 위대해서 귀족들이 내심 황족보다 더 우러러보던 진정한 귀족, 그 블란쳇 공작가의 완벽한 후계자였던 요한은 모두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몸이 약한 예스텔라 역시 요한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때 블란쳇 공작가가 반역죄로 멸문당하는 날이 찾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제국의 규율에 따라 리베르탄 공작가가 마지막으로 살아남을 블란쳇 공작가의 자손을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후계자인 요한보다는 릴리를 살려두는 게 낫겠소. 그놈보다는 다루기 편할 테니까.’


‘엄마. 아빠. 요한은 안 돼요.’

물론 예스텔라의 부탁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던 부모도 매우 완강했다.


‘안 돼, 스텔라. 아무리 네가 떼쓴다 해도 요한 블란쳇은 위험하다. 어린놈이 독해.’


‘하지만 아빠, 저는 요한을 사랑해요. 저와 그가 결혼하면 되잖아요.’


‘결혼이라니! 블란쳇 공작가는 더 이상 네가 알던 공작가가 아니다! 그딴 가문의 남자와 네가 왜 결혼해!’

그때 예스텔라에게 운명처럼 귀한 기회가 찾아왔다.


‘스텔라 양,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요?’


‘스텔라 양의 부모님이 요한 블란쳇 공자 외엔 선택할 사람이 없게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그’는 예스텔라에게 친절하게 릴리를 적당히 망가뜨릴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하고, 사지를 망치는 독이었다.


‘제, 제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스텔라 양이 아니면 누구도 내릴 수 없는 결단입니다.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예스텔라는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렸다. 몰래 리베르탄 공작가의 지하에 갇힌 릴리에게 독을 먹였다.

결국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요한을 멀쩡히 살려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를 구해냈어. 비록 우리 부모님의 죄를 막지는 못했지만…….’

물론 무슨 영문인지 갇혀 있던 요한이 도망쳐 버리고, 예스텔라는 불치병이 심해져 죽고 말았다.

하지만 예스텔라의 실망은 매우 짧았다.

완벽한 결말을 위한 짧은 시련처럼, 예스텔라는 죽은 이후 진실과 함께 기적처럼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성녀님, 아테아 신께서 성녀인 당신을 살리셨습니다.’


‘저, 무슨 책을 하나 보았어요.’


‘아마 신께서 그대에게 내린 운명일 것입니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 세상의 비밀에 대한 책이었어요.’

예스텔라는 불치병으로 죽은 줄 알았던 원작의 여주인공이었다.

심지어 에스텔이라는 가짜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남편마저도 가로채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요한은 알아서 감히 그녀의 자리를 가로채 누리려 했던 멍청한 가짜에게 복수해 준다.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 살아 있었다고?]


[정확히는 저는 죽었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어요.]


[웃기지 마,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어.]


[그렇기에 신의 기적이죠, 타락한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신께서 저를 보내신 거예요.]

요한은 처음 진실을 부정하려 하지만, 일단 예스텔라를 집에 들인다.


[그러면 난 도대체 무엇을…….]

그리고 예스텔라는 아름다운 여주인공답게 요한의 상처를 치유하고 구원한다. 성녀답게 신성력으로 그의 아이를 잉태하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요한이 무릎 꿇은 예스텔라의 턱을 틀어쥐었다. 예스텔라는 서글픔에 잠긴 눈빛으로 아련하게 요한을 올려다봤다.


“요한, 저를 알아보겠나요?”

스스로에게 취한 예스텔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를 보던 요한이-


“얼마나 대단한 낯짝인가 난리 치길래 한번 봤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살기를 띠었다는 것을.


“얼굴 하나 들이대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던가?”

“아니에요! 요한, 오해예요.”

예스텔라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부모님의 죽음으로 해결되지 않는 죄를 제가 요한의 곁에서 평생 속죄할-”

그 순간 요한이 예스텔라의 얼굴을 잡아서 바닥에 던졌다. 예스텔라는 바닥에 뒹굴며 서러운 눈물을 떨어뜨렸다.


“스텔라!”

로자리아가 예스텔라를 챙겼다.


“아가, 그만하렴. 더 공작을 자극하지 마라.”

로자리아는 예스텔라를 챙기는 와중에도 요한의 눈치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다 더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그러니 제발 가만히 있어.”

“어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예스텔라가 로자리아를 원망스럽게 쏘아보며 애타게 요한에게 애원했다.


“요한, 나는 알아요. 당신 안에 있는 상처받은 소년을-”

“그 입 다물어, 찢어버리기 전에.”

요한의 살기가 예스텔라의 몸을 내리눌렀다. 막 말을 하려던 예스텔라가 어깨를 떨었다. 로자리아는 어지러운 듯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무, 무서워.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악마처럼 붉었다. 저건 정말 진심으로 그녀를 죽일 듯한 눈빛이다.


‘진짜 이대로 죽으면…….’

그때 요한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데미안의 손등을 밟았다. 데미안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요한은 그 비명이 감미로운 음악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게는 아주 다행이겠지만, 제국민들에게 네 죄가 모두 까발려 처형당하기 전까지 넌 멀쩡해야 해. 그래야 내 부인의 억울함이 풀릴 테니까.”

“그, 그런데 왜…….”

“하지만 네 부모는 다르지.”

요한은 잔인하게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어디 한번 네 부모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확인해 볼까.”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방 한구석으로 갑자기 쓸려가 던져졌다.

쾅!

어디선가 등장한 사슬이 공작 부부의 몸을 묶어 공중에 매달았다. 푸른 번개가 오싹하게 사슬 위에 살짝 튀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발작하듯 몸부림쳤다.


“-스텔라, 도와다오! 아가!”

“아아악! 이건 아니야!”

아직 고통이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후유증을 겪는 모습이다. 예스텔라의 눈빛에 드디어 공포가 서렸다.


“무,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건가요?”

“그걸 다 알면 재미없잖아?”

예스텔라가 짐승처럼 울부짖는 부모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 피로 복수한다고 당신이 행복해질 수는 없어요. 이렇게 비밀이 다 탄로 난 거 제가 왜 당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말씀-”

“난 그런 거 관심 없어.”

“……네?”

“너 같은 망상병자한테 말을 들어봐야 무의미하다는 걸 알거든.”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물론 네 멍청하고 추한 낯짝을 구경하러 온 건 더더욱 아니고.”

“…….”

“어차피 사람 입 여는 데 꼭 물리적인 벌만 있는 건 아니거든. 네 부모랑 네가 내 부인에게 그랬단 것처럼.”

그 순간 사슬에 전기가 흘렀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비명을 지르며 예스텔라를 부르며 도움을 청했다.

예스텔라는 그 끔찍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고 싶었다.


“왜, 나한테 왜 이래요?”

“너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하지만 기이하게도 보이지 않는 손에 눈꺼풀이 붙잡힌 것처럼 눈이 감기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예스텔라를 보며 요한이 피식 웃었다.


“네가 내 부인을 해하려 했으니까 이러는 거지.”

“도대체 그 가짜가 뭐길래-”

예스텔라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가짜?”

그러자 요한은 아주 가소로운 말을 들었다는 듯 반응했다.


“이렇게 가짜보다 모자란 진짜도 있나?”

“…….”

“네가 어떤 소리를 하려 하든, 너와 무슨 일이 있었든, 네 사정 따위 듣기만 해도 귀가 썩을 것 같으니 말하지 마.”

“…….”

“지금 내가 물어볼 건 오로지 내 부인, 에스텔에 대한 거야.”

예스텔라의 얼굴이 공개된 후, 요한은 곧장 리베르탄 공작가의 사용인들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예스텔라 아가씨께서 공작가에 돌아오는 걸 본 거 같은데-’


‘리베르탄 공작님께서 에스텔 아가씨를 괴롭히기 위해 어떤 말을 해도 듣지 못한 척 유령 취급하라는 명령을 하셨-’


‘에스텔 아가씨는 평소 벌로 금식형이나, 골방에 갇혀계시곤 했습니다.’

다들 기억에 혼란이 있고, 정신에 문제가 있어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요한은 그 증언을 들을 때마다 에스텔이 겪어야 했을 상처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딴 짓을 하고 사랑했다고?’

요한의 눈동자가 원한이 가득 차 불처럼 타올랐다. 저 숨을 끊어버리고 싶지만, 배후를 파악할 때까진 살려둬야 한다.


“네 배후가 성황인가?”

 

***

나는 요한이 선물했던 화실로 갔다.


‘도대체 어떻게 해놨길래?’

요한은 선물을 이렇게 자주 하면서, 어떻게 매번 다르게 준비하는지 모르겠다.

그때 페트리샤가 나를 불렀다.


“마님, 펠시스 공자가 찾아왔습니다. 알아서 거절할까요?”

“응. 부탁할게.”

기분 좋은 날 리안드로를 만나서 기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요한에 대한 기대감을 가득한 채 화실에 도착했다. 화실은 아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흰 커튼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에덴 로즈로 장식한 선반 중앙에, 귀여운 인형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 인형들은…….”

나와 요한을 닮은 두 인형은 결혼식을 올리듯 각자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이제 보니 화실을 결혼식장처럼 꾸민 거구나.’

요한이 제대로 결혼식을 못 올렸으니 성대하게 한 번 더 올리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걸 생각하고 이렇게 꾸며둔 걸까?


“진짜 갑자기 이런 건 왜 준비해 놓은 거야.”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요한은 내가 울게 만들었다.


‘진짜 너무해.’

두 인형을 쓰다듬던 내 눈에 요한의 편지가 들어왔다.

[사랑하는 에스텔.]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마워. 네 상처에 대해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왜 요한이 사과해.”

요한이 한 것도 아닌데.

[네 불안이 끝나는 날까지 행복하게 해줄게.]

[술은 내 앞에서만 마시고.]


“술 얘기는 많이 억울한데.”

눈물을 흘리려다가도 나도 모르게 웃게 됐다. 나는 두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이 인형이 우리 두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랑해, 요한. 지금 보고 싶다.”

그 순간, 검은 손이 불쑥 치솟아 나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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