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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행복해질 거야 (121/182)


121화 행복해질 거야
2023.01.27.



 
으으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어제 술을 마시고 요한을 만났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요한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기억나는 데까지 기억을 되짚어봤다. 요한에게 따져야겠다며 용기를 내기 위해 술을 마셨고, 마시다 보니 생각보다 입맛에 맞아서 계속 들이켜다가…….


‘네가 너무 잘생겨서 짜증 나.’


“미쳤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소리를 한 거야!


‘예스텔라 때문에.’


‘그 여자가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라는 거 알아?’


‘요한은 어떤데, 원래 요한이 결혼하고 싶었던 상대는 누구였어?’

맨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말을 마구 내뱉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구나.”

할 말이랑 하지 못할 말을 구분도 못 하고 막 지껄여 버리니까.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했지?’

요한한테 멋대로 스킨십하고 말실수를 했던 게 언뜻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 외에 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게 다인가?’

하지만 왜인지 내 실수가 거기서 끝났을 것 같지 않다.


“떠올려봐, 에스텔, 무슨 망발을 했는지.”

나는 베개를 마구 쥐어뜯으면서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자 요한이 심란해 보이는 내게 입술을 맞추며 침대에 눕혔던 장면이 떠올랐다.


‘뭔가 마음에 안 차는구나? 뭐가 마음에 걸려?’


‘아니야. 요한을 믿어.’


‘아닌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보이는데. 어떻게 하면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역시…….’

지금 눈앞에 없는 요한의 나직한 웃음소리로 내 귓가를 간질이는 듯했다.


‘빨리 초야를 가져야겠다, 그래야 부인이 허튼 생각을 또 안 하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요한의 손이 내 허리를 쓸어내리고 입술이 천천히 내려가 빗장뼈를 장난치듯 간질이다가…….


“또, 또 뭘 했지?”

발가락이 쭈뼛 구부러질 정도로 부끄럽고 좋은 느낌이 이어졌던 것 같은데, 다음 장면이 죽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어제-”

흠칫 굳어서 내 옷차림을 훑어보니 윗단추가 살짝 풀려 있었다. 그가 집요하게 남긴 화인이 몇 군데 있었지만, 크게 아픈 곳은 없었다.


‘끝까지 가진 않은 것 같아.’

가슴 아래쪽으로 옅은 흉터가 보였다. 저 아래로 가면 채찍에 맞은 흉터, 짓밟힌 흉터, 시커메서 보기만 해도 흉측해진 흉터가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요한도 봤을까?’

내가 학대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요한. 나를 배려하기 위해서 묻지 않고 있었다는 요한.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주던 요한.


‘봤든 안 봤든, 언젠가는 요한도 보게 될 거야.’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요한이 내게 학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밝힌 것도, 요한 나름대로 용기를 낸 거겠지?’

요한도, 나도 우리는 서로의 비밀을 잘 밝히지 않으려 한다. 요한은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이 평화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요한은 내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도 부인으로 두고 있어.’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어쩌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건 내 막연한 망상이었을지도.’

두렵지만 나도 요한처럼 용기를 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요한에게 매몰차게 버림받고 배신당했던 원작 내용이 내 희망을 비웃듯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는 널 사랑한 적 없어.]


“아니야, 날 사랑한대.”

[내가 너 같은 걸 사랑할 리 없잖아. 네가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사랑받지 않았어도 결혼 따위 할 일 없었어.]


“내가 사랑받지 않았어도, 나는 그의 부인이래.”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 자체가 내 나약함의 증명인 것 같아 짜증 났다.


“불안해하지 마, 의심하지 마.”

그래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반항하듯 일어나 화장대로 걸어갔다. 거울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얼굴은 곧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요한을 믿어. 믿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에스텔, 너도 행복해지고 싶잖아.


“너라고 다 솔직한 것도 아니었잖아.”

나는 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어떻게든 살다 보면 내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는 것.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

이제 나를 저주했던 예스텔라는 정체가 다 밝혀졌고, 내 몸에 있던 저주는 전부 사라졌다. 배후가 있든 뭐든 문제가 생길 만한 건 거의 다 처리한 것이다.


“나도 용기를 내는 거야.”

주먹을 꽉 쥐며 마음을 다잡은 순간,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던 동화책 <아름다운 괴물>이 보였다.


“이걸 끝까지 다 안 읽었었네.”

지금은 이 책에 어떤 결말이 적혀 있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아름다운 괴물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괴물이 무척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밖에서 당신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요, 전 부인들이 다 실종되었다던데요.”
“맞소, 모두 내가 끔찍하다며 사라졌지. 당신도 그럴 생각이오?”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내 사랑.”]

[하지만 결혼생활이 계속될수록 여자는 더 괴물이 수상해졌습니다. 일단 괴물은 결코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지 않았고, 강박적으로 지하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여자는 남편인 괴물에게 잠자는 약을 먹이고, 그의 몸을 확인했습니다. 온몸에 가득한 죄악의 증거들, 그녀의 남편은 괴물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용이 이렇게 될 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에게 자꾸 마음이 이입돼서일까. 여자가 진실을 찾아갈수록 더 불안해졌다.

[여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열쇠를 뒤져 지하실에 들어갔습니다. 지하실에는 처음 보는 여자들의 시체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 이전의 부인들이었습니다.]

동화 속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엎어졌다.

나는 멍하니 여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자의 얼굴은 슬프고 절망하는 사람이라기엔 너무 무표정했다.


‘여자도 괴물을 증오할까?’

어느새 동화가 거의 끝나갔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려던 순간, 밖에서 베티가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마님. 일어나셨나요?”

“그래. 베티. 무슨 일이야?”

“주인님께서 마님이 깨어나시면 보여드리라고 하신 게 있어서요. 지금 보여드리러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응, 들어와.”

방 안으로 들어온 베티가 요한이 남긴 쪽지를 건네줬다. 쪽지 위에 장난스러운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내 주정뱅이에게.]

나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나왔다.


‘어제 하루 딱 한 번이거든!’

솔직히 주정뱅이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쪽지를 펼치자 안에 다정한 말이 담겨 있었다.

[화실로 가봐. 너를 위해 준비해 둔 선물이 있으니까.]

***

감옥은 어디든 춥고 딱딱했다.


“나,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요?”

간수에게 끌려가던 예스텔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옥에 내내 방치되어 있던 예스텔라는 벌써 추한 몰골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최고의 미녀라도 되는 양 자신만만하게 간수들에게 물었다.


“혹시 성황 폐하께서 저를 구해내기 위해 불러주신 건가요? 그런 거라면 제 발로 갈 터이니-”

“헛소리 말고 들어가!”

간수는 예스텔라의 말을 무시하고 어떤 방에 그녀를 던져넣었다.

불 하나 들어오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 바닥에 엎어졌던 예스텔라가 눈을 깜빡이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성황 폐하께서 나를 구해주러 오신 게 아니라면 뭐야?’

끼이익-

불이 확 켜지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이 안으로 내팽개쳐졌다. 피와 먼지로 얼룩덜룩해서 제대로 얼굴을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으, 냄새.’

예스텔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피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막 내던져진 두 사람은 멍하니 예스텔라를 보며 영혼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 스텔라?”

“스텔라, 진짜 살아 있었어…….”

두 사람은 서러움과 분노, 안도와 원망 등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예스텔라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예스텔라는 두 사람의 정체를 깨달았다.


“엄마, 아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왜 두 분이 멀쩡히 살아 계시는…….”

요한이 부모님을 처형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복수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죽은 거나 다름없게 두었을 거라 했는데.’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처참한 몰골이긴 했지만, 최소한 사지가 다 붙어 있었다. 그때 막 딸을 끌어안던 리베르탄 공작부인, 로자리아가 원망스럽게 딸을 노려봤다.


“왜, 우리가 멀쩡히 살아 있지 않길 바랐니?”

“아니에요. 돌아가신 줄 알고 있어서 놀랐던 거예요.”

“거짓말, 방금 전에 다 들었어. 우리가 죽기를 바란 거잖니, 스텔라 네가 어떻게 엄마한테 그럴 수가 있-”

“그만해, 여보.”

그때 리베르탄 공작, 데미안이 격분한 로자리아를 말렸다.


“그보다 스텔라, 너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던 거니?”

하지만 데미안의 얼굴도 그리 호의적이진 않았다. 얼굴엔 오랜만에 만나는 딸에 대한 반가움과 원망이 공존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예스텔라가 당혹스러워했다.


“무슨 짓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우리한테도 죽은 척하고 있었잖느냐! 필요할 때만 찾아와놓고서 죽은 것처럼 우리를 세뇌시켰던 게지?”

데미안은 말할수록 흥분하며 예스텔라를 쏘아봤다.


“어떻게 부모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너를, 네가 죽은 줄 알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너를 위해서 무슨 짓이든 했는데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그래서 한 거잖아요.”

“뭐?”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예스텔라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저를 위해서 뭐든 해주시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 여자도 제 제물로 들인 거고, 저를 위해 고통을 주신 거잖아요.”

“…….”

“부모님께서 힘드셨던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제가 살아 있는 것 자체로 기뻐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예스텔라의 말에 머리가 멍했다.


‘저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예스텔라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두 사람에게 걸린 세뇌가 완전히 풀렸다. 여러 차례 세뇌를 당해서인지 정신이 혼미하긴 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스텔라,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오히려 부모님께서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건 줄 아세요? 제가 성녀로 완벽하게 사는 걸 방해하셨어요!”

“…….”

“두 분께서 죄를 짓고 제대로 처형당하지 않은 탓에 요한이 가짜에게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거라고요.”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예스텔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랑하는 내 딸, 스텔라.’

그들의 보물이었던 예스텔라 리베르탄, 모든 것을 주고 희생해도 아깝지 않았던 리베르탄 공작가의 천사.

딸아이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더럽고 추한 손을 더 더럽히는 것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더 노력할게요. 예스텔라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두 분께서 저를 입양해 주신 만큼, 실망시키지 않게…….’

그런데 참 이상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니께서 아직 예스텔라를 그리워하신다는 걸 제가 배려하지 못해서잖아요.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번 생일에…… 혹시 제가 수 놓은 손수건을 받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항상 곱고 아름다웠다 느꼈던 예스텔라의 얼굴 위로 어린 에스텔이 겹쳐졌다.


‘우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가슴이 미어지며 로자리아가 눈물을 흘렸다. 예스텔라는 로자리아의 눈물에 짜증 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엄마 아빠가 제대로 못 해서 제가 감옥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잖아요.”

이건 괴물이다.


“여기서 나갈 방법은 있으시죠? 여기서 계속 있으실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스텔라.”

“네, 엄마.”

짜악-

로자리아가 스텔라의 뺨을 내려쳤다.


“너, 너 언제 이렇게 됐니?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잖아.”

“-엄마!”

억울하게 뺨을 맞은 예스텔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로자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예스텔라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정신 차려, 이제라도 마음을 다르게 먹어야 해.”

“왜 자꾸 저한테 그러세요, 왜 저를 탓하시는 거예요.”

“아가,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란다. 이대로면 너는-”

짝짝짝.

그 순간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한 남자가 박수를 치며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야.”

요한이 냉소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요한을 발견한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브, 블란쳇 공작……!”

“그토록 고매하던 친딸과 마주한 기분이 어떤가?”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를 번들거렸다.


“고작 저딴 여자 살리겠다고 죄 없는 사람을 끔찍하게 괴롭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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