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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취중 고백 (120/182)


120화 취중 고백
2023.01.24.



 
단단한 팔이 너무 쉽게 내 몸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두 발이 공중에 뜨는 것과 함께 그의 체온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요한이 혀를 차듯 가볍게 웃었다.


“별로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괜히 나를 더 자극하고 싶은 건 아니지?”

“아니. 나는-”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탁, 등에 차갑고 딱딱한 벽이 닿았다.


‘침대가 아니야?’

요한은 늘 푹신한 침대에 자신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요한의 뒤로 침대가 보이고, 창가 근처의 서늘한 벽이 엉덩이에 닿았다.


“내가 뭘 할 것 같아?”

이제 요한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긴장감을 눈치챘는지 요한이 입꼬리를 씩 들어 올렸다.


“뭐, 뭘 할 건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

그가 입술을 맞췄다. 코끝을 시작으로 이마, 입술, 눈가, 그 외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주 소중하다는 듯이.

요한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술은 왜 마셨어.”

“마시면 안 돼?”

“평소엔 잘 안 마셨잖아. 무슨 일이 있어서 마신 건가 했지.”

단단한 손가락이 내 귓가를 쓸어나갔다. 머리에 열이 올라서인지 요한의 손이 닿을 때마다 시원한 것 같았다.


“그냥 마시고 싶어서 마신 건데.”

“진짜? 이렇게 취할 때까지?”

“나 취하진 않았어.”

나도 모르게 그의 손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요한한테 따지고 싶은 건 있었어.”

문득 하고 싶은 말이 생겨서 요한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뭔데.”

“아주 심각한 말이야.”

“그래, 아주 귀담아들어야겠네.”

요한은 심각한 내 표정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게 왜인지 불만스러워서 그를 노려봤다.


‘잘생겼다.’

잘생긴 콧대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날카로운 그의 눈매를 보게 됐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달콤하게 웃었다.


‘저 얼굴, 정말 위험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정신 사나워진다. 심각한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벌써 마음이 흐물흐물해지며 평화롭게 넘어가 버리고 싶다.


“네가 너무 잘생겨서 짜증 나.”

“……뭐?”

“왜 이렇게 멋있는 거야.”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자, 요한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실실 올렸다.


“내가 너무 멋있어서 화가 났어?”

“자꾸 웃지 마. 나 진짜 심각하거든?”

“알았어. 진심으로 반성할게.”

그제야 요한이 내 말을 이해한 것처럼 눈썹을 살짝 내렸다.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장난스러웠다.


“진심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야.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 내가 멋있어서 네가 많이 속상했구나.”

왠지 요한이 나를 놀리는 것 같아서 손으로 요한의 입을 막아버리려고 했다. 요한이 슬쩍 고개를 뒤로 빼자, 내 손이 그의 앞섬을 향하게 됐다.

툭.


‘이게 무슨 일이지?’

별다른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가장 윗단추가 살짝 풀렸다. 반듯한 빗장뼈와 단단한 가슴 근육이 설핏 보였다.

요한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제 날 덮치려고?”

“아, 아니거든!”

“덮치기 싫어?”

그가 속상하다는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내가 부인한테는 안 끌리는가?”

“그런 건 아니고…….”

“그러면 덮쳐줄래?”

가만히 요한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이다. 손바닥에 단단한 요한의 근육이 만져졌다.


“어차피 다 네 거잖아.”

온몸이 화끈거렸지만, 내 욕망은 그의 근사한 몸에서 손을 떼고 싶어 하지 않아했다. 나도 모르게 입안이 메마르고, 갈증이 났다.


‘요한도 나를 보면 이럴까?’

왜인지 요한한테 놀아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손을 확 떼어냈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그러면 어떻게 해줄까? 너는 내가 못생겨지면 좋겠어?”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그건 싫어.”

“그렇지, 부인은 내 얼굴 좋아하니까.”

“……누가 그래?”

“그러면?”

“요한의 얼굴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요한 그 자체를 좋아하는 거지.

그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내가 그를 얼굴 때문에 좋아하는 건 아니다. 요한은 이상할 정도로 내 마음을 잘 알아주니까, 내가 슬플 때마다 있어 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잘생긴 게 영향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어째 요한의 목소리가 전보다 더 낮아진 것 같다.


“……다른 어떤 놈 얼굴이 좋은데?”

“글쎄에?”

“왜, 말하기 싫어?”

“응! 그냥 말해주기 싫어.”

요한의 입매가 딱딱해진 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서 자꾸 웃음이 샜다.


‘이제 요한도 심각해졌어!’

내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모양이다. 요한이 독 오른 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흠, 내가 어떻게 해야 말해줄 건데?”

“으으으음. 나 취했나?”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오른 기분이라 손부채질을 했다.


“아, 맞다. 요한. 내가 무슨 얘기를 했지?”

“…….”

“요한도 잘 몰라?”

그러자 요한이 내 한 손를 깍지를 껴 잡으며 빙긋 웃었다.


“평소 부인 이상형이 어떤지 얘기하고 있었어. 이상형이 누구였는지 말해준다고 했고.”

“그랬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불현듯 깍지를 낀 요한의 손에 힘을 주며 흔들었다.


“아니, 그거 아니었는데. 그건 말하기 싫다고 끝냈잖아. 이 거짓말쟁이.”

“음, 들켰네.”

“아무튼 요한이 너무 잘생겨서 난 가끔씩 짜증 나. 요한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래.”

요한은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혹시 그렇게 짜증 나게 된 이유가 있어?”

“있어.”

“그게 뭔데?”

“스텔라.”

술기운 때문인지, 절대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단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예스텔라 때문에.”

“…….”

“그 여자가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라는 거 알아?”

“……알아.”

“요한은 어떤데?”

‘예스텔라’의 이름을 얘기하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요한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갑자기 자신이 없어져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요한의 목깃을 잡은 손에 힘을 풀지는 못했다.

그것마저 쥐고 있지 않으면, 정말 무서운 말이 튀어나오게 될까 봐.


“……무엇을 묻고 싶은 거야?”

“원래 요한이 결혼하고 싶었던 상대는 누구였어?”

유성우가 떨어지던 날 밤, 요한은 내가 가짜든 진짜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진짜라고.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런 말을 듣고도 나는 또 불안감에 떨고 있다. 이제 요한은 진짜 ‘복수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버렸으니까.


‘나쁜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술기운 때문인지 눈가에 눈물이 살짝 어렸다. 요한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미안, 내가 요한한테 너무 징징거리고 있지?”

두서없이 말이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내가 지겨운데, 요한은 얼마나 나 때문에 짜증이 날까.”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요한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방금 전보다 조급한 손길로 내 턱을 들어 시선을 맞추게 했다.


“천천히, 자세히 얘기해봐. 네가 어떤 소리를 해도 지겹지 않으니까. 어떤 놈이 너한테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구나? 그렇지?”

마지막 목소리에서는 살기마저 느껴졌다. 원흉을 찾아내서 족치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요한이 아무리 똑똑해도 알아낼 수 없을 거다.


‘출처가 원작이거든.’

나는 열심히 설명하는 대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그런 거 없어.”

어쩌면 나는 무슨 대답을 들어도 불만족스러울지 모른다.


“그냥, 이유 없이 내가 이상해서야.”

“왜 자꾸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비하해?”

“……비하한 적 없는데.”

“아니, 너는 매번 그랬어.”

손에서 힘이 빠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요한한테서 무슨 말이든 듣고 안심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해.”

“내가 강압적이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는 스스로를 심하게 몰아붙이고, 네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 자기 보호를 하듯이.”

“아니야, 그건 그냥-”

“왜 그렇게 스스로를 낮춰? 왜 네가 죄인인 것처럼 행동해?”

눈가 끝에 아롱거리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언제 이렇게 요한한테 다 들켰지?’

요한한테 과할 정도로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자각은 있었다. 요한한테는 늘 그렇게 됐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너무 쉽게 연기가 되는데, 그의 앞에선 나도 모르게 어리석은 기대를 하고 흠을 보여버리게 됐다.

그런 모습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이 상황을 유지하려면 더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랄 판국에.


‘……내 밑바닥.’

내가 신물 날 정도로 끔찍해하는 내 밑바닥이 요한한테 찢겨서 까발려진 것 같았다. 몸이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서 너는 내가 싫어?”

나는 울먹울먹한 눈으로 요한을 보며 말했다.


“이제 그런 내가 미워졌니?”

“에스텔!”

요한이 창가에 앉은 나를 확 끌어당겨 앉았다. 요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반응을 확인하기 더 어려워졌는데, 그의 체온 때문에 몸이 진정되는 기분이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잖아.”

“……모르겠어.”

머리가 엉망이 돼서인지,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총체적으로 내가 끔찍해서 무작정 탓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모르겠으면 그냥 들어.”

요한은 그런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는 너 안 버려.”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이는 따듯한 손길 때문일까. 한 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이 흐느낌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런 걸 물어본 건, 네가 스스로를 탓하는 게 마음이 아파서였어.”

“왜?”

“나는 네가 리베르탄에서 학대를 받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쿵-

심장의 울림이 커졌다. 호흡이 떨린다.


“아, 알고 있어?”

“그래. 알고 있어.”

“도대체 어떻게?”

설마, 베티나 에리히가 말한 걸까?


‘그런데 요한은 왜 나를 가만히 뒀지?’

내가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다른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주체를 못 하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요한이 그런 나를 억센 팔로 꽉 붙들었다.


“어쩌면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어.”

“처음부터라고?”

“그래. 네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던 리베르탄 공작가의 입양아가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알려진 그 ‘에스텔 리베르탄’과 전혀 다른 과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

“큰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너를 계속 보니까 저절로 알 수밖에 없었어.”

“……내가 학대받은 애라는 걸?”

내가 끔찍하다는 목소리로 묻자, 요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네 안에 상처가 있다는 걸 안 거지.”

이제 요한이 나와 얼굴을 마주 봤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아껴줬다는 소리가 개소리라는 것도 알았고.”

“그런데 나한테 왜 안 물어봤어?”

“네가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러면 지금, 이걸 말하는 이유는 뭐야?”

“네가 힘들어하니까.”

요한이 내 얼굴을 마주 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덮어놓고 넘어간다고 네가 편해지는 게 아니라, 네가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얘기하는 거야.”

“…….”

“예스텔라 얘기도 그것 때문 같거든.”

어째서 요한은, 이렇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걸까.


‘나처럼 원작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울음이 막 튀어나올 것처럼 목구멍에서 왈칵거렸다.


“……요한.”

“응, 부인.”

“요한은 예스텔라가 진짜라고 날 버리지 않을 거지?”

“그 여잔 가짜야.”

요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그 여자를 곁에 두는 일은 조금도 없어.”

“그 여자는 친딸인데도?”

“친딸인 게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 그 여자가 친딸인 게 왜 신경 쓰여?”

“그거야, 요한은 내가 리베르탄 공녀라서 결혼했잖아.”

“그렇지 않은데?”

“그러면 왜 나랑 결혼했는데?”

요한은 다정하게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떨어질 듯했던 입술이 계속 달라붙어, 내 호흡을 빼앗아갔다. 요한의 숨결이 거칠게 내 입안을 탐하고, 집요하게 정복했다.

입술이 떨어지고도 나는 얼굴을 붉히지 가쁘게 헐떡였다.


“너를 사랑해서 결혼한 거야.”

요한은 살짝 부은 내 입술을 만족스럽게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든 뭐든 신경 쓸 필요 없어. 다 잊어버려.”

아무것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게 될 정도로 너무 달콤한 거짓말이었다.


“요한, 나 거짓말 싫어하는데.”

“거짓말 아닌데.”

요한이 그런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를 믿어.”

아닌데, 나 거짓말인 거 다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걸까?’

 

***

[아름다운 괴물은 새로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동안의 사랑이 다 가짜였다고 느껴질 만큼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괴물은 절대 저번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괴물이란 것을 그의 사랑에게 완벽하게 숨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의 노력이 통한 걸까요? 그는 괴물이란 사실을 숨긴 채 새로운 사랑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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