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성국이 날 버렸어?
(119/182)
119화 성국이 날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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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성국이 날 버렸어?
2023.01.20.
마물의 웃음소리가 지하 전체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아직 그걸 걱정하나?”
“마지막 요정 하나만 남아서 짚고 넘어가려는 것뿐이다.”
성황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옥좌의 팔걸이를 꽉 쥐었다. 그러자 성황의 손등이 쩌적 벌어졌다. 메마른 땅이 갈라지듯이.
“물론이다. 우리는 ‘계약’을 어길 수 없다. 대가를 받아가는 만큼 아주 확실하지.”
“그런 거라면 됐다.”
성황의 보라색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회색 돌바닥이 깔린 바닥 위로 검은 기운이 빼곡히 차올랐다. 검은 기운 사이로 분기에 찬 한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단정하고 강직해 보이는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럴 거라면 나는.
-나는 어째서 그대의 일을 알게 되는 겁니까.
-도대체 내가 그대에게 해줘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뇌에 찬 남자를 보며, 성황이 입매를 씩 웃었다.
“본디 배신자의 핏줄은 그대로 이어지는 법이지.”
***
에스텔은 황궁에서 급히 치료를 받았다. 요한은 쓰러진 그녀의 곁에 내내 붙어서 집요할 정도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무슨 독에 당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
‘다행히 큰 이상은 보이지 않아 곧 눈을 뜨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다행히 에스텔의 증상은 더 심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나아진 것도 아니지.’
어두운 방 안에서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요한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할 때였다.
똑똑.
불쾌한 방문자가 요한을 찾았다.
오르테카 재상이었다. 재상은 요한의 허락도 받지 않고 벌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공작께서 이 안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무슨 일이지?”
“우리의 거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러 왔습니다. 잠깐만 시간 내주시죠.”
오르테카 재상이 요한을 보며 자연스럽게 시가를 입에 물었다.
치이익-
불을 붙이지도 않은 시가가 검게 변하며 떨어졌다. 오르테카 재상이 헛웃음 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젠 마법사란 걸 감출 생각도 없으신가 보군요.”
“새삼?”
재상은 재로 변한 시가를 괜히 짓밟았다.
“하긴, 서로 비밀을 지키느라 눈치 보고 할 단계는 넘었지요.”
두 사람의 관계는 제법 오래되었다.
황제의 충신인 오르테카 재상은 가장 먼저 요한의 복수를 눈치챈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적에 따라 손을 잡거나 전쟁을 치르곤 했다.
이번 스텔라를 잡은 건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은 경우였다.
오르테카 재상은 페스칼로스 숲을 정화한 뒤 입지가 강해질 스텔라 성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요한은 최대한 빠르고 깔끔하게 스텔라 성녀를 없애버리길 원했다.
“슬슬 블란쳇 공작께서도 거래한 물건을 건네주시겠습니까?”
“‘물건’은 오르테카 후작저의 장원 앞에 두었다.”
요한은 담담하게 말했다.
“알아서 가져가 처리하면 될 거다.”
“이래서 공작님과 거래하는 게 늘 마음에 듭니다. 확실하고 깔끔한 일 처리.”
오르테카 재상이 픽 웃었다.
“그런데 이렇게 그 ‘물건’을 날려도 되는 겁니까? 오랫동안 황가에 대한 복수를 꿈꿨지 않습니까?”
이번에 요한이 재상에게 건네준 물건은 황가의 부정에 대한 증거였다.
정확히는 황가가 마족과 결탁하여 제국을 세웠다는 부정한 진실이 담긴 유물이었다.
리베르탄 공작가 못지않게 황실을 증오했던 요한은 유물을 빌미로 협박하고 거래하곤 했다.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대화를 나눌 사이였던가?”
요한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부분이 오르테카 재상의 흥미를 자극했다.
‘정말 공작 부인을 사랑하나 보군.’
에스텔이 요한의 약점이 되었다고 판단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진심일 줄은 몰랐다. 요한은 더 이상 황가를 상대로 우위를 차지할 수도 없고 더 이상 복수할 수도 없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그 덕에 일은 쉽게 풀렸다.
스텔라의 후견인 노릇을 하며 오르테카 후작가의 명예를 비롯해 여러 문제가 생기긴 했으나 단 하나뿐인 유물을 확보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폐하께선 아주 만족하시겠군.’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유물이 황가의 제단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제물이란 거다.
요한 블란쳇 공작이 가지고 있던 유물을 확보하면, 더 이상 황가의 제단에 불필요한 제물을 더 바칠 필요도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유물에 이상한 수작을 부렸다면 아주 불편해지실 거라는 걸 알아두십시오.”
오르테카 재상이 요한의 뒤에 있는 에스텔을 힐끔 보며 말했다.
“공작 부인께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그렇게 오르테카 재상이 떠났다.
요한은 에스텔의 머리맡에 돌아가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살폈다.
“에스텔.”
건강에는 아무 이상 없다.
하지만 <잠자는 공주>에 걸린 에스텔은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요한은 잠든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무척 불안했다.
“내 실수야.”
요한은 언제나 효율적인 방법을 추구했다.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잠시 잊었어.”
당장 손에 얻어야 하는 성물 12개, 짜증 나는 성녀 스텔라, 거슬리게 굴던 성국까지. 특히 이번 일은 에스텔이 강하게 얽히는 이상 최대한 깔끔하고 확실하게 마무리되어야 했다.
더 이상 에스텔이 힘든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지만 요한의 계획에, 에스텔이 힘든 일을 견디다 못해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아픈 네가 아예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했는데.”
에스텔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흐르던 그 순간이 망막에 박힌 듯 아직도 선명했다.
‘이게 왜.’
에스텔은 종종 선혈을 토했다. 그의 눈에 보이지 않게 숨기던 걸 보면, 꽤 오래된 증상인 듯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요한, 나 괜찮은데.’
그녀는 항상 웃어주던 그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너는 매번 괜찮다고만 하지.”
정작 에스텔의 주치의인 헨리는 그녀가 아주 심각하고, 끔찍하게 아프다고 했다.
‘잠자는 공주는 피와 전혀 관련 없는 병입니다.’
‘그렇다면 왜 부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거지?’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어쩌면 마님께서 잠자는 공주 외의 또 다른 병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하신 분인데…….’
일전에 감지한 대로 흑마법의 저주 때문이라면 더 문제였다. 제물의 생명이 마지막에 다다랐다는 뜻이니까.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수록 조바심이 나 심장이 죄였다.
“괜찮지도 않으면서, 말만은 언제나 멀쩡해.”
‘시몬 추기경이? 그러면 내가 직접 나서는 건 어떨까?’
‘네가 나서겠다고?’
‘내가 미끼로 나서야 확실하게 끝낼 수 있잖아.’
에스텔의 의견을 존중해 주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는 무리해서 쓰러지고 말았다. 잘못했다면 아예 그녀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나도 내 식대로 해야겠어.”
상상치 못할 고통을 계속 견디고 있는 에스텔. 종종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던 에스텔.
“네가 아픔의 존재도 모르게 해줄게.”
에스텔의 눈을 가리고, 귓가에 달콤한 말만 속삭이며, 그가 빚은 아름다운 감옥에 가둬둘 거다.
“영원히 행복할 수 있게.”
둘만의 낙원이 불멸하도록.
***
스텔라는 초라하고 끔찍한 감옥에 갇혔다.
‘왜 아무도 날 꺼내주지 않지?’
곧장 성황 폐하께서 사실을 알고, 그녀를 꺼내줄 줄 알았지만 며칠째 아무 소식도 없었다. 늘 호사스러운 대우만 받았던 스텔라는 생전 처음 겪는 홀대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
상상도 못 한 죽음의 공포가 뒤늦게 찾아왔다.
‘말도 안 돼. 난 주인공이잖아.’
스텔라에게는 완벽하게 행복한 결말이 주어져 있었다. 가짜로 인한 시련을 예상하긴 했으나, 이 정도까지 큰 시련은 용납할 수 없었다.
“당장 성황 폐하를 불러줘!”
스텔라가 감옥을 지키는 간수를 붙잡았다.
“내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아신다면 바로 달려오실 거야. 성황 폐하께 말씀드려 크게 보상해 줄 터이니…….”
“거참, 시끄럽네.”
며칠째 스텔라의 애원에 시달렸던 간수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부정한 성녀 주제에 뭘 그렇게 말이 많아. 아직 상황도 모르고 성국 타령이나 하고 있네.”
“부정한 성녀라니요.”
스텔라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테아 신의 성녀예요. 날 무시했다간-”
쾅!
간수가 스텔라가 잡고 있던 창살을 거칠게 걷어찼다. 스텔라가 움찔하자, 간수는 그런 스텔라를 보며 화를 누르듯 말했다.
“또 그 성녀 타령이냐? 네가 반역죄인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인 게 밝혀진지가 언젠데 그 소리야.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거 지금 확 그냥 짓밟아줄-”
“야, 적당히 무시해.”
옆 간수가 동료를 말렸다.
“저 부정한 여자가 너한테 원한이라도 품으면 어떻게 해.”
“성국에서도 버림받은 여자가 무슨 힘으로 그래?”
“혹시 모르지. 신성력을 보여주면서 성국마저 속인 여자잖아. 다른 위험한 힘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아?”
그러자 흥분하던 간수가 조용해졌다. 잠시 겁에 질려 있던 스텔라는 충격적인 소식에 눈을 끔뻑였다.
“잠깐, 잠깐만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성국에서 저를 버렸다니요?”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그렇게 안 해도 알아서 다 소식이 들어갈 테니까.”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대답해!”
스텔라가 창살을 꽉 잡고 소리쳤다.
“지금 가짜의 사주를 받고 거짓말하는 거지? 성국이 성녀인 나를 버릴 리 없잖아!”
“하! 이게 아직도 지가 성녀인 줄 아네.”
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은 척하고 성녀 행세하던 가짜 주제에 뻔뻔하긴.”
“아, 아니야. 나는-”
“이미 성국에서는 네가 잘못된 성녀였다고 발표했어. 그리고 너 같은 걸 감싸주려 노력한 블란쳇 공작 부인께 성녀 직위를 내리기 위해 논의 중이라고.”
“……..”
“이제 네 신세를 좀 알겠냐?”
스텔라의 푸른 눈동자가 멍해졌다.
‘성국이 날 버렸어?’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자리에 그 가짜를 올려놓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그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부들부들 손을 떨던 스텔라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그녀를 아끼고 돌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끄러운 게 조용해지니 잘됐네.”
***
정화 의식 사건은 제국에 아주 큰 풍파를 일으켰다. 일단 충실한 아테아 신도들이 가장 난리를 피웠다.
“신성력만 잘 쓸 수 있다고 성녀는 아니잖아요! 성국은 어찌하여 저런 여자를 성녀라고 제국에 보낸 거예요?”
“이쯤 되면 성국이 진정 아테아 신의 이름을 따르는 곳인지도 모르겠어요.”
“맞아요. 저런 악독한 여자가 성녀라면 성국은 얼마나 썩었겠어요.”
성국이 아무리 독립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해도, 제국 전체를 상대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특히 이번 스텔라 성녀의 막장 행동은 수많은 신도의 공분을 샀다.
성국은 내가 눈을 감고 있던 며칠 동안 부랴부랴 성황과 상의한 끝에 꼬리 자르듯 스텔라 성녀를 내쳤다.
“성국에서 면밀하게 확인한 결과, 스텔라 성녀의 행적에 의문스러운 점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죽음을 위장하고 성녀 행세를 하게 했을 가능성을 고려 중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더불어 스텔라 성녀의 진실을 밝혀내 준 에스텔 블란쳇 공작 부인에게 명예로운 성녀 직위를 하사하기 위해 논의 중이기도 합니다. 성국에서는 아테아 신께서 저희에게 내려준 이 시련을 모두와 함께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성국에서 뭔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왜 뜬금없이 나보고 성녀 자리를 준대?’
그보다 더 황당한 건, 그러한 어이없는 조치에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모두가 스텔라 성녀를 숭배했던 것처럼, 성녀인 척했던 희대의 악녀마저 용서하려 했던 나는 성녀보다 더 고결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마님, 이게 다 마님께 온 선물과 편지들이에요. 읽어보시겠어요?”
제국 각지에서 나를 응원하고, 내게 용서를 빈다는 편지와 선물들이 쌓였다.
“아니. 알아서 정리해.”
“그러면 다른 귀부인들의 초대장도 다 알아서 답장할까요?”
“그래.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로 거절하면 될 거야.”
오래전 이런 현실을 상상한 적 있다.
내 억울함이 모두 밝혀지고,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되는 그런 막연한 상상. 정작 그 꿈이 이루어졌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우습네.’
모두의 찬양과 용서를 구하는 목소리가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함정을 파지 않고 연기하지 않았다면, 미리 모든 것을 다 대비하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불에 태워 죽여야 할 악녀였을 테니까.
‘그나저나 요한은 마음이 어떨까?’
죽은 줄 알았던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 살아 있었다.
양녀였던 나에게도 복수하려 했던 요한이라면, 크게 충격받았을 터다.
‘어려운 문제라 말 꺼내기가 어렵네.’
특히 요즘 들어 요한이 엄청 바빠진 데다, 내 건강에 미친 듯이 신경을 써 얘기를 꺼낼 여유가 잘 나지 않았다.
‘이제 나 괜찮은데.’
헨리 씨가 몇 번이고 확인해 줬지만 요한은 결코 믿지 않았다.
‘뭘 하면 믿어주려나…….’
요한의 집무실에 들어가 요한을 기다리던 내 눈에 괜찮은 물건 하나가 보였다.
바로 술이었다.
‘그래,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해.’
그렇게 나는 한 모금씩 마셨다.
환자가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난 환자가 아니니까.
술 한 병이 두 병이 되었다고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슬슬 머리에 열이 오른다고 느껴지는 찰나, 요한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에스텔, 오늘 몸은 좀 어-”
“요한!”
나는 잔뜩 집무실에 들어온 요한에게 깡총 뛰어 안겼다.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래. 그런데 부인.”
요한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혹시 술 마셨어?”
“조금?”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아니야, 나 그렇게 많이 안 취했어. 멀쩡해.”
“…….”
내 멀쩡함을 증명하기 위해 요한의 앞섬을 두 손을 잡고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요한의 눈이 커졌다.
“너…….”
“왜, 별로야?”
나는 장난스럽게 요한의 입술에 다시 입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요한이 거칠어진 숨소리로 나를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