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예스텔라 리베르탄 (117/182)


118화 예스텔라 리베르탄
2023.01.17.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요한의 말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명확했다. 요한에게 동의한다는 거다. 당연히 스텔라 성녀의 편을 들었어야 할 신관들조차.


“폐, 폐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스텔라가 희게 질린 얼굴로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스텔라를 내려다봤다.


“짐은 충분히 그대의 말을 듣고 있었을 텐데?”

“폐하께선 제게 페스칼로스 숲을 정화하는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시기로 약조하셨습니다. 저와 하신 약조를 기억하시나요?”

“설마, 이번 일을 덮어달라는 건가?”

“감히 그런 무리한 부탁을 드리려는 게 아니에요.”

스텔라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다만 성녀인 제 일이니 성황 폐하를 불러주세요. 성황 폐하께서 있는 자리에서 제 모든 죄를 판단하게 해주세요.”

당장 처분을 결정하지 않고 미루자는 뜻. 물론 그건 요한의 의지와 완전히 상반되는 일이다.

황제의 금안이 싸늘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저걸 들어주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스텔라 역시 매우 필사적이었다.


“다들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저도 알아요.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폐하, 만일 제가 그리도 악독한 자라면 어찌 아테아 신께서 허락하신 신성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또 신성력을 들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블란쳇 공작 부인을 음해할 것이라면 어찌 그녀를 치료했겠어요.”

“허어…….”

“블란쳇 공작 부인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그녀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제가 그녀를 해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걸 증명하니까요.”

스텔라가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으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페스칼로스 숲을 단번에 정화했던 고귀한 신성력.

모두를 감탄하게 했던 그 신성력이 다시 한번 무도회장에 가득 찼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 포섭하려는 듯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

스텔라의 해결 방법은 항상 비슷했으니까.

실제로 사람들은 아테아 신이라는 이름에 약했고, 기적의 상징인 신성력에 매우 약했다. 하지만 지금 신성력을 접한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꺼림칙해지기만 했다.


‘자꾸 쓰면 효과가 떨어지게 마련이거든.’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블란쳇 공작의 말대로 정말 성녀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어떤 성녀가 저런 식으로 자기 좋을 대로 신성력을 쓰나요. 저걸 성녀라고 할 수 있을지…….”

“성국에서는 지금 뭐하나요. 저런 걸 성녀라고 추대해 놓고서.”

“신성력이 징그러워질 지경…….”

평소와 다른 반응에 스텔라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황제의 앞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스텔라가 황급히 나를 돌아봤다.


“블란쳇 공작 부인 말해봐요! 제가 당신을 살렸잖아요!”

나는 그녀의 화려한 빛을 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성녀님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치료받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생명의 은인인 저한테-”

스텔라와 단둘이 만나면서 그녀가 일부러 퍼뜨렸던 검은 기운.

처음 나는 그 기운을 막다가 나중에는 일부러 내 몸에 흡수시켰다.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그리고 그 이유는-


“맞아요, 성녀님께서 저를 치료…… 어라?”

왈칵.


“이게 왜.”

 

 
목구멍이 아픈 것처럼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리던 내가 피를 토했다. 나는 손바닥에 흐른 피를 보며 충격받은 듯 요한을 올려다봤다.


“에스텔. 지금-”

“요한, 나 괜찮은데.”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는 나를 요한이 꽉 붙잡았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분노와 슬픔이 서렸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이제 다 치료됐겠지?’

나는 그동안 피를 토하면서 괜한 오해에 시달리고는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그 오해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피를 토한 내가 말갛게 웃었다.


“하나도 안 아프니까 난 걱정하지 말고…….”

“뭐가 안 아픈 건데! 지금 이렇게 피를 토하는데!”

요한이 이를 아득 갈며 나를 꽉 붙잡았다. 그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의사를 찾았다.


“젠장, 의사가-”

“황궁의를 불러 블란쳇 공작 부인을 치료하게 하라!”

나는 힐끔 시선을 돌려 스텔라를 바라봤다. 황제가 제 발아래 매달릴 듯 꿇어앉았던 스텔라에게 노성을 질렀다.


“성녀! 공작 부인을 치료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랬는데…… 갑자기 저렇게 피를 토하는 건 저도 모르는.”

“치료된 사람이 피를 토해?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성녀라 참아주려 했는데 볼수록 망종이군! 도저히 참아줄 수 없다!”

나는 스텔라는 안중에도 없는 듯 요한을 보며 점점 목소리를 느리게 했다. 다시 한번 왈칵 피가 쏟아졌다.


“미안해, 요한.”

요정의 힘에 대해 말해줄 수 없어서 요한은 진심으로 놀랄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 일만큼은 꼭 필요했다.

왜냐하면.


“제, 제가 다시 한번 치료할 수 있어요. 공작 부인을 이리로-”

“네 무엇을 믿고?”

“정말이에요! 제가 왜 공작 부인을 해치겠어요!”

스텔라가 멍청할 정도로 무리해서 신성력을 더 써야 하니까.


‘이제 한번 열심히 버텨봐.’

나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속으로 웃었다.

***

키이잉-

방금까지만 해도 스텔라의 주위를 장식했던 찬란한 신성력. 그 신성력이,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계속 흩어지기만 했다.


“자, 잠깐만 기다리시면.”

스텔라는 억지를 쓰듯 이를 꽉 깨물고 손에 신성력을 모았다.

하지만 신성력은 바닥을 드러내듯 그녀의 손에서 흐릿하게 사라지기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텔라는 초조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사람들이 말을 얹는 게 들렸다.


“꺄아아악!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왜 피를 토하신 거죠? 몸이 연약하시다던데 설마 병으로…….”

“방금 성녀가 다 치료했다지 않았습니까? 역시 다 치료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 아까 공작 부인이 성녀님과 단둘이 차를 마셨다지 않았어요? 그러면 설마 성녀님이 일부러 공작 부인의 차에 독을…….”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었다!


‘하지만 치료하지 않으면 사실이 될지도 몰라.’

실제로 황제는 스텔라가 독을 썼다고 반쯤 확신하는 듯했다. 스텔라의 신성력이 이제는 거뭇한 회색으로 변했다.


“성녀님, 저희가 치료하겠습니다. 공작 부인의 치료를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신성력을 못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늘 상냥했던 신관들이 무관심하게 그녀의 말을 자른 채 에스텔을 돌보기에 바빴다. 다급함도 있었지만, 걱정스러움도 많이 있었다.

신관들에게 밀려난 스텔라는 허망한 눈으로 에스텔을 바라봤다.


“공작 부인을 반드시 살려주십시오, 아테아 신이시여.”

“이대로 눈을 감으시기엔 이분께선 너무나 선량하신 분입니다. 부디 저희가 마지막으로 이분께 속죄할 수 있는 기회만큼은 주시기를…….”

신관들이 에스텔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또야.’

그녀를 사랑하던 자들이 모두 가짜에게 홀려 그녀를 버렸다. 스텔라는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


“-황궁 기사, 저 여자를 끌어내 가둬라.”

신관들에게 치료받는 에스텔에게 못내 시선을 떼지 못하던 요한이 황제의 허락을 얻어 그녀를 없애려 했다.


“제국에 성녀의 죄를 모두 까발린 채 사형당하게 할 것이다.”

황궁 기사들이 스텔라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스텔라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요한! 믿어줘요! 이렇게 날 떠나보내면 후회할-”

그 순간 기묘한 반응이 느껴졌다.

당장 스텔라를 끌어내려던 기사들이 멈칫한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기사뿐만 아니라, 황제와 요한,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울면서 발악하려던 스텔라의 온몸이 굳었다.


“왜, 왜 성녀님의 얼굴이…….”

“저만 성녀님 얼굴이 다르게 보이는 거 아니죠?”

얼굴을 돌리던 스텔라가 한 귀부인과 딱 눈이 마주쳤다. 귀부인이 놀란 얼굴로 스텔라에게 삿대질했다.


“예, 예스텔라 리베르탄?”

그게 시작이었다.


“이제 보니 로자리아랑 얼굴이 똑같네요, 어린 시절에 본 얼굴과 완전히 똑같아요.”

“어떻게 성녀님의 얼굴이 예스텔라 리베르탄의 얼굴일 수 있죠? 말도 안 돼요. 예스텔라 리베르탄은 죽었…….”

“성녀의 얼굴이 갑자기 바뀌는 건 말이 되고요?”

예스텔라 리베르탄.

오래전에 명을 달리한 소녀였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 그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가 불치병에 걸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데다, 예스텔라의 자리를 차지한 가짜 이야기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대부분 어린 예스텔라를 만나봤거나, 초상화를 접해봤거나, 심지어는 과하게 몰입한 몇몇 화가가 예스텔라의 미래라며 그려놓은 성인 모습을 감상한 적 있었다.


“생각해 보니 예스텔라, 스텔라. 이름도 비슷하네요. 왜 이제껏 못 알아봤지?”

“그러면 성녀가 여태껏 공작 부인을 계속 괴롭히고 도둑 소리 했던 것도 다 공작 부인이 리베르탄에 입양되었던 것 때문에……?”

“그런데 왜 성녀는 그동안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구하지 않은 거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애초에 성녀는 맞는 거예요? 성국은 도대체 뭐 하길래 저런 걸!”

스텔라는 황급히 제 얼굴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기사들에게 팔을 붙들린 탓에 얼굴을 가리지도 못했다.


‘왜 내 얼굴이-’

언젠가 드러낼 정체였지만,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건 대비한 적 없었다. 자칫하다 이상한 오해를 살 수 있었으니까.


“……예스텔라 리베르탄?”

그때 스텔라의 뒤에서 비릿한 웃음이 들려왔다. 고작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그 목소리에 깊이 잠재된 증오만큼은 선명했다.


“살아 있었나.”

 

***

싱그러운 풀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너무 익숙한데?’

내가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깔려 있던 잔디들이 자라나 푸른색 장미, 에덴 로즈 덤불로 변했다. 푸른 꽃망울이 화사한 꽃잎을 피워냈다.


“에스텔.”

“아! 이시도르 씨!”

덤불 반대편에서 익숙한 이시도르 씨가 천천히 걸어왔다. 내가 달려가 손을 내밀자, 그가 익숙하게 마주 손뼉을 쳐주었다.


“이시도르 씨가 준비해 준 선물 때문에 오히려 스텔라가 더 나쁜 여자가 됐어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조작한 거예요?”

“알려줘도 너는 못 할 거다. 내공이 필요한 일이라.”

“그렇구나. 아무튼 사람들 앞에서 저를 시해하는 것처럼 만들었으니 아무리 성녀라도 큰 벌을 받게 될 거예요. 어쩌면 제가 바란 대로 신성력을 무리하게 사용해서 본래 얼굴이 드러났을 수도 있고요!”

성녀의 저주는 빼앗아간 내 힘을 바탕으로 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추론을 더 했다.


‘사람들이 예스텔라 얼굴을 나랑 다르게 보는 것도 어쩌면 그 신성력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신성력을 다 사용하고 나면, 그 실체가 더 빨리 드러날지도 몰랐다. 실제로 성녀가 내 힘을 무리하게 쓸수록 억지스럽게 예스텔라 편만 들던 사람들이 달라졌으니까.

가만히 나를 보던 이시도르 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여자, 정체가 드러났을 거다. 이제 네게서 빼앗아간 힘이 바닥났을 터이니.”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들 성녀가 예스텔라라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제 다들 그 여자 편을 주지 못할 텐-”

“그보다 넌 궁금하지 않느냐?”

“무엇이요?”

“네 부모.”

왠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기분이다.


“글쎄요, 요정이라고 해서 이시도르 씨가 다 아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보통은 그렇지.”

그동안 나는 일부러 이시도르 씨와 얘기하면서 요정이나 힘에 대해서만 계속 얘기했다. 실용적인 부분을 얘기할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부모님이란 존재에 대해 말 꺼내기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제 부모님에 대해 아세요?”

“조금은?”

“어느 정도의 사이인데요?”

“네 어미가 내 여동생이라는 것 정도? 막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

이시도르 씨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는 무척 놀랐다.


“저, 저희 어머니가 이시도르 씨의 여동생이라고요? 그러면 엄청 가까운 사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왜 그걸 지금…….”

이시도르 씨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게 얘기해 주기 어려워서 그랬다.”

“네?”

“사실 어릴 적에 헤어지고 나서는 잘 만나지 못했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착각한 건 아니다. 너는 내 동생과 아주 똑같이 생겼거든.”

부모님 이야기에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이름을 듣고 바로 알았지.”

“제 이름이 왜요?”

“그 애가 가장 좋아하던 게 별이었으니까.”

“…….”

“딸아이에게 별이란 이름을 지어준 게 참 그 애 같아서 한눈에 알아봤다.”

 

***

아테아 신의 축복이 깃들었다는 성국의 수도.

성국 그 누구도 모르는 어두운 지하,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의자 위에 한 남자가 시체처럼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무엇을 봐도 의미 없는 것처럼 무기력했다.

파직!

그 순간 남자의 손목에 걸려 있던 보석이 부서졌다. 남자가 팔찌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남자의 뒤로 길게 늘어져 있던 그림자가 쭉 올라왔다.

온갖 동물을 뒤섞어놓은 듯한 기괴한 마물이 남자를 보며 웃었다.


“그 여자가 실패했군. 이제 성황 넌 어떻게 할 셈이지?”

“아직 도구로 사용할 것은 많아.”

하지만 여유로운 것치고 보석을 노려보는 성황의 보라색 눈동자는 매우 살벌했다.


“하지만 마물이여.”

“왜 그러지?”

“그 마지막 요정만 먹으면, 난 정말 완전해질 수 있겠지?”

그러자 마물이 성황을 보며 킬킬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