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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성녀의 실체 (118/182)


117화 성녀의 실체
2023.01.13.



 
스텔라의 계획은 몹시 단순했다.

파렴치한 가짜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도둑임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을 위해 성물 팔찌를 활용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본래 성물이란 성녀를 위해 쓰여야 하는 물건이니까.’

성물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주인인 성녀의 마음 아닌가?

물론 그 계획에는 빈틈이 많았다. 방심했다간 그 간교한 가짜에게 오히려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스텔라는 최적의 시기를 노렸다.


‘재상님께선 그 가짜의 존재가 용납되시나요?’


‘용납되지 못할 리가 있습니까?’


‘그 가짜의 가문은 반역죄로 처형당했습니다. 아무리 공신의 가문에 들어갔다지만, 가짜가 버젓이 살아 있는 게, 황실의 권력에 도움이 될까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력자를 구하고.


‘제가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되면 오르테카 재상님이 바라시는 소원을 이뤄드릴게요.’


‘제 소원이 무엇인지 아시고요?’


‘저는 성녀예요. 신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요.’

다행히 오르테카 재상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스텔라는 미연의 사태를 방지해 계약서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체자레 오르테카는 최선을 다 하여 스텔라가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대가로 성녀 스텔라는 체자레 오르테카의 소원을 들어준다.]

황실에 충성스러운 오르테카 재상. 아마 그의 입장에서도 새로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될 스텔라와 손을 잡고, 그녀의 약점을 쥐어 나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모든 것이 잘 흘러가는 듯했다.


‘왜 마도구에서 저딴 대화가 나오는 거지?’

스텔라는 더 이상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산산조각 난 마도구를 노려봤다.


‘저건 오르테카 재상과 내가 나눴던 대화인데.’

따지고 보면 저 마도구는 오르테카 재상이 스텔라에게 준 것이었다. 스텔라가 주먹을 꽉 쥔 채 오르테카 재상을 바라봤다.


“오르테카 재상님, 마도구가 저를 모함하려 해요.”

이 마도구를 준 것은 오르테카 재상이니 빠져나갈 방법도 그가 만들어줄 거다.


‘재상도 나와의 거래가 들킨다면 무사하지 못할 거야.’

“저를 도와주세요.”

오르테카 재상은 계속 스텔라의 편에 서서 큰 도움을 주었다. 방금 전까지도. 그러니 상식적으로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


“이제 밝힐 수밖에 없군요.”

“……네?”

“여러분, 이 마도구에 녹음된 말은 틀림없는 진짜입니다.”

오르테카 재상의 말에 스텔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오르테카 재상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여러분도 계속 이상하셨을 겁니다. 스텔라 성녀가 함정을 팠다면, 어찌하여 성녀님의 방에서 다시 그 성물이 나오게 되었는지.”

“오르테카 재상님!”

“제가 한 짓입니다. 최대한 성녀님을 말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블란쳇 공작 부인께 못할 짓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르테카 재상이 에스텔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공작 부인께서는 계속 성녀님께 기회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렇지요, 공작 부인?”

“……성녀님에게 나쁜 뜻이 없으셨을 거라 믿었어요.”

잠시 눈을 깜빡이던 에스텔이 애달픈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오르테카 재상이 갑자기 내 편을 들며 성녀를 배신했다. 솔직히 오르테카 재상의 협조는 내 계획에 없었다.


‘일단 울자.’

나는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성녀님께 최대한 기회를 드리고 싶었어요.”

슬픈 것처럼 눈을 내리깔며 상황을 파악했다. 오르테카 재상은 왜 갑자기 성녀를 배신했는가?


‘자기 혼자 살아남으려는 건가?’

그 순간 요한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화를 억누르듯 말했다.


“그랬던 거였어?”

요한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딴 게 뭐라고, 이렇게 부인이 고통받아가면서 기회를 줬던 거야. 나한테 말도 하지 않고.”

“그건…….”

하지만 요한과 눈을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붉은 눈동자에 혼란스러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오르테카 재상도 요한의 체스말이었어.’

오르테카 재상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를 이렇게 위험한 수준까지 끌어들이다니.


‘시몬 추기경 정도로 만족했을 텐데…….’

요한은 만일을 대비해 모든 것을 짜둔 모양이었다.


‘애초에 성녀가 빠져나갈 틈 같은 건 없었구나.’

내가 이시도르의 도움으로 마도구에 녹음된 내용을 바꾸는 일이 없었을지라도, 요한은 기어코 성녀를 처절하게 몰락시켰으리라.


“성녀님은 신의 은총을 받은 분이시니까, 그래서 큰 뜻이 있으실 거라 믿고 싶었어.”

“…….”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여린 붓꽃처럼 젖어 있는 나는 자연스럽게 성녀를 바라봤다. 성녀는 버석하게 굳어 입매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남이 네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건 못 참겠나 보지?’

내가 가증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미 스텔라는 망했어.’

이대로 상황을 마쳐도, 더 이상 성녀가 재기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


“성녀님, 도대체 제게 왜 그러셨나요?”

하지만 지금 난 스텔라에게 따로 볼일이 있었다. 아직 스텔라에겐 신성력이 남아 있었으니까.


“어째서 제가 그렇게 미우셨나요?”

범인으로 몰리던 상황 속에서도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던 내가 흘리는 눈물이다.


 
내 가련한 모습에 귀족들이 모두 놀라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냘프게 어깨를 떨던 나는 용기를 내는 것처럼 힘겹게 성녀에게 다가갔다.


“역시 제가 모르는 피치 못할 성녀님의 사정 같은 게 있으셨던 거죠?”

그리고 나는 성녀를 안아주려는 듯 끌어안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누가 가짜일까?”

스텔라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집어치워!”

스텔라에게도 안 들릴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전달된 모양이다.


“이 모든 게 다 당신이 꾸민 짓이잖아요!”

“서, 성녀님…….”

스텔라는 한순간 끓어오른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나를 밀어버렸다. 그리고 곧장 후회하는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럴 만하지.’

최악의 선택이니까.

요한이 나를 보호하려 했지만,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막았다.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 모습이 스텔라를 더 자극한 모양이다.


“가증스러운 연기 집어치워요. 이 모든 게 당신이 꾸민 함정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제가요?”

“그래요. 나한테 기회를 주기 위해서란 건 말뿐이잖아요. 애초에 이 마도구엔 이런 대화가 녹음된 적 없어요! 상식적으로 이런 대화를 제가 녹음해 둘 리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 무슨 말이 나왔어야 했는데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스텔라는 몹시 억울하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당신이 나한테 이상한 소리를 했던 게 나와야죠. 내 자리를 돌려주지 않고, 감히 나를 망상병자로 몰아갔던 그 말!”

안타깝게도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저는 그런 말 같은 거 한 적 없는데요.”

“하! 이제 발뺌할 셈인가요?”

“그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래요.”

나는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성녀가 더 나쁘게 보일 수 있게.


“아, 설마 성녀님께서 제 남편을 사랑하니 저는 가짜에 도둑이니 했던 그 말을 말하는 건가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거 말고 당신이 했던……!”

“하지만 성녀님.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제가 만약 성녀님께 함정을 파려 했다면, 그동안 성녀님의 잘못을 다 덮어주지 않았겠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말 돌리지 말아요!”

“성녀님, 그 명단은 성녀님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어요.”

조용하던 황제가 내게 물었다.


“명단이라니. 그게 무엇이지?”

“명단은…… 말하자면 증거예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심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던 나는 베티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자 베티가 내게 명단을 가지고 왔다.


“성녀님과 친분을 가지며 저를 험담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증언을 모아둔 거예요. 성녀님께서 모두에게 퍼뜨렸던 저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무어라?”

“이렇게 모아두긴 했지만, 이러다 이야기가 와전되어 성녀님의 명성에 더 큰 해가 될까 걱정되어 몇 마디를 해드리긴 했어요.”

성녀는 억울하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소리를 지를 기력도 없어진 모양이다.

물론 아주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런 얘기한 적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부터 너를 모함할 예정이야.’

그래도 없는 죄를 만들 건 아니니까 억울해하진 말아줘.


“그래도 성녀님, 저는 다 괜찮으니 묻어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성녀님께서 기부한 것으로 해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기부?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성녀님께서 제가 익명으로 기부하던 재단을 자기 것이라 하신 적이 있어요. 혹시나 고아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되어 성녀님의 공로로 해도 된다고 했어요.”

조용히 지켜보던 여성 신자들이 노발대발했다.


“성녀님께서 기부를 하신 게 아니었다고요?”

“도대체 그 무슨! 그러면 저희에게서 받아간 기부금은……!”

“치료를 명목으로 고아들을 위해 기부금을 거두어가셨잖아요. 그게 다 공작 부인이 개인적으로 낸 돈이라면, 성녀님은 무슨 짓을!”

지금까지 성녀는 여성 신도들을 자기편을 끌어들이며 기부금을 수없이 받아냈다. 귀부인들은 제 기부금을 자랑하며 제 명예를 드높였다.

그런데 그게 사기였다.

고결함의 증명이 되던 돈이 죄다 어리석음의 증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녀는 이곳저곳에서 솟구치는 원망과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여, 여러분, 진정하세요. 전 어디까지나 모두를 위해서 좋게 쓴다고만 했지, 그게 고아들을 위해 쓴다고 적은 없어요.”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러면 어디에 쓰셨는지라도 말씀해 주시죠!”

사실 이건 내가 따로 준비한 게 아니다.

오늘 오는 길, 요한이 따로 내게 선물이라고 준비해 준 것이었다.


‘적을 찌를 칼은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

루이지를 통해 모은 정보라던가. 예스텔라의 행동에 대해선 들은 게 많다고 했는데, 최측근의 눈에선 털릴 게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귀부인들의 원망에 변명하지 못한 스텔라가 나를 독기 어린 눈으로 쏘아봤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다가 이 순간에 까발린 걸 봐요. 거기다 저한테 저런 말 한 적 없어요. 다 저를 몰아가기 위한……!”

“아니에요. 성녀님. 믿어주세요. 설마 제가 성녀님의 약점을 쥐고 있던 것이 잘못이었나요? 그것이 성녀님을 위협하고 죄인으로 몰아간다 생각하신 건가요?”

“……부인.”

요한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한테까지 이걸 숨겼어. 왜 이렇게 무리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요한이 더 힘들어지잖아.”

나는 힘 없이 웃으며 흐르는 눈물을 꾹 닦았다.


“가뜩이나 소문도 안 좋은 날 부인으로 들였다면서 고생하는 사람한테 더 큰 짐을 주고 싶지 않았어. 성녀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실 줄 알았고.”

“에스텔, 그렇지 않아. 이건 네가 당연히 참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어.”

“미안, 나는 나만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

뒷말은 생략했다.

하지만 모두가 나를 더욱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요한이 슬프게 울음을 삼키는 나를 꽉 끌어안아 줬다. 요한이 스텔라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부인 자리가 네 것이라고?”

“요, 요한…….”

“여태 내가 했던 경고가 아주 우스웠나?”

그의 품에 묻혀 있어서 스텔라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지?’

이제 보니 요한이 턱에 힘을 꽉 주고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분노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 알고 있던 것 아니었나?’

스텔라가 무어라 하려 했지만 요한은 그녀를 무시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성녀라는 저 여자는 제 목숨을 걸어서까지 악독하게 제 부인을 죄인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많이!”

“요한. 저는 정말 그럴 생각이…….”

“저 여자가 성녀가 맞습니까?”

요한은 분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제 눈에는 성녀라는 지위만 믿고 날뛰는 추악한 망상병자로 보이는데.”

약속했던 대로 저 성녀를 죽이겠다. 그런 다짐마저 들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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