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제가 그렇게 미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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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제가 그렇게 미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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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제가 그렇게 미우셨나요?
2023.01.06.
요한은 흡족한 얼굴로 화인을 문질렀다. 가벼운 손짓에서 진득한 독점욕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 소유욕이 마냥 무섭지 않았다.
‘요한이 나를 원한다는 뜻일 테니까.’
원래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나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까.
위험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미려하고 뚜렷한 선을 그리는 콧대.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는 입매와 턱선, 온몸에 퍼져 있는 퇴폐적인 분위기까지,
‘자꾸 희망찬 생각만 하게 돼.’
그때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요한의 큰 손이 움직였다. 뼈가 단단한 남자의 손이 오목한 등골을 타고 허리까지 내려갔다.
숲속의 한낮은 서늘했다. 여름철의 얇은 옷감 위로 열기가 퍼져갔다.
“부인. 자꾸 그렇게 보지 마.”
요한은 한쪽 손으로 내 턱을 잡아 그와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내가 널 어떻게 보고 있는데?”
“몰라서 물어?”
요한은 욕망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감미롭게 속삭였다.
“온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
“이대로 잡아먹어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표정.”
그의 목울대가 잠이 일렁였다. 터져 나오는 욕망을 억지로 내리누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붉은 자국을 달고서…….”
내 몸 군데군데가 발긋하게 복숭앗빛으로 번져 있었다.
그때 뒤쪽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 사람이 오고 있는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채 다가오는 인기척에 경계했다. 요한이 느른하게 입매를 들어 올리며 내 뺨을 쓸었다.
“사람이 오는데?”
“사람이 오고 있으니까 이러고 있으면-”
“그러면 잘 구경하고 열심히 소문내라 해야지.”
요한은 태연했지만,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우물쭈물 말을 못 잇자, 요한의 손가락이 관능적으로 내 귓불을 문지르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부끄러우면 아예 아무 생각 안 나게 해줄까?”
살갗에 그의 손이 스칠 때마다 허리가 움찔거렸다.
“다른 사람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이지 않게 해줄게.”
“뭐, 뭐를 어떻게 하려고?”
“그걸 말해줄 수는 없지.”
중저음의 목소리가 상상을 자극했다. 머릿속이 온통 이상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어떤 걸 생각하든 재밌게 해줄게.”
“…….”
“어떻게 할까?”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요한은 담백하게 떨어졌다.
“아쉽네.”
이윽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리안드로?’
리안드로는 바닥에 사냥감을 둔 채 멍한 표정으로 나와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살이 꽂힌 사슴은 리안드로의 발아래에서 바르작거리다 도망쳤다.
하지만 리안도르는 사슴을 그대로 놓아둔 채 우리만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내 목, 요한이 남겨놓은 화인을.
정신없이 움직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복숭앗빛으로 홍조가 든 얼굴, 군데군데 요한의 거친 손길 때문에 구겨진 옷자락까지.
이 모든 상황이 말하는 바는 확실했다.
그리고 이미 리안드로는 이 자리에서 벌어졌을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입매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당신, 이 숲에서 무슨 짓을…….”
“사냥하던 중에 한눈팔아도 괜찮나?”
요한이 도망치는 사슴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목표를 이루려면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 텐데.”
“……그 오만함이 언제까지 갈지 두고 봅시다.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겁니다.”
“네가 뭔 짓을 해도 내 부인이 널 볼 일은 없을 거란 것도 알아두고.”
역시 리안드로는 요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리안드로는 말을 돌려 다시 사슴을 쫓아갔다.
마지막 순간 리안드로가 애타게 날 보는 듯했지만 무시했다.
‘저렇게 보기만 하면 다인 줄 아나?’
리안드로가 주는 도움은 아무리 좋아도 내 쪽에서 거절이다. 요한은 리안드로가 사라지는 걸 보고서 내 어깨를 끌어안고, 제 머리를 기댔다.
“봐, 남겨두길 잘했지.”
“그런데 저렇게 리안드로가 계속 사냥하게 둬도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리안드로는 원작 남자주인공이다. 요한이 더 뛰어나도, 방심할만한 상대는 아니다.
“왜, 저 녀석이 사냥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할까 봐 걱정돼?”
“응. 꼭 요한이 1등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밀리면 좀 싫을 것 같아.”
“좋다.”
요한이 나른한 목소리로 뜬금없이 속삭였다.
“누가 이렇게 나 응원해 주는 거.”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데.”
“사냥 대회 같은 건 걱정하지 마.”
내 체취를 탐하듯 목덜미에 콧대를 문지르던 그가 키득 웃었다.
“저 녀석이 절대 넘볼 수 없을 만한 걸 잡아놨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고.”
“초야까지 어떻게 참지.”
요한이 드러난 내 살에 촉촉 입술을 맞추며 으르렁거렸다.
“당장 이 자리에서 너를 가지고 싶어.”
맹수 앞에 목을 들이민 듯한 위기감과 묘한 야릇함이 공존했다. 나는 요한을 겨우 밀어내며 두 볼을 붉혔다.
“농담하지 마.”
“농담으로 보여?”
‘아니, 그래서 문제야.’
이렇게 가만히 있다간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요한한테 작업 거는 다른 귀부인들은 없었어?”
“그런 사람 같은 건 없어.”
“성녀는 있었잖아.”
“그 여자가 미친 거지.”
요한은 딱 잘라서 대답했다.
“대부분 귀부인은 미치지 않고서야 날 무서워해.”
“요한을, 왜?”
“왜겠어. 내가 이렇게 부인한테만 다정하니까 그렇지.”
요한이 느른한 목소리로 나를 유혹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나한테도 새길래?”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의 둔탁한 목울대와 단단하고 날카로운 턱선이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남성적인 선들이 내 시선을 현혹했다.
관능적인 선과 얼굴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역으로 내가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요한이 집요하게 내 입술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데엥-
다행히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봐, 갈 시간이잖아.”
“……그건 참 마음에 안 드네.”
하늘에선 벌써 주홍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사냥 대회가 끝났다. 우리는 천천히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
무도회장은 아주 고요했다.
‘벌써 정화 의식을 시작한 건가?’
오늘 일과를 들었을 땐, 사냥 대회의 승자를 정한 뒤 정화 의식을 시작한다고 했다. 하지만 무도회장의 분위기를 보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황실 기사가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성녀님께서 페스칼로스 숲에서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져 곧바로 정화 의식에 들어가셨습니다.”
백합이 화려하게 장식된 의례용 제단.
그 앞에 선 성녀가 기도하듯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지키듯 추기경들이 서서 같이 기도를 올렸다.
“아테아 신이시여, 제국에 영광을 내려주세요.”
성녀의 기도가 음률처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새하얀 신성력이 파도치듯 그녀에게서부터 솟구쳐 숲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토록 놀라운 힘이라니.”
“아아, 아테아 신이시여.”
몇몇 신자가 눈물을 흘리며 같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저 힘의 실체를 알고 있는 나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물론 난 방심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
아무리 성녀가 대단하다 해도, 페스칼로스 숲 전체를 정화하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일 거다.
‘오랫동안 내 힘을 빼갔다 해도 힘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
당장 성녀가 내 힘을 빼갈 수 있는 루트는 봉쇄된 상태다. 그러니 정화 의식을 통해 성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내 힘을 다시 빼앗아 채워 넣는 거지.’
성녀의 신성력이 빛으로 된 막이 되어 숲 전체를 감쌌다.
크르르륵-
페스칼로스 숲에서 기괴한 울림이 들려왔다. 신성력에 저항하듯 어두운 힘이 솟구쳤다.
“……하아.”
고아하게 기도하며 서 있던 성녀가 살짝 비틀거렸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도대체 저 숲에 또 어떤 오염이-”
추기경들조차 저런 어둠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성녀를 감싸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성녀는 추기경을 돌아보지 않고 고결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모두 걱정 마세요.”
성녀의 청아한 울림이 퍼졌다.
“어둠은 결코 저를 이기지 못할 거랍니다.”
성녀는 무릎을 꿇은 채 다시 기도를 읊조렸다. 성녀의 신성력을 찢어발길 것처럼 위협적이던 어둠도 성녀를 이기진 못했다.
“서, 성녀님.”
귀족들이 새삼 감탄한 얼굴로 성녀를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는 몸, 흔들리는 가냘픈 어깨, 가빠오는 숨소리까지.
척 보기에도 성녀는 무척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녀라는 이름답게 의연히 허리를 펴고 어둠과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성녀의 곁을 지키던 성기사가 성녀에게 다가갔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성녀가 주위의 귀족들을 향해 고개를 돌아보며 말간 미소를 지었다.
“……네, 아테아 신의 도움으로 모두 끝낼 수 있었어요.”
“아아, 드디어.”
성기사를 비롯한 사제들 모두 감격한 목소리를 냈다. 그 순간 신관의 손을 잡고 서 있던 성녀가 쓰러질 것처럼 넘어질 뻔했다.
성기사가 성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요.”
“성녀님,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쉬러 가시지요.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어둠에 생각보다 많은 힘을 쓰신-”
그때 성기사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성녀의 팔목을 잡았다.
“성녀님의 성물 팔찌가…….”
성녀의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성기사를 시작으로 주위를 지키던 추기경들 모두 크게 충격받은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왜 성녀님께 성물 팔찌가 없으신 거지?”
“그렇다면 성물 팔찌의 보조 없이 숲을 정화하시려다 무리를 하셨단…….”
“성물 팔찌가…… 사라졌단 말입니까?”
“성황께 이 소식을 어찌 전해드려야 할지…….”
사제들의 불안은 금세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쉽게 전염되었다.
“성물 팔찌가 없어져서 성녀님께서 무리하셨던 모양이에요. 도대체 어쩌다 성물이…….”
“이건 신께 용서받지 못할 중죄예요. 이걸 어찌하면 좋아요.”
몇몇 신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까지 했다. 고위 사제들은 서둘러 가장 크게 동요하고 있는 신자들을 달랬다.
그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간호받고 있던 스텔라가 신관들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여러분께 말씀드려야 할 말이 있어요.”
스텔라는 아련한 슬픔이 묻어나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저는 성물을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저 역시 가져오려 했지요.”
스텔라의 눈이 흘깃 나를 스쳤다. 그녀의 푸른 눈이 내 목 부근에 새겨진 화인에 닿았다가 사라진 듯했다.
‘어쩌면 형벌이 당신에게 인생을 참회할 기회를 줄 수도 있으니……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아요.’
***
고위 사제 중 하나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성녀님. 그렇다면 누군가 성녀님의 성물 팔찌를 훔쳐갔다는 겁니까?”
“너무 슬프게도.”
스텔라가 가련하게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전 사실 범인을 알고 있었어요.”
“서, 성녀님께서 범인을 알고 계신다고요?”
“네. 전 범인이 직접 성물을 훔쳐가는 것도 보았어요.”
스텔라는 결국 눈물을 가련하게 흘리며 말했다.
“스스로 죄를 깨닫고 돌려주시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분은 그럴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이제 전 성녀로서 더 이상 다른 이들이 걱정하고 고생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가냘프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쟁쟁한 소란을 더 부추겼다. 누군가 스텔라에게 물었다.
“그게 누구입니까?”
“그 범인은 바로…….”
가련하게 고개를 저은 스텔라가 비극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희고 고운 검지가 가느다랗게 떨리며 한 여자를 가리켰다.
“블란쳇 공작 부인.”
“…….”
“제가 그렇게 미우셨나요?”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스텔라가 눈가를 붉히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하지만 성물 팔찌는 저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요.”
모두가 성국의 신성한 성물을 훔친 범인, 에스텔을 향해 경멸과 분노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이 그 범인이었단 말입니까?”
“도대체 어째서 그런 무도한 짓을.”
“성녀님께서 정화 의식에 실패하길 바랐던 것이지요. 아마…….”
딱 스텔라가 바랐던 상황이다.
스텔라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조금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곱고 슬픈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봤다.
“이제 그만해요. 우리.”
다시 살랑살랑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린 스텔라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서글프게 말했다.
“모두 당신의 부덕을 알고 있으니까요.”
이제 저 뻔뻔스러운 도둑에게 부덕의 대가를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