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키스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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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키스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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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키스 마크
2023.01.03.
나는 침착하게 이시도르에게 물었다.
-그거, 확실해요?
-그래. 확실하다. 나무들은 몰라도 나를 속일 수는 없지.
불현듯 스텔라가 나를 치료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땐 그냥 성녀라 다른 신관들의 신성력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의심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제 요정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거죠?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저주.
-저주요?
이시도르 씨가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저주를 이용해 네 요정의 힘을 빼낸 거다. 애초에 저주 정도 되는 힘이 아니면 요정의 힘을 빼앗을 수도 없다.
이해할 수 없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 기억.’
그때 나는 살아 있는 예스텔라 앞에서,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
‘우연히 생겼다던 그 흉터가 모두 진짜 당했던 흉터였던 거야?’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차근차근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나열해서 정리하려 애썼다.
죽은 줄 알았던 예스텔라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
‘성녀의 모습으로 누구보다 잘 살고 있었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두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죽지 않고 리베르탄 공작 부부와 함께 나를 괴롭혔던 것 같다.
‘내 몸에 걸려 있는 저주도 예스텔라를 위한 거였어.’
이유 없이 생겨나던 흉터와 누군가에게 계속 빼앗기던 내 힘. 그리고 그 힘이 예스텔라에게서 느껴지는 게…….
‘우연일 수 있을까?’
예스텔라의 병 자체가 거짓말일 가능성은 적었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는 하나였다.
‘예스텔라가 내게 저주를 걸어서 살아난 거야.’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시도르가 돌처럼 굳은 내게 말했다.
-사실 이것만으로 그 저주의 정체를 단언할 순 없다. 지금 확실한 건, 저 여자가 저주를 이용해 네 힘과 생명을 빼앗아가 자기 힘처럼 쓰고 있다는 거다.
스텔라가 일어서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거기 서요, 공작 부인.”
스텔라의 눈동자는 푸른 호수처럼 청명했다.
“아직 얘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떠날 생각인가요?”
“…….”
“다시 자리에 앉아봐요.”
스텔라의 얼굴 위로 어린 예스텔라의 사악한 표정이 겹쳐졌다. 고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얼굴 뒤에 있을 가증스러운 표정마저 생생하게 떠올랐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차를 그만 마시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잖아요.”
그 순간 바닥에 깔린 푸른 잔디밭 아래에서 아지랑이처럼 뿌연 회색 안개들이 서서히 퍼져왔다.
-요정의 힘을 바닥에 깔아라.
-그러다간 성녀가 제가 저항한다는 걸 눈치채지 않을까요? 아, 이미 알고 있으려나.
기본적으로 숨기고 사는 게 습관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숨길 생각부터 해버렸다.
-요정의 힘을 강하게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저 여자는 절대 네 힘을 파악하지 못할 거다.
-그렇다는 건, 제가 성녀가 모르도록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겠네요?
-그래, 좋은 기회라는 거지.
나는 이시도르 씨의 조언을 들어 최대한 세밀하게 내 요정의 힘을 다뤘다.
‘주변에 식물이 많이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요정의 힘을 다루는 게 편했다. 요정의 힘은 씨앗처럼 바닥에 퍼져 스텔라의 힘이 내게 스며들지 못하게 막았다.
키이잉-
요정의 힘과 성녀의 힘이 부딪치며 기이한 파공음이 들렸다.
‘성녀한테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나?’
스텔라가 가증스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저는 당신에게 많은 기회를 줬어요. 그리고 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시퍼런 칼날이 온몸을 겨누는 듯한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생명의 위협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건 기회야.’
나는 성녀의 힘에 압도당하는 척 몸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성녀님께서 제게 무슨 기회를 주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여전히 반성할 마음이 없군요.”
“잘못이 없는데 반성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정말 끝까지…….”
스텔라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좁혀졌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안쓰럽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목소리만 꼭 의식해서 다르게 말하는 것 같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은 더 없었다.
키이이이잉-
귀에 들리는 이명이 더 커졌다. 스텔라의 기운이 점점 강해진 것이다. 나는 성녀를 노려보는 척하면서 이시도르 씨에게 물었다.
-성녀가 저에게 무슨 힘을 쓰는 걸까요?
-처음엔 단순히 네 힘을 빼앗으려는 줄 알았는데…….
잠시 말을 멈췄던 이시도르 씨가 말했다.
-이제 보니 네게 있는 저주를 더 강화하려는 것 같다. 아마 최근 네게서 힘이 들어오지 않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양이지.
목적을 확인하고 나니 안심됐다.
-그러면 더 스텔라랑 대화하고 있을 필요가 없겠네요.
나는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성녀에게 싱긋 웃어줬다. 마치 이전에 성녀가 나를 바라봤던 것처럼 은근히 깔보는 눈으로.
“차 잘 마셨어요. 하지만 이제 우리 사이에 더할 얘기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러자 스텔라가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대답했다.
“그래요, 에스텔. 그게 당신 선택이라면 저도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래요?”
“어쩌면 형벌이 당신에게 인생을 참회할 기회를 줄 수도 있으니…….”
스텔라는 위선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아요.”
“성녀님도 힘내세요.”
나도 웃으며 화답했다.
“또 짓밟히면 곤란해지실 텐데.”
천천히 돌아서서 나가는 순간, 이시도르 씨가 빠르게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 성녀를 계속 살피고 있었는데, 저 여자의 기운 사이로 웬 낯선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다.
-마력의 기운이요?
-소리를 담는 마도구를 사용한 것 같은데? 너와 하는 동안 마도구를 사용한 것 같다.
순간 내가 성녀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되새겼다.
-……그것참 이상하네요. 그렇다고 성녀가 막 착하게 대답한 것도 아닌데.
보통 녹음할 수 있다면, 저렇게 이상할 정도로 본심을 드러내진 않는다. 스텔라는 나를 대놓고 도둑 취급했고, 솔직히 이 대화가 까발려지면 다들 성녀의 실체를 알고 충격받을 터다.
-평범하게 녹음하기만 하는 마도구가 아니니까. 아마 저 여자의 말과 네 말이 현실과 다르게 녹음해 주는 마도구 같다.
-와, 그런 마도구가 있다니.
녹음해 주는 마도구도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고 있었지만,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면 마도구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 고장을 낸다거나.
-그래, 아무 방법도 없다면 애초에 얘기도 안 꺼냈을 거다.
-……방법이 없어도 말은 해주세요. 알아야 뭘 대비하든 할 테니까.
손목에서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내가 쓰던 요정의 힘과는 조금 다른 힘이 느껴졌다.
‘이시도르 씨의 힘이다.’
이시도르의 힘은 비수처럼 날카롭게 쏘아져 나가 스텔라에게 날아갔다. 나는 태연하게 걸어가며 이시도르 씨의 말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됐다.
-잘 해결됐어요?
-그래. 잘 끝났다.
-그러면 마도구를 완전히 고장 낸 건가요?
-그걸로 끝내면 아쉬울 것 같아 너한테 작은 선물 하나를 남겨뒀다.
이시도르 씨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묻어났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데요?
-저 여자가 이상한 수작질을 부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올바르게만 사용한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겠지만…….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베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마님!”
“아, 베티.”
“무슨 일 없으셨어요? 성녀 그 여자가 마님한테 해를 끼쳤다거나…….”
“아니. 그런 일은 없었는데.”
“휴. 다행이다. 그래도 다음에는 꼭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베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성녀가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제 촉이 말하는데,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네 촉 아주 정확하다.
한 번씩 정확하게 들어맞는 베티의 촉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시도르 씨, 스텔라가 제 힘을 자기 힘처럼 쓰고 있다고 했죠? 그러면 제 힘을 다 쓰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마 더 힘을 사용하지 못하겠지.
-그러면요.
머릿속으로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방금 전 제가 스텔라한테 맞을 뻔했던 그 힘 있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
스텔라 성녀는 에스텔이 사라지고도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하게 웃던 그 미소, 짜증이 올라와 견딜 수가 없었다.
‘……다 네 잘못이야.’
스텔라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자격 없는 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방자하게 날뛰기에 제 역할을 깨닫게 해주려 노력하고, 친절히 일러주기까지 했다.
‘그저 어리석은 것일 뿐,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애당초 가짜에게 그런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 가짜가 요한의 눈마저 가리고 있을 줄이야.’
가짜에게 휘둘려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요한을 생각하니 스텔라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순하게 내려간 눈망울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기다려요, 요한.’
그녀를 위해 준비된 남자, 요한 블란쳇.
신이 만든 것처럼 완벽한 외모, 압도적인 힘과 귀족적인 분위기, 고귀한 혈통. 어느 하나 빠짐없는 요한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스텔라를 위해 존재하는 남자라는 거다.
애초에 지금의 완벽한 그를 만들어준 것도 다 그녀의 가문인 리베르탄의 헌신 덕분이니까.
‘내가 꼭 당신을 구해줄게요, 당신의 운명대로.’
예스텔라가 성물 팔찌를 만지작거리면서 눈빛을 빛냈다.
***
-이번 일이 끝나고 다시 나를 만나러 와라. 그동안 난 네 저주에 대해 더 생각해 보마.
이시도르와의 대화가 끊겼다. 그리고 나무들에게 곧장 말이 쏟아졌다.
-방금 연락이 안 됐는데 성녀 그 여자랑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그래! 그 여자가 또 이상한 힘을 쓴 거 아니냐?
“이상한 힘을 쓰긴 했어요. 하지만 이시도르 씨가 나와서 도와주셔서 괜찮았어요.”
난 일단 나무들을 진정시킨 뒤 전후 과정을 설명해 줬다. 그러자 나무들은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성녀에게서 너와 같은 힘이 느껴진다고? 우리는 잘 모르겠구나.
-그래, 조금 이상하긴 했어도 신성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정이라 느낄 수 있었던 걸지도.
“그럼 저에게 무슨 경고를 해주던 나무 목소리에 대해서는 짚이는 게 있으세요?”
-아, 아니.
-허허. 우리가 진짜 아는 게 없구나. 도대체 누가 배후에 있기에…….
-일단 혹시 모르니 나무들 사이로 한번 가보겠니? 너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우리가 말을 걸었을 때도 반응했겠지.
마침 크게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나무들과 함께 그 경고하던 목소리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나무들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던 내 눈에 익숙한 갈색 머리가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요한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요한이 말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어디 있었어? 사냥 다 끝내고 널 찾고 있었는데.”
“벌써 다 잡았어?”
“그럼.”
어쩐지 요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등 뒤로 튼튼한 나무가 닿았다.
요한이 나를 끌어당겨 나무와 자신 사이에 나를 가두었다.
요한의 퇴폐적인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더욱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요한은 제 품 속에 갇힌 나를 보며 만족스럽게 늘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거 들었어?”
요한이 감미롭게 속삭였다.
“리안드로 그놈이, 네게 사냥감을 바친대.”
어쩐지 눈빛이 심상치 않다 했다. 내가 얌전히 눈을 깜빡거리자, 요한이 내 뺨과 어깨를 어루만졌다.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댄 그가 귓불을 깨물었다.
“사실 리안드로 그놈만이 아니야. 힝클린 자작에, 로데릭 백작, 그 외에 추잡한 놈들까지 다 부인을 위해 사냥한다는 헛소리를 뒤에서 떠들고 다녀.”
“…….”
“그놈들은 부인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건가?”
나를 바라보는 붉은색 눈동자가 몽롱하게 빛났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섬뜩한 분노가 느껴졌다. 언제나 보던 형형한 광기가 그의 이면 속 야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바짝 달아오른 분위기에 말려들어 얼굴을 붉혔다. 긴장감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면 어쩌지?”
“멍청한 것들도 알 수 있게 해줘야지.”
요한은 천천히 다물린 내 몸을 느긋하게 파고들었다.
“도저히 모를 수 없게.”
그의 손길이 내 허리에 감기고, 입술이 이마부터 콧대까지 천천히 내려앉았다. 피부 위로 날 것의 뜨거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게 집중해.”
나른하게 내 목덜미를 훑어내린 그가 입술을 맞추고 빨아들였다.
“증거만 남길 테니까.”
탐욕스럽게 목덜미를 깨문 그가 쇄골로 내려가 뜨거운 입술로 화인을 남겼다.
온몸이 그의 체취로 덮인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요한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갈증과 소유욕이 범벅된 몸짓으로 나를 감쌌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붉은 눈동자.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선명한 눈동자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이러면 자국이 남을 텐데.”
“남으라고 한 거야.”
곱게 사르르 접히는 날카로운 눈매,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내 턱을 잡고 뺨에 쉼 없이 입을 맞췄다.
“어차피 우린 결혼한 사이니 상관없잖아.”
“…….”
“이렇게 예쁘게 새기면…….”
천천히 고개를 든 요한이 엄지로 자신이 남긴 화인을 매만졌다. 그가 남긴 자국에서 열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감히 우리 사이에 엄두도 못 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