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도둑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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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도둑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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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도둑은 누구?
2022.12.30.
성녀는 상처 입은 소녀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다시 허리를 굽혀 손수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요한의 질 나쁜 행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요한은 말없이 손수건을 당기며 성녀를 조롱했다.
정적이 찾아왔다.
‘이런 식이면 요한의 평판도 나빠질 텐데…….’
그동안 요한은 잔혹하지만, 고고한 귀족 그 자체로서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잔혹함이 허용되는 것은 명분이 있을 때였다.
‘명분이야 있지만.’
그래도 스텔라 성녀는 고귀한 성녀였다.
열렬한 아테아 신도로 유명한 귀족들은 자기도 성녀의 수치를 같이 겪는 것처럼 굴욕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털썩, 성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흰 드레스가 바닥에 닿아 꽃잎처럼 퍼졌다. 성녀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요한을 올려다봤다.
“브, 블란쳇 공작께서 너무하시는 게 아닐까요?”
“성녀님의 행동이 일견 몰상식해 보일 수 있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그때 가만히 있던 황제가 중재에 나섰다.
“-블란쳇 공작.”
“예, 폐하.”
“성녀도 반성하고 있을 걸세.”
요한은 말끔한 미소를 지으며 성녀를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반성할 사람이 이런 짓을 저지릅니까?”
“그건…….”
“제가 보기엔 아직 성녀는 많이 억울한 모양입니다.”
성녀는 무어라 말하지도 못한 채 입술을 꽉 짓씹었다. 요한이 품에 안고 있던 내 허리를 살짝 두드렸다.
‘나보고 나서라고?’
그 순간 이 상황 자체가 요한이 내게 준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 때문에 더 과하게 행동한 거구나.’
자연스럽게 나를 돋보여주고, 블란쳇 공작 부인인 내 위치를 더 공고히 해주기 위해서.
“요한, 아직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좋은 날인데 웃으면서 넘어가자.”
“꼭 그렇게 넘어가야 할까?”
“폐하께서도 더 불편해지는 걸 원하시지 않을 거고.”
내가 황제의 면을 세워주자, 황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황제 체면도 세웠고.’
요한은 더 볼일 없다는 듯 발을 치웠다.
피이익-
그때 황궁 시종의 호각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사냥 대회가 준비되었다는 소리다.
사람들은 이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식적으로 사냥 대회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요한 역시 움직이는 귀족들을 따라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준비한 말에 올라탄 요한이 내게 말했다.
“혹시 또 저 이상한 여자가 나서면 나한테 말해.”
“요한한테 다 일러바칠까?”
“내가 올 때까지 뺨을 때려도 좋고.”
마수의 혈통이 섞인 거대한 흑마는 요한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러면 이제 다녀올게. 부인.”
요한이 말에 올라탄 채 손에 들린 붉은 리본을 흔들었다.
바람에 붉은 리본이 살랑거렸다. 나도 그를 따라 마구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요한이 마지막 인사처럼 리본에 입을 가볍게 맞춘 뒤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근처에 있는 황궁 시종 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블란쳇 공작 부인, 귀부인들을 위해 준비된 막사가 있습니다. 막사로 이동해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럴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궁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때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찾았다.
먼발치에서 원작 남주 리안드로가 하얀 말에 올라탄 채 나를 애타게 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당신은 내게-”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왠지 찝찝하다니까.’
리안드로의 첫사랑이자 진짜 사랑은 예스텔라였다.
예스텔라가 나타나지 않았던 원작에서도 리안드로는 나를 예스텔라의 대신으로 여겼다. 불쌍하고 안쓰러워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예스텔라를 사랑했다고.
‘그런데 지금은 예스텔라가 나타났잖아.’
비록 얼굴을 알아볼 수 없고, 신분도 다르다지만.
‘그래도 그렇게 사랑했다면, 알아볼 만하지 않나?’
나는 리안드로의 시선을 무시한 채 황궁 시종을 따라갔다.
가는 길에 스텔라 성녀가 건너편에 보였다.
다행히 나랑 방향이 다른 것을 보아 같은 곳에 머물게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여러 귀부인에 둘러싸여 위로받던 스텔라가 힐끔 나를 바라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스텔라는 파랗게 질렸던 안색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온화한 성녀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섬뜩한 눈빛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나 역시 지지 않고 그녀를 보며 생글생글 웃어준 뒤 내 막사로 떠났다.
‘사냥이 끝날 때까지는 별일 없겠지.’
하지만 막사에 도착한 순간, 흰색에 금테를 두른 고위 사제가 나를 찾아왔다.
“성녀님께서 블란쳇 공작 부인과 단둘이 오붓하게 차를 한 잔을 나누고 싶으시다는군요. 이전에 뵙기로 약속했다고요.”
그런 약속한 적 없는데.
“성녀님께서 그러셨던가요?”
“무도회의 소란에 대해 얘기할 겸 무도회 근처에서 대화하시자고 하십니다. 성녀님의 초대에 응해주시겠습니까?”
성녀 스텔라, 리베르탄의 친딸 예스텔라.
‘전에 나를 괴롭히는데 참여했던 이상한 기억도 그렇고.’
마냥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녀라기엔 한없이 꺼림칙한 성녀.
‘처음에는 내 처지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나 싶었지만…….’
오늘 일로 더 확실해졌다.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꺼림칙한 기분은, 단순히 그녀가 친딸이어서만은 아니다.
“좋아요.”
리베르탄으로 엮인 사이인 것을 제외하고도, 스텔라 성녀 자체로도 그녀는 내게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까.
‘이대로 멍청하게 계속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와 대화해 볼게요.”
이번 기회에, 성녀의 실체를 확실하게 알아내야겠다.
***
스텔라는 숲 뒤쪽에 마련된 정원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고상하게 차를 들고 있던 스텔라가 나를 발견하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새 드레스로 갈아입었는지, 먼지 하나 안 붙은 새하얀 드레스에서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신기하네.’
리베르탄에서 매번 지겹도록 비교당했던 예스텔라.
태양처럼 맑은 미소와 순수함을 품고 있었다던 사랑스러운 친딸.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햇빛 아래에서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 스텔라는 성녀 같으면서도, 고귀한 집안에서 자란 현숙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저를 부르셨다고요?”
“네, 황실 재판 일도 그렇고 우리 사이에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요.”
스텔라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차를 권했다.
‘참 우습네.’
스텔라의 얼굴을 본 게 처음도 아닌데, 기분이 참 이상해졌다. 저번에 멀쩡히 살아 있는 예스텔라가 어린 날 괴롭히는 기억을 봐서인가.
‘그때 난 차라리 예스텔라가 살아 돌아왔으면 했는데.’
처음에는 친딸이 돌아와 버림받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게 더 끔찍했다.
‘그랬는데, 이런 사람이었구나.’
스텔라 성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차 향기가 참 좋지요?”
“네, 그러네요.”
“공작 부인께선 제게 할 말이 없으신가요?”
굳이 따지자면 정말 많다.
‘왜 스텔라는 리베르탄 공작가로 안 돌아갔을까?’
그토록 사랑하는 부모님이 고초를 겪고 있는데, 왜 구하지 않고 태평하게 정화 의식을 치르겠다고 하는 걸까.
-조심해…….
그때 근처의 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흔들며 경고했다.
-그 여자는 제……. 접할수록…….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무의 말이 끊겼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를 정리하는 척 나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느 나무가 말했는지도 알 수 없고, 더 이상 들려오는 이야기도 없었다.
“공작 부인께서 말씀하시기 어렵다면, 제가 먼저 얘기를 꺼낼게요. 어차피 둘만 있는 상황이니까요.”
스텔라가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공작 부인과 제 우정이 흔들리는 일이 계속 생겨서 너무 슬퍼요. 어쩌면 제 잘못도 있는 것 같아, 마음도 아프고요.”
‘그래, 다 네 잘못 맞아.’
“공작님과 오랜만에 뵙게 되어 기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품위 있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스텔라는 전설 속의 기품 있는 성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뼈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일부러 저러는 거지?’
요한이 무도하게 군 것은, 성녀의 불쾌한 접근이 잦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도 그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하필 요한이지?’
원작의 남자 주인공은 리안드로잖아. 그렇다면 요한이 아니라 리안드로를 노리는 게 맞지 않나? 심지어 리안드로는 예스텔라를 사랑한다고 정해진 사람인데.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지금 할 일은 확실했다.
“걱정 마세요. 성녀님.”
“제 사과를 받아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나는 얼음을 넣어서 차가운 찻잔을 손으로 쥐며 생긋 웃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기분 상할 순 없는걸요. 제 남편한테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데요.”
“아…… 역시 이해력이 넓으시군요.”
“그럼요. 성녀님도 아시겠지만, 요한이 워낙 근사하잖아요. 그래서 성녀님처럼 실수를 하는 어린 영애들이 참 많아요. 그런 것에 다 화낼 순 없죠.”
성녀의 미소는 흔들림 없었지만, 바로 마주 보고 있는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무척 상했구나?’
다른 여자들과 똑같이 취급받고 있어서인가.
어쩌면 그녀는 요한과 자신의 사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아니에요. 제게 정말 큰 깨달음을 주셨어요. 사실 전, 어릴 적부터 블란쳇 공작님과 인연이 있었답니다.”
스텔라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저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에 너무 성급히 행동했어요.”
그러던 스텔라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부인께서 저를 이해해 주신다면, 공작님께서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너무 기가 차서 잠깐 머리가 멍해졌다.
‘성녀가 뭐라는 거지?’
“전 사실 옛날부터 블란쳇 공작님이 신을 향한 마음이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거든요. 공작 부인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공작님께서는 더 올바른 길로 돌아가실 수 있으세요.”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서 성녀를 바라봤다.
“공작 부인, 역시 불쾌하신가요?”
성녀가 애교스럽게 두 눈썹을 모으며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에요.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러시다면 역시 허락해 주신다는 의미겠죠?”
“하지만 이걸 어쩌죠.”
나는 성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정도로 제정신이 아닐 줄이야.’
슬슬 성녀를 상대로 예의를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제 남편은 성녀님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걸요. 안 그래도 성녀님의 안쓰러운 모습에 제가 몇 번 물어도 보았지만…….”
성녀의 입가가 흔들렸다.
“……제 이름도 모르신다고요? 부인께서 잘못 아신 건 아니고요?”
“에이, 정말 이름을 모르겠어요. 그만큼 성녀님에게 관심이 없단 뜻이죠. 신전에서만 사셨다더니 농담을 알아듣기 어려우신가 봐요.”
“제가 좀 곱게 자라서 그런 면이 있지요.”
“아무튼 성녀님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요한은 성녀님 이름만 들어도 끔찍할 정도로 짜증 나는 것 같았어요. 기억도 안 나는 여자가 들이대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만 하다나, 어머, 세상에.”
나는 곤란한 듯 입을 가렸다.
“성녀님께 말이 너무 심했네요. 죄송해요, 제가 잘 알아서 다르게 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저 역시 상당한 무례를 저질렀는걸요.”
“무례라는 것을 알고 계셨어요?”
성녀의 말에 신기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저는 성녀님께서 워낙 대담한 말을 하셔서 무례라는 것도 모르고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 행동이 무례라는 걸 잘 알고 계셨군요.”
성녀가 짜증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 눈동자를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진 마세요. 성녀님께서 무례하게 행동해 주신 덕분에 요한이 제게 더 잘해줘서, 저희 둘 사이가 더 끈끈해졌거든요.”
“…….”
“결론적으로 저희 부부를 위해 노력해 주신 거니 좋게 넘어가 드릴게요.”
결국 성녀는 가식적으로 웃던 얼굴을 집어치웠다.
“부인.”
스텔라가 싸늘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눈빛에는 오만함이 묻어났다.
“부인께선 주인 모르게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도둑이 주인인 척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묘한 싸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지금 나를 도둑 취급하는 거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제가 잘 모르는 얘기 같은데.”
“아니에요. 부인께선 알고 계세요. 주인이 따로 있다는걸요.”
“하긴, 맞아요.”
도대체 왜 나보고 도둑이라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주인도 정해진 것에 계속 탐내는 파렴치한 도둑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성녀님께서 하도 이상하게 말해서 저도 착각했나 봐요.”
새삼 대화할수록 스텔라 성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성녀님.”
나는 천천히 일어서며, 성녀를 내려다봤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걸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보통 그런 걸 망상병자라고 하잖아요.”
그때 뭔가 심상치 않은 오싹한 기류가 느껴졌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요정의 힘을 일으켰다.
그 순간.
-에스텔.
이시도르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요?
-저 성녀에게서, 네 요정의 힘이 느껴진다. 아니, 저건 네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