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부부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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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부부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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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부부의 의무
2022.12.23.
요한의 시선에 담긴 욕망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내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갑자기?”
“갑자기라고 할 건 없지.”
요한이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
“부부 사이에 할 일을 할 때가 됐잖아? 부인.”
부부 사이에 할 일
“우리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말하는 바는 아주 명확했다. 요한의 손길이 은근한 욕망을 담고 내 어깨를 쓸었다. 그리고 천천히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옷을 입고 있어도 요한이 주는 감각이 선명했다.
솜털까지 바짝 섰다. 오늘따라 잘생긴 그의 얼굴이 더욱 유혹적으로 보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홀려버릴 것 같다.
“이제 너도 다 알겠지만, 블란쳇 공작가는 지금 일가친척도 없는 상황이야. 그래서 더 우리의 역할이 중요하고.”
언젠가 다가올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지금 당장에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너, 너무 갑작스러운데.’
값비싼 예술품을 다루듯 섬세하고도 단단한 손끝이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졌다.
“물론 그딴 건 다 중요하지 않아.”
“그러면?”
“너를 원해.”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깜빡임 하나 없이 나를 주시했다.
날카로운 시선에 내 모든 것이 파헤쳐지는 기분이다. 요한이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나를 원해?”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잠겼다. 괜히 이불자락을 만지며 진정하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너를.”
너를 원해.
네가 좋아, 너를 사랑해.
‘네 손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손길이 닿은 등허리가 묘한 감각으로 움찔했다. 내 긴장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몸의 반응마저 숨길 수는 없으므로.
쪽.
입술이 간지러울 정도로 살짝 닿았다.
“말하지 마.”
눈이 마주친 요한이 사르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돼.”
“……무엇을?”
“네 마음에 아직 망설임이 남아 있지?”
요한의 이마와 내 이마가 닿았다. 허리선을 쓸던 그가 두 손으로 내 양 뺨을 감싸고 내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긴 속눈썹과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처음 봤을 때, 나는 요한의 눈이 두려웠다.
포식자의 눈.
먹잇감을 절대 놓치지 않는 잔혹한 눈이었으므로.
사소한 빈틈이라도 들켰다간 갈가리 찢겨버릴 것 같았으니까.
지금도 요한은 마찬가지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든, 그의 본질은 냉혹하고 냉철한 사람이다.
요한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무 소용 없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맞아.”
“뭐가 무서운 거야?”
그의 눈빛은 내 안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오만하고 당당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쟁취하고 승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보며 엷게 웃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설마 병 때문이야?”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내 당황을 속내를 들킨 것으로 읽어버린 모양이다.
“잠자는 공주 때문이 맞네.”
‘……그거 다 나았는데.’
실제로 그 뒤로 내가 오래 잠들 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 나았다고 말해야 하나?’
요한에게 더 이상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모른 척 넘겨두었던 거짓이 내 입을 가로막았다. 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요한이 네 얘기를 다 듣고도 너를 예전처럼 봐줄까?’
이건 리베르탄의 학대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설사 요한이 더 이상 나한테 복수하려 하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신뢰는 남아 있지 않겠지.’
[아름다운 괴물은 결국 신부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다 읽지 못했던 <아름다운 괴물>이 떠올랐다.
괴물은 신부를 살해하고도, 신부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끝없이 애정을 갈구했다.
[왜 나는 괴물로 태어났지? 나도 괴물로 태어나고 싶어서 괴물로 태어난 건 아니냐.]
그러자 죽은 신부가 웃으며 아름다운 괴물을 비웃는다.
[그래서 네가 괴물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너는 괴물이야.]
[그러면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나? 괴물로 태어났으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말라는 건가?]
[최소한 네가 괴물이라고 말해줬어야지!]
[그러면 네가 나를 사랑했을까?]
물론 죽은 여자는 그 대답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본래 죽은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으므로.
요한이 애틋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약속했다.
“병이나, 다른 문제 같은 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어떻게 그래.”
“그래도 돼. 다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요한이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너는 네 마음만 생각하면 돼.”
윗단추를 풀어 내린 옷 틈 사이로 반듯한 쇄골과 단단한 근육이 보였다. 일전에 보았던 그의 자극적인 몸이 떠오르며 볼이 다시 화끈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내 마음을 전혀 모르겠다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러자 요한이 픽 웃었다.
“아직 제대로 안 정해진 게 맞네.”
“왜 그렇게 생각해?”
“확실하면, 더 의심할 수가 없거든.”
어쩐지 요한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말이다.
“네 마음이 그렇다면 내가 더 노력하는 수밖에.”
“요한은 노력을 다했는데도?”
“이미 넌 나를 사랑하잖아.”
요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리를 꼬고 앉았다.
“확신만 갖게 하면 되는 데 뭐 그리 어렵다고.”
나를 배려하기 위해서 더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투.
“나한테 넘어와서 더 헤어나기 어렵게 해줄게.”
요한이 나를 갈구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자꾸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처음부터 요한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았어야 하는 걸까?’
나를 복수 대상으로만 보던 남자한테 그런 모험을 걸었어야 했다고.
‘아마 난 그럴 수 없었을 거야.’
지금의 요한은 그때의 요한과 다르다.
‘지금 요한은…… 나를 조금쯤은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하지만 진실을, 그것도 내가 처음부터 그를 기만했다는 진실을 알게 되어도 여전히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까?
어차피 요한은 원래 목적인 복수를 다 이뤘다.
반대로 나라는 사람은 어떤 쓸모도 없다. 요한의 마음이 떠나면 이 자리에 머무를 수도 없는 존재다.
‘난 왜 이렇게 복잡할까?’
요한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또 요한을 두고 이것저것 계산하고 있다. 그런 내가 환멸 나게 징그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재고 따지고 있다.
“아니. 그렇게 할 필요 없어.”
나는 그런 내 마음에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너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당황했을 뿐이야.”
“그러면?”
“나도 요한 네가 좋아.”
앉아 있는 요한을 확 끌어안아 볼에 쪽 뽀뽀했다.
“재판이 다 끝난 뒤 너랑 진정한 부부가 되고 싶어.”
요한이 잠깐 멍하니 굳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그가 입술을 몇 번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확 끌어당겨 깊숙이 키스했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였다.
숨을 다 빼앗을 것처럼 흉포하게 나를 탐하던 그가 입술을 떼고 말했다.
“당장 다 끝내놔야겠네.”
***
황후는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은밀히 내게 초대장을 보냈다.
‘이럴 줄 알았지.’
자신의 약점을 잡고 있는 상대가 가만히 있으니 얼마나 불안했겠어. 비밀스럽게 부른 바람에 안내인에게 위치만 전달받고 움직이게 됐다.
‘제가 같이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황후가 궁에 무슨 술수를 써뒀을지 몰라요.’
‘그래도 대놓고 호위가 붙는 건 황후에게 협박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고민 끝에 베티가 비밀 호위로 붙어 멀찍이 떨어져 나를 호위하기로 했다.
황후궁으로 들어가는 근처에는 신성한 정원이 있다. 아테아 신의 신상과 함께 꾸며놓은 정원이다.
‘시몬 추기경?’
그중 한 신상 앞에 시몬 추기경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상대하면 귀찮을 테니 못 본 척 지나가자.’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느새 눈을 뜬 시몬 추기경이 나를 불렀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선 웬일입니까?”
“잠시 볼일이 있어 지나가던 길이에요.”
“황궁에 볼일이라…… 그러시겠지요.”
시몬 추기경 뒤쪽으로 검은빛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시몬 추기경이 아니라 신상 안에서 느껴졌다.
‘저건 뭐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시몬 추기경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는 아테아 신을 믿으십니까?”
“네.”
제국민이 다 아테아 신을 믿듯 나도 아테아 신도긴 했다. 믿음이 없는 거랑 별개로.
“그런 분이 어찌하여 성녀님을 배척하려 하십니까?”
“성녀님 쪽에서 먼저 저를 배척하신 건데요?”
“공작 부인께 어떤 문제가 있어서 성녀님께서 나서셨다고는 생각 안 하십니까?”
시몬 추기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익숙하게 나를 또 악녀로 몰아가는 건가 싶었는데, 어쩐지 그의 얼굴이 이상했다.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지?’
자세히 보니 긴 신관복 아래로 내린 손도 주먹을 쥔 채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게 좀 신기해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믿으세요?”
“그러면 제가 성녀님을 불신한단 말입니까?”
“그 대답은 시몬 추기경님께서 가장 잘 아시겠죠. 제가 뭘 알겠어요.”
시몬 추기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신상 안에 있던 검은빛이 더 진해졌다. 나는 시몬 추기경을 지나치며 신상을 향해 걸어갔다.
‘검은색으로 된 뭔가를 본다면, 파헤쳐 봐라. 네 저주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저주와 관련되어 있다면,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추기경 앞에서 일을 벌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시몬 추기경이 내게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시려는-”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면요.”
나는 시몬 추기경을 돌아보는 대신, 신상 속의 검은빛을 주시했다.
“시몬 추기경은 성녀를 믿는 건가요, 아테아 신을 믿는 건가요?”
“갑자기 왜 그런-”
“이상한 게 보여서요.”
검지로 신상의 가슴팍 부근을 쿡 찔렀다.
쿠르륵-
신상의 검은빛이 사그라들며 부서졌다. 부서진 자리에는 웬 문양이 남겨져 있었다.
‘이거, 황태자가 있던 그 결계에서 본 거 같은데.’
“……말도 안 됩니다.”
시몬 추기경은 하얗게 질린 채 내게 물었다.
“왜, 왜 아테아 님의 신상에서 저런 부정한 무언가가…….”
“저도 모르죠. 이상한 게 보여서 건드려봤을 뿐인걸요.”
거칠게 호흡을 들썩이던 시몬 추기경이 물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꾸민 짓 아닙니까?”
“이 신상 앞에 서 있던 건 시몬 추기경님 아니셨어요?”
이 주변에는 다른 신상도 있다.
“그건…….”
시몬 추기경은 더 변명하지 못했다. 그는 의심 많고 똑똑한 사람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나는 충격받아 털썩 주저앉은 추기경을 내버려 두고 황후궁으로 움직였다.
‘이러다 지각하면 난리 나겠는데.’
***
시몬 추기경은 에스텔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테아 신상에서 저런 부정한 것이 나왔지?’
아테아 신상은 모두 성국에서 제작된다. 그러니 하자 있는 제품이 들어올 여지는 없다. 그것이 황궁의 정원이라면 더더욱.
‘거기다 방금 그 모습.’
아테아 신상을 건드리던 에스텔.
무너지는 아테아 신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던 에스텔에게서는 고귀함과 함께 신성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왜 저분이 성녀처럼 느껴지지?’
심지어 스텔라 성녀에게서 느껴졌던 그 신성력과 비교되어 더 기묘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틀림없는 진실이 그의 뇌리에 박혔다. 에스텔이 성녀인지 아닌지를 제외하고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
스텔라 성녀는 이상하다.
그런 스텔라를 싸고도는 성황도 마찬가지다. 교리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행동이었다.
‘정작 악녀라고 소문난 블란쳇 공작 부인이…….’
시몬이 고뇌에 찬 눈빛으로 아테아 조각상을 내려다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서진 아테아 신상의 얼굴만은 멀쩡했다.
참 기묘한 일이었다.
아테아 신상은 기본적으로 신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데 부서져 나뒹구는 신상이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몬의 길을 응원한다는 듯이.
***
황후는 블란쳇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속셈이지?’
온갖 악소문을 몰고 다녔던 악녀. 얼굴만 예쁜 어리석은 입양아. 이제는 다른 평가도 뒤따르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모두가 이 여자를 주목하고 있다.
‘또 무슨 무기로 나를 협박하려고…….’
본래 수 싸움에 능하지 못한 황후가 이를 아득 갈며 말했다.
“황태자는 내 선에서 막을 수 있지만, 정화 의식 무도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네. 최대한 축소하려는 해도-”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에스텔이 화사하게 웃었다.
“무도회를 더 크고 성대하게 열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그 자리에 참석해서 성녀의 위대함을 알 수 있도록.”
그건 황후가 예상하지 못한 대응이다.
‘성녀의 명예가 올라가면 블란쳇 공작 부인이 곤란해질 텐데?’
에스텔은 그런 황후를 보며 빙긋 웃을 뿐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황후가 에스텔의 속내를 알아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애초에 에스텔의 목적은 성녀의 빠른 몰락이 아니다.
‘어쩌면 스텔라 성녀가 내게 저주를 건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지금 에스텔이 해야 할 건 하나다. 스텔라 성녀가 더욱 빛나게 해서, 더 경솔한 짓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
“황후 폐하께선 성녀님께서 정화 의식을 잘 치를 수 있게 도와주시면 돼요.”
다음 날, 정화 의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