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아기 갖자
(110/182)
110화 아기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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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아기 갖자
2022.12.20.
블란쳇 공작저에 돌아오자마자 페트리샤에게 황후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도대체 리베르탄 공작가와 옥쇄 사이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거지?’
황후가 황태자한테 화내던 것을 보면 꽤 중요한 비밀인 것 같은데. 화실에 올라가는 동안 나무들이 재잘재잘 말을 걸었다.
-바로 화실에 올라갈 거냐?
“네. 지금 룬도 자고 있을 때니까요.”
-황궁에서 돌아올 때면 거의 항상 화실로 들어가는구나. 진짜 마음에 드는가 보네.
-남편이 선물해 준 거잖아. 어련히 마음에 들겠어?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요한과 관련된 일이면 언제나 부정적으로 봤던 나무들도 화실과 관련해서는 좋은 평만 남겼다.
“그거보다는 이시도르 씨를 만나서 요정의 힘 얘기를 하려고 가는 거거든요.”
나는 요한이 만들어준 화실의 분위기가 좋다. 혼자 화실에 앉아 바깥을 보고 있으면, 이대로 가만히 푹 쉬고 있어도 될 것만 같으니까.
하지만 그것 말고도 화실은 쓰임새가 제법 많다.
‘나와 요한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니까.’
요정의 힘을 훈련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은 없었다.
“그럼 전 이시도르 씨를 보러 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온 난리를 쳐서라도 저 깨워주셔야 해요.”
화실에 장식처럼 달아둔 태피스트리를 잡아 들고 익숙하게 찢었다. 태피스트리에서 나온 빛이 나를 감싼다고 느낀 순간,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푸른색 장미 꽃잎이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에덴 로즈?’
푸른 잔디밭이 깔려 있던 곳에선 익숙한 에덴 로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왔느냐.”
이시도르가 팔짱을 낀 채 성큼 다가왔다.
“저번에 준 과제는 잘했고?”
“네. 여기에서 연습한 대로 쉽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요정의 힘으로 보고 있는 물건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어요!”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군.”
“그런데 여기 에덴 로즈는 뭐예요. 원래는 다른 꽃들이 피어 있지 않았어요?”
이시도르는 푸른 에덴 로즈를 보며 말했다.
“여기 핀 에덴 로즈는 다 네 힘으로 생겨난 것들이다.”
“……제힘으로 핀 거라고요? 제가 여기에서 힘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요?”
“아무래도 네가 여기를 자주 드나들면서 네 힘에 영향을 받아 그런 듯하다. 그렇다는 건.”
뭔가를 말하려던 이시도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무에 손을 얻었다. 항상 이시도르보다 더 열심히 떠들던 나무가 유난히 조용했다.
“나무분은 주무시는 건가요?”
“아니. 사라진 거다.”
“네?”
“이 녀석은 나와 달리 자신의 힘으로 이곳에 있던 게 아니니까.”
이시도르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눈빛에선 슬픔이 느껴졌다.
“그러면 이시도르 씨는 계속 혼자 계셨던 거예요?”
“시끄럽게 하는 녀석이 없어서 쉬는 데는 참 좋았지.”
이시도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나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에덴 로즈 사이에 있는 나를 담았다.
“너는 에덴 로즈에 어떤 힘이 있는지 아느냐?”
“……그냥 희귀한 꽃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네가 아는 대로 그저 희귀한 꽃이긴 하다. 하지만 본래 에덴 로즈는 신의 눈물이 떨어져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담긴 꽃이다. 그만큼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어떤 힘이 있었는데요?”
“소망을 이루는 힘. 극히 드물지만, 아주 간절한 소망을 꽃에 담는다면 이루기 힘든 기적을 이뤄준다고 한다.”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기운이 빠졌다.
“에이, 그냥 전설이잖아요. 거기다 지금 에덴 로즈는 그런 능력이 없다면서요.”
“네가 피워낸 에덴 로즈는 과거의 에덴 로즈와 같은 꽃이다.”
새삼 내가 피워낸 에덴 로즈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러면 내가 정원에서 에덴 로즈를 피워낸 것에도 이유가 있는 걸까?’
“물론 요정의 힘을 다 붓는다고, 간절한 소원을 빈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요정의 힘을 강하게 발현시켜 주는 데 그친다고 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시드로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네게 필요한 일일 것 같아 꼭 말해주고 싶었다.”
이시도르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 흔들렸다. 가끔 이시도르는 내 미래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조언을 남기고는 했다.
“알았어요, 꼭 알아둘게요.”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시드로가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상대가 숨기려는 진실을 물건이 아니라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더 확실하게라면, 어떤 식으로?”
“여태 저는 약점을 표현하는 물건을 보면서 알아서 추리할 수밖에 없었잖아요. 그런 식으로 단서를 보는 거 말고, 아예 그 상황을 본다든지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이시드로가 눈가를 찌푸렸다.
“네 능력이 조금 더 성장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 당장으로는 네 몸이 버텨주지 못-”
그때 온몸이 바짝 긴장하며, 이상한 기류가 감지됐다.
“……끄응.”
멀리서 익숙한 아기 소리가 났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나?’
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공중에서 낯익은 아기가 보였다. 룬은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기어오고 있었다.
열중하느라 인상 쓰고 있던 룬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스테리!”
“……룬?”
“스테리! 룽 와쏘요!”
한달음에 나한테 달려온 룬이 내 품에 폭 안겼다.
“룬, 언제 말할 수 있게 됐어?”
“쪼꿈?”
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물오물 말했다.
“그런데 왜 그동안 말 안 하고 있었어?”
“말해쏘! 말해눈데 스테리 못 들어쏘!”
“그 애는…….”
뒤돌아보니, 이시드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가 룬을 골똘히 보고 있었다.
“아, 정령 아기인 룬이라고 해요. 운디네 티어의-”
“알고 있다. 너와 연결된 정령이라서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룬은 낯선 남자인 이시도르를 보고 놀랐는지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시도르가 말했다.
“잠시 내가 그 애를 안아봐도 되겠나?”
“룬을요?”
“지금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러자 룬은 눈을 댕그랗게 떴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거부 의사를 표했다.
“저 아찌 시로.”
룬이 대놓고 누구를 싫어한 건 처음이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물론 자세히 룬의 눈빛을 보니 적대적인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뾰로통하게 삐진 느낌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룬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룬이 싫어해서 안 될 것 같아요.”
“흠, 그런가.”
이시드로는 제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면 네가 네 힘으로 조심스럽게 그 애를 감싸 봐라.”
“제 기운으로요?”
“그래. 네 기운이 닿아 만들어진 정령이라, 어쩌면 부작용 없이 네 힘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룬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조심스럽게 룬의 허락을 구했다.
“룬. 나 좀 도와줄래?”
“쪼아!”
말랑말랑한 룬의 볼살을 장난스럽게 한 번 꼬집어주며, 익숙하게 요정의 힘을 꺼냈다.
‘오늘은 평소랑 느낌이 좀 다르네.’
아까 에덴 로즈 얘기를 들어서일까, 무형의 기운처럼 느껴졌던 요정의 힘이 수많은 장미꽃잎처럼 느껴졌다.
‘아주 조심스럽게.’
룬은 아기 정령이니까 작은 힘에도 다칠 수 있다. 장미 꽃잎으로 아기의 볼을 감싸주듯 천천히 요정의 기운으로 보듬어주었다.
“우우웅…….”
룬이 새 부리처럼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며 두 눈을 꼭 감았다.
그 순간, 내 안의 수많은 장미가 일시에 개화하는 감각과 함께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 로자리아 리베르탄 공작 부인이 황후를 앞에 두고 요요하게 웃었다.
[황후 폐하, 여기 옥쇄입니다.]
황후는 로자리아가 앞에 둔 옥쇄를 보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옥쇄를 제가 잡았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긴다거나, 황제 폐하께서 바로 안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죠?]
황후는 맹수에게 쫓기는 사냥감처럼 움츠러든 채 로자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로자리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이제 와 그런 약한 소리를 하실 건가요? 황제 폐하로부터 황후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약점을 가지고 싶다고 제게 부탁하셨던 건 황후 폐하세요.]
[…….]
[지금이라도 물러나고 싶으시다면, 물러나셔도 돼요. 하지만 이것만 알아두세요. 서로 손잡을 수 없는 사이라면, 저희 역시 황후 폐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걸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을 뿐이에요.]
황후가 굳은 얼굴로 옥쇄를 잡았다.
[저도 알아요, 이 이상 뒤는 없을 거라는 거.]
황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빛바랜 옥쇄를 바라본 황후가 의미 모를 미소를 옅게 지었다.
[참 우습죠, 이 작은 옥쇄가, 황가가 부정하게 악마와 거래했다는 증거라니.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이것 하나 없애지 못해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게…….]
***
스텔라는 차분하게 신전의 방에 앉아 있었다.
“성녀님.”
“시몬, 무슨 일이에요?”
흰 드레스를 입은 스텔라는 고귀한 성녀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시몬 추기경은 그간 무수히 많은 사고에도 왜 성국 내에서 성녀의 지위가 공고한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스텔라를 의심하기엔, 그녀는 너무나 고귀해 보였기 때문이다. 시몬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스텔라가 아미를 찡그리며 시몬 추기경을 걱정했다.
“무슨 큰 문제라도 있나요?”
“성국에서 보호하던 성물이 전부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성물이요?”
“예. 어떤 무도한 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심상치 않은 힘을 가진 자인 듯하니 성녀님께서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스텔라는 성녀로서 몸에 항상 성물 팔찌를 지니고 있었다.
“세상에. 도대체 누가, 왜 성물을 훔친 걸까요?”
“이유는 모릅니다. 하나 아테아 신의 축복을 이행할 수 있는 성물이 전부 도난된 적은 처음이기에 모두 최선을 다해 범인을 추적 중입니다.”
스텔라가 긴 속눈썹을 팔랑이며 제 성물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이것이 아테아 신께서 내린 기회일지도요.”
“예?”
무언가 의미심장한 스텔라의 말에 시몬이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아, 아테아 신께서 저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내린 시련이라 했어요. 지금 이 힘든 시련도 저희의 신앙을 증명하는 길이 될 거예요.”
시몬 추기경은 말간 표정의 스텔라를 보며 의문에 잠겼다.
‘정말인가?’
스텔라의 말은 전혀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시몬은 성물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성녀의 행동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때 시몬은 블란쳇 공작가의 보좌관, 에리히가 보낸 밀서가 떠올랐다.
바로 불사르려다 찜찜한 기분에 머리맡에 숨겨둔 그 밀서, 왜인지 그 밀서를 봐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화실에서 내려가자, 침실에서 요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은 <아름다운 괴물> 몇 장을 펼쳐보다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책 다 읽어봤어?”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의미 모를 감정이 어려 있었다.
“천천히 읽느라 아직 끝까지 다 못 읽었어.”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아니고?”
요한이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림도 예쁘고 괜찮았어. 내용도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았고.”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나는…….”
읽다 말았던 부분 중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턱, 생각났다. 따로 지어내기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겉보기엔 괴물과 인간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
“신기하네. 어째서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지?”
“그냥, 보통 괴물 하면 생각하는 이미지랑은 많이 다르니까. 이 작가가 왜 괴물을 이렇게 아름답고, 비밀만 감추면 인간과 다를 바 없게 만들었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이상하게 입이 말랐다.
“어쩌면 지금 우리 곁에도 괴물이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아름다운 괴물이?”
“응. 그런 괴물이.”
요한이 <아름다운 괴물> 그림을 검지로 짚었다. 금발 벽안의 왕자님처럼 생긴 그림. 요한은 왕자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넌 내가 괴물이어도 괜찮겠어?”
“상관없어.”
요한과 내 얼굴이 바짝 붙었다. 나는 손을 꾹 쥐며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은 내가 괴물이어도 괜찮겠어?”
“나야말로 상관없지.”
요한이 픽 웃으며 제 앞에 서 있던 나를 휙 끌어당겼다. 그가 침대에 풀썩 쓰러진 나를 감상하듯 쭉 훑어내렸다.
그가 손을 뻗어 제 아래에 깔린 내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요한의 온기가 묘한 긴장을 일으켰다. 마침내 그의 엄지가 내 입술을 문지른 순간, 그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에스텔, 우리 아기 가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