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무도회의 파트너 (109/182)


109화 무도회의 파트너
2022.12.16.



 
성녀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가득한 그때에도 제국의 수도에선 연이어 파티가 열렸다. 아무리 큰 사고가 벌어졌어도, 사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즌을 날릴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날이었다.


“여러분께 아주 특별한 손님을 소개해 드릴까 해요.”

황실 재판으로 근신 중이던 성녀가 돌연 파티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녀답게 소박한 흰 드레스를 입은 성녀는 무척 가녀려 보였다. 파트너 없이 홀로 나온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제가 이런 자리에 참석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급히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얘기가 생각나 부득이하게 파티에 참석하게 됐어요.”

스텔라는 친분 있던 귀족들에게 사근사근 웃었다.


“제가 3일 뒤 페스칼로스 숲에서 정화 의식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정화 의식을…… 하신단 말입니까?”

“네. 그래서 여러분께서 페스칼로스 숲에서 저와 함께 기도해 주셨으면 해요. 모두의 기도가 닿을 때 아테아 신께서 더 기쁘게 축복을 내려주실 테니까요.”

현재 재판 중인 성녀는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하물며 그 재판이 황실 재판에,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니 정화 의식이고 뭐고 할 때가 아니었다.

물론 한 귀족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재판 중인데 괜찮으십니까?”

“아, 그거요.”

해사하게 웃던 성녀의 얼굴에 슬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녀는 이내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현재 황실 재판은 제게 무리라고 판단하신 황제 폐하께서 재판을 무기한 연기해 주셨어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폐하께서 저를 믿어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은근히 황제의 총애를 강조한 스텔라가 고상하게 두 손을 모으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황제 폐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정화 의식을 반드시 성공시키겠어요.”

 

***

나는 로이엄 왕국의 파티에 참석했다. 다이아나 공주 때문에 인망을 잃은 로이엄 왕국을 지지하는 의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제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사벨라 왕비는 그런 나를 환대해 줬다.


‘안색이 안 좋으시네.’

다이아나 공주가 안전하게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는 하나, 어쨌거나 공주로서의 지위도 잃고 도망친 상황이다.


‘속이 말이 아니시겠지.’

“아니에요. 그보다 다이아나 공주 일은…….”

“괜찮습니다. 그나마 공작 부인의 호의가 있었기에 저희가 안전할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이사벨라 왕비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요한이 자세한 상황을 말해주지 않은 탓에 나도 다이아나가 걱정되기는 했다. 이사벨라 왕비님이 내게 와인잔을 건네며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최근 잘 지내시는지요?”

“저야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정화 의식이 재개되어 황궁에 다시 들어갔지요.”

성녀와 황제 사이에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곧 정화 의식을 치르게 되어 우리는 다시 황궁에 묵게 되었다.


‘이쯤 되니 그 정화 의식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기대되네.’

물론 정화 의식을 치른 후 성녀가 기세등등할 걸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이사벨라 왕비님에게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고민 많은 그녀에게 새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혹시 <아름다운 괴물>이라는 책 읽어보신 적 있으세요? 최근 전 그 책을 자주 읽고 있어요.”

“아아, 수도에서 아름다운 그림으로 인기 있는 작품이지요.”

이사벨라 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살롱에서 그 책을 주제로 토론도 벌인다더군요.”

“정말요?”

“예. 그 책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공작 부인도 토론에 참가해 보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생각보다 많은 이야깃거리가-”

이사벨라 왕비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검지로 옆머리를 누르던 그녀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연회를 준비하느라 날을 샜더니 두통이 오는군요. 잠시 약을 먹고 오겠습니다.”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손님께 더 폐를 끼칠 순 없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의사를 만나러 가는 이사벨라 왕비는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최대한 빨리 다이아나 공주 소식을 알려드려야겠어.’

그렇게 홀로 파티의 벽에 붙어서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한 시종이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실례합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 귀한 분께서 공작 부인을 뵙기를 원하십니다.”

“귀한 분이요?”

“예. 우연한 기회에 찾아뵙기를 청하셨는데, 어찌하실는지요?”

공작 부인인 나한테 귀한 사람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황족.’

하지만 황태자 카를로스가 이런 식으로 예의를 갖춰서 나를 부를 리 없으니 부를 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다.

황제나 황후.


‘어느 쪽이든 이상하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종을 따라 움직였다. 상대는 로이엄 왕국에서 준비한 연회의 손님방 하나를 차지한 모양이다.


“폐하, 블란쳇 공작 부인을 모셔왔습니다.”

“들라 하라.”

안으로 들어가자, 붉은색 커튼이 쳐진 가운데 소박한 인상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황후가 맞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유약한 인상의 황후는 역대 황후 중 가장 뒤떨어진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다.


‘사교 활동도 전혀 안 해고 황궁에서만 없는 듯 살아서, 언젠가 쫓겨날 황후라는 얘기도 있지.’

하지만 그래도 황후는 황후인지 기품과 위엄이 있었다. 황후가 오만하게 나를 훑어내린 뒤, 천천히 말했다.


“갑작스러운 청에 응해주어 고마워요, 블란쳇 공작 부인.”

“아닙니다, 폐하.”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이제 황후와 나, 단둘만 남았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잠깐 차를 들겠어요?”

황후가 제 앞에 놓여져 있는 찻잔을 향해 눈짓했다. 나는 황후의 말대로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미리 차도 다 따라놓은 상태네.’

공식 장소도 아닌 남의 파티에서 갑작스럽게 초대하고, 식은 차를 내놓는 것. 이건 공작 부인인 나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아무래도 날 한 번 누르려는 모양이네.’

권위의식 없는 소탈한 황후라는 평이 의문스러워지는 행동이다.


“황태자가 블란쳇 공작 부인과 제법 연이 있는 사이지요?”

“조금은요.”

“나 역시 황태자가 경솔한 성미를 지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공작 부인.”

황후가 적대감 어린 시선을 띤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난 그래도 공작 부인이 조금 더 지위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요. 요컨대, 처녀 시절과는 다른 모습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 거지요.”

나는 차에 손을 대지 않고 물끄러미 황후를 바라봤다.


‘황태자 때문에 나를 부른 거였군.’

황태자가 어떻게 그리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지 궁금했는데, 그 궁금증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아닌 척해도 황후가 뒷수습을 해준 것 같다.


‘알아서 속사정을 다 까발려줘서 편하네.’

황후가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작 부인, 내 말 이해하겠나요?”

그때 황후의 팔 언저리에서 낯에 익은 무언가가 보였다.


‘팔찌? 아닌데…….’

묘하게 신경 쓰이는 느낌에 나는 테이블 아래 내려놓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요정의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는 거랬나?’

최근 나는 이시도르에게 요정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커졌다. 심장 근처에서 꽁꽁 싸여 있던 무언가가 내 의지를 따라 슬그머니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하면 내가 보려고 했던 게 더 선명해진다고…….’

그러자 황후의 팔에서 보이던 물건에서 요정의 힘이 느껴지며 빛이 났다.


‘역시 황후의 약점이 맞았어. 그런데 저건…….’

황제의 낡은 옥쇄였다. 황제가 그토록 찾던 옥쇄, 아무리 봐도 저건 내가 황제와 거래했던 그 옥쇄였다.


‘저게 왜 황후의 약점으로 보이지?’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나무들에게 물었다.


-제가 요정의 힘을 맞게 썼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죠?

-엥,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래! 도대체 뭘 봤기에 그러느냐.

-아니, 지금 그게.

나무들에게 옥쇄에 대해 설명해 봐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다. 맞은 편의 황후가 찻잔을 들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압박했다.


“공작 부인,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요?”

-아니, 그게요.

“황실 옥쇄가.”

쨍그랑!


‘망했어!’

나무들하고 대화하느라 말이 헷갈렸다.

눈앞의 황후가 놀란 것처럼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서, 파르르 떨었다. 기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걸 어쩌지?’

파리하게 질린 얼굴의 황후는, 깨진 찻잔은 보지도 않고 나를 보며 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공작 부인이.”

“아, 그건.”

“지금 나를 협박하겠다는 건가요?”

황후가 위기에 몰린 사람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말실수라 둘러대기엔 늦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원래 내 목표가 그랬던 것처럼 행동하는 수밖에. 나는 이제야 찻잔을 들며 말했다.


“글쎄요.”

원래부터 이걸 노렸던 것처럼.


“그건 황후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에 달렸겠지요.”

“역시 리베르탄의 딸은 리베르탄의 딸이군요. 당신한테 그런 것까지 다 말할 줄 몰랐는데.”

황후가 참담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황후랑 리베르탄 사이에 뭔가가 있었나?’

아무튼 황실 옥쇄가 황후에게 엄청난 약점인 모양이다. 그것도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황후가 테이블을 꽉 쥐며 나를 노려봤다.


“당신이 바라는 걸 말해봐요.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어요?”

“저는 황후 폐하께 바라는 게 없어요.”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요?”

황후의 갈색 눈에 분기가 서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비밀’을 꺼낼 리 없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더 끌지 말고 솔직하게 공작 부인의 요구 사항을 말해요.”

겁에 질린 황후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진짠데.’

하지만 황후는 내 목적을 듣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있어 보이게, 약간 요한처럼.’

나는 최대한 흑막 요한의 모습을 떠올리며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무엇을 바랄 것 같나요?”

 

***

덜컹, 마차가 흔들렸다.

마차에 앉아 있던 황태자 카를로스가 성녀를 떠올리며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 부인을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성녀가 그런 행동을 해도 되나?’


‘전 단지 올바른 인연이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에요. 모든 것은 아테아 신의 뜻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것과 달리 성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방해가 됐다.

그런 주제에 성녀는 황태자를 무시하고, 정화 의식을 담보로 황제와 단둘이 거래한 듯했다.


‘너를 황태자 자리에 계속 둬야 할지 모르겠구나. 대신들이 모두 네 부덕을 경고하고 있다.’


‘……아버지!’


‘한 번만 더 경솔하게 행동하면, 너는 더 이상 황태자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될 거다.’

여태 황태자 자리를 항상 유지할 수 있게 해주던 황제의 마음도 돌아선 듯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큰 위기가 될 줄 몰랐다.


‘다행히 어머니가 나서주신다고 했다.’

황후가 로이엄 국왕 대리와 거래하면, 카를로스도 운신하기 더 편해지리라. 카를로스는 파티홀에 도착해 바로 황후를 찾았다.


“어머니, 로이엄 왕국과는 얘기를 잘 -”

카를로스의 금안이 흠칫 떨렸다. 황후의 앞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여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텔?”

“그만!”

그때 황후가 카를로스에게 날카롭게 외쳤다.


“황태자, 지금 제정신입니까?”

“예?”

“이 어미는 보이지도 않습니까?”

황후는 분노한 얼굴로 카를로스를 꾸중했다. 카를로스는 생전 처음 겪는 황후의 반응에 당황했다.


“아니,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있어 놀랐을 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또 공작 부인께 무도하게 굴려 했던 거 이 어미도 다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지금 왜 이러시는-”

“태자의 어미로서 태자의 잘못을 수습하러 왔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겠어요.”

황후가 카를로스의 말은 듣지도 않고 에스텔을 보며 말했다.


“공작 부인, 내 아들이 저지른 죄는 어미의 죄입니다. 그간 저질렀던 일에 대해선 폐하께 말씀드려 큰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황태자는 ‘어머니!’ 하고 황후를 부르더니 이를 꽉 깨물고 황급히 황후를 쫓아갔다.

혼자 남은 에스텔이 기지개를 켰다.


‘황후가 갑자기 행동하는 이유는 하나겠지?’

아무래도 황태자를 알아서 막아주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 대충 반응을 보아하니, 황태자는 이번 정화 의식까지 못 움직일 듯싶다.


‘그러고 보니 이번 성녀 무도회 파트너는 황태자였잖아?’

그런데 지금 황태자는 파티에 참석할 처지가 아니다. 자기 자리 지키기도 바쁠 테니까.


‘그러면 성녀는 누구랑 파트너를 하지?’

혼자 입장하게 만들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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