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복수하고 싶지 않나?
(108/182)
108화 복수하고 싶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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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복수하고 싶지 않나?
2022.12.13.
나는 요한의 품에 안긴 채 내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가리고 있어야 돼?”
“쉿.”
요한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달라붙었다.
“잘하고 있어, 조금만 참아봐.”
그윽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인지 묘하게 긴장이 됐다.
‘아니,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런가.’
살갗이 바짝 긴장하며, 주변의 변화를 어떻게든 감지하려고 했다. 계단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요한의 심장 뛰는 소리가 겹쳐졌다.
‘계속 올라가네.’
이렇게까지 올라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지.’
오늘 아침 식사를 하며, 요한은 갑자기 나한테 보여줄 게 있다면서 눈을 가리게 했다. 아무래도 황궁에서 준비했다고 말했던 건가 보다.
‘요한이 준비를 할 정도면 꽤 큰 걸 텐데.’
요즘 나는 탈출 준비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자금을 모을 수 있을 때 모아야 하겠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붕 떠서 준비가 더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 더 준비할 게 없어서 그런가?’
완벽하진 않더라도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
‘그리고 별로 떠나고 싶지 않아.’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던 나는 이제 그 준비 자체가 불편해졌다. 이렇게 준비를 하다가 괜히 요한의 불신을 사게 될 것이 두려워져서.
그때 요한의 발걸음이 멈췄다.
요한이 천천히 나를 내려주었다. 자연스럽게 눈에서 손을 떼려고 하는데 요한이 한 손으로 내 얼굴 전체를 가려버렸다.
“아직 뜨라고 안 했어.”
엄격함이 실린 목소리다.
“아, 알았어. 그러면 언제 뜨면 돼?”
“계속 감고 있어. 내가 천천히 문 열어줄게.”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내가 아는 블란쳇 공작저일 텐데, 시야가 제한된 것만으로도 괜히 낯설고 긴장됐다.
“됐어. 이제 눈 떠.”
요한이 내 얼굴에서 손을 치우고,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아.”
쨍쨍한 햇살이 잘 들어오는 방이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소품들과 가운데에 놓여져 있는 이젤과 여러 가지 그림 도구들. 특이한 게 있다면, 창문이 아주 크다는 거였다.
‘이런 방이 있었나?’
나는 걸음을 옮겨 창가 가까이 다가갔다. 평범하게 투명한 창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손을 대보니까 마법으로 만든 장치였다.
‘공작 저택이…… 아래에 있어?’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볼이 붉어졌다. 구름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저 멀리 황궁도 보이네.’
요한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에 들어?”
“응. 너무 예뻐.”
저택에서 노을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공중에 떠서 노을을 보고 있자니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손에 닿을 듯한 구름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만든 거야?”
“여긴 저택에서 이어져 있는 이공간 같은 거야. 네가 그림 그리고 싶을 때마다 들어오면 좋을 것 같아서 만들었어.”
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마법으로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화실은 왜?”
“옛날 네 취미가 그림 그리기였다고 들어서.”
갑자기 들어온 리베르탄 시절의 이야기가 심장을 관통했다.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아니야?”
“아니. 맞아. 심심할 때마다 그림을 그렸어.”
새삼 내가 얼마나 리베르탄을 잊고 있었는지 실감 났다. 그림을 그렸던 일이 그렇게나 먼 추억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천함과 고귀함은 내면에서부터 드러나는 겁니다. 교양은 조금이나마 아가씨의 천박한 피를 가려줄 겁니다.’
‘능숙하게 그림만 그릴 수 있다고 다가 아니에요. 내면의 수양을 쌓아야 하는 겁니다!’
솔직히 난 그때 배운 수 놓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라면 다르겠지.’
블란쳇 공작가엔 내 그림을 보고 왈가왈부할 사람이 없다. 감시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 정 불편하면 편히 그리고 처분하면 된다.
‘요한이 준비해 줬는데 마음 편하게 먹자.’
내가 화구를 구경하는 사이, 요한이 어딘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게 취미 아니었어?”
“아니야, 맞아. 그냥 이렇게 화구를 본 게 오랜만이라.”
하지만 여전히 요한의 눈빛은 밝아지지 않았다.
‘선물인데 더 좋아했어야 했나?’
요즘 선물 받는 데 익숙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더 신나는 모습을 보여야-
“그러고 보니 네가 지내면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없었어?”
“응?”
“생각해 보니 혼자 블란쳇 공작저에 와서 외로웠을 것 같아서.”
요한이 미간을 좁히며 내게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미안해. 내가 진작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니. 아무도 안 따라와서 좋았는데.
‘리베르탄 사람이 붙었다가 또 무슨 일을 겪으려고…….’
하지만 요한은 내 눈빛을 보고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다. 그가 관자놀이 부근을 짓누르며 목소리를 깔았다.
“충분히 잘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부족한 게 많았어.”
“아니야. 요한이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애달파 보였다.
“왜?”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선 죄책감이 느껴졌다.
“네가 모른다고 해서 내 죄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진중한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나한테 무슨 죄를 저질렀는데?”
“……그건.”
“요한은 나한테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어. 항상 나를 기쁘게 해줬는걸. 네가 있어서 나는 늘 행복했어.”
“…….”
“내가 모르는 어떤 게 있는 거야?”
온몸이 긴장했다.
‘솔직하게 말해줘.’
붉은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아주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요한은……
“널 키워줬던 리베르탄 공작가를 무너뜨린 게 나잖아.”
“아…….”
“그래서 미안해서 그러지.”
요한은 평소처럼 아주 근사하게 웃었다.
다정하고, 멋있고, 근사하고, 누구나 반할 정도로 매력적인 요한. 갑자기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게 힘들어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이 책은 뭐야? 아름다운 괴물?”
“아, 요즘 수도에서 잘 팔리는 책이래.”
요한이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림이 아름다운 걸로 유명해서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화려한 정원 문 근처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반짝거리는 색이 입혀져 있는 화려한 책이었다.
<아름다운 괴물>
“무슨 내용이야?”
“그건 직접 읽어봐. 나도 봤는데 꽤 재밌더라.”
***
루이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아, 아버지…….”
풍족하고 아름다운 집, 엄하지만 무남독녀인 자신을 아껴주는 아버지, 귀족답게 품위 있고 상냥하던 어머니.
그것이 루이지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세상이 완전히 무너졌다. 코끝을 채우는 피비린내, 소름 끼칠 정도로 적막한 실내.
오만한 대귀족인 아버지가 의자에 앉는 대신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루이지가 불러도 노예처럼 숨을 죽이고만 있었다.
‘저건…….’
바닥에 흐르고 있는 핏자국과 익숙한 얼굴의 시신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아버지의 집무실 의자가 빙글 돌며 등을 돌리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퇴폐적이고 나른한 인상이 느껴지는 미남, 블란쳇 공작이었다.
요한이 검지로 팔걸이를 툭, 치며 말했다.
“내 경고를 우습게 보면 곤란하다고.”
루이지는 다리가 풀려 풀썩 무릎을 꿇었다.
“다, 당신이 아무리 공작이라도 이렇게 남의 사용인을 아무 죄 없이 죽일 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조롱조차 섞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디 한번 나서 보든가.”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없는 죄도 만들 수 있는 절대 권력자 특유의 오만함. 그리고 그것은 루이지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성녀와 황태자의 협박에 정신을 놓았나 봐요. 결코 블란쳇 공작님을 무시한 건 아니었어요.”
“아니지.”
“그, 그러면…….”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굳은 피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네 죄가 무엇인지 모르나?”
“고, 공작님을 배신하고 공작 부인을 음해하는 데 가담-”
“아아, 그것도 맞긴 해.”
요한이 픽 웃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네가 내 부인을 아프게 했단 거야.”
“…….”
“주제도 모르고.”
진득한 살기가 루이지의 온몸을 찢어놓을 듯이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루이지는 바닥을 짚은 채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무서워!’
리베르탄 공작가가 멸문당했을 때, 몇몇 호사가가 블란쳇 공작이 피를 몰고 다니는 괴물이라고 벌벌 떨고는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묻혔다.
블란쳇 공작은 괴물이라기엔, 너무 근사한 남자였기 때문에.
루이지 역시 그렇게 생각한 사람 중 하나였다.
‘나를 죽일지도 몰라.’
어째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을까. 저 남자는 평범한 인간이 게 아니다. 인간이 저런 눈빛으로 사람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요한이 팔걸이에 턱을 괴며 느릿하게 말했다.
“넌 이대로 내 손에 죽을 수도 있다. 어쩌면 더 모욕적이고 끔찍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지.”
“…….”
“하지만 이렇게 죽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나?”
루이지는 눈을 끔뻑였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자 요한의 입가에 실린 미소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처럼 매혹적인 미소였다.
“이대로 성녀는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멀쩡히 행복하게 살 텐데.”
“말도 안 돼요. 그럴 리가…….”
그러던 루이지가 멈칫 굳었다.
‘아니, 정말 그럴 거야.’
그녀가 위기에 몰렸을 때도, 성녀는 멀쩡했다. 황태자 카를로스가, 성국이 그녀가 곤란에 처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루이지는 무척 억울해졌다.
‘내가 성녀랑 뭐가 달라서?’
처음 루이지는 에스텔이 너무 미웠다. 그 천한 피가 설치고 다니는 꼴을 도저히 보고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홀로 고고한 성녀가 그 천한 에스텔보다 더 미웠다.
‘왜 나만 이렇게 된 거지?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루이지의 시선이 핏자국을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공평하지 않다. 최소한 자기와 함께 못된 짓을 저지른 성녀만큼은…….
“복수하고 싶지 않나?”
공허했던 루이지의 눈동자가 복수심에 잠겼다. 요한은 그런 루이지를 보며 냉소했다.
‘역시나.’
인간은 다 똑같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입은 피해만 생각하며 억울해한다. 남이 잘 되는 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론 딱 한 사람만은 달랐다.
‘오로지 너만…….’
아무리 더럽히려 해도, 복수심에 물들지 않고 고결한 건 에스텔뿐이었다.
***
나는 요한이 남기고 간 그림책을 읽었다.
<아름다운 괴물>이라는 제목답게 주인공은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그래서인지 괴물의 겉모습은 아주 멀쩡했다. 아니, 너무 근사해서 모두가 괴물이 괴물인지도 모르고 사랑했다.
하지만 괴물이 괴물인 이유는 간단했다.
괴물은 인간과 달리 죄를 지을 때마다 몸에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다행히 옷으로 가릴 수 있어 괴물은 인간 행세를 할 수 있기는 했다.
[괴물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졌습니다.]
괴물이 여자에게 물었다.
[내 신부여, 내가 괴물이라는 것을 알고도 나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나?]
[걱정 마세요.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여자는 자신만만했다. 그래서 괴물은 옷 속에 가려진 낙인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신부는 괴물의 낙인을 보자마자 소름 끼쳐 하며 도망쳤다.
괴물은 그런 신부를 보며 분노했다.
[배신자! 내가 괴물이어도 사랑한다고 했잖아!]
[이, 이렇게 끔찍한 걸 감추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차마 그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괴물의 몸에 새겨진 그 낙인이, 내 몸의 흉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너도 나를 이렇게 볼까?’
이상하게 손끝이 너무 차가워졌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아, 두 손을 꽉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요한, 사실 난 네가 알던 그런 애가 아니야.’
요한은 지금 내가 진짜라고 했다. 우습게도, 당장 그의 앞에 있는 나조차도 내가 꾸며낸 모습이다.
‘너는 그런 나를 보고도 지금처럼 나를 사랑해 줄까?’
무엇을 겪고도 변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건 오만일지도 모른다. 마음은 생각처럼 되는 게 아니니까.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이런 괴물이라고 말하지 않은 당신 잘못이라고요! 그러니까 배신당한 건 오히려 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