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블란쳇 공작님을 연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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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블란쳇 공작님을 연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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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블란쳇 공작님을 연모해요
2022.12.09.
황궁에서 벌어진 소란에 항의할 겸 나는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왔다. 황궁에서 오래 머물렀던 것도 아닌데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난 들어오자마자 흐드러지게 핀 장미 정원을 관리했다.
‘에덴 로즈와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아닌 게 아니라 나무들도 에덴 로즈가 내 힘에 의해 피어난 꽃이라 붙어 있을수록 좋다고 했다.
한창 에덴 로즈를 둘러보고 있는데, 베티가 황궁 소식을 물고 포르르 달려왔다.
“아직 성녀가 아프다고 드러누워 있대요.”
어제 들은 소식에서 바뀐 게 없는 모양이다.
“성녀는 갑자기 어디가 그렇게 아프대?”
“글쎄요.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는 않았고, 황궁 재판에 참석하기에는 기력이 너무 많이 쇠했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정화 의식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나 봐요.”
물론 성국 측에서 대놓고 이렇게 얘기한 건 아니다. 그건 황제한테 대놓고 싸우자는 거니까.
첫날에는 성녀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해 달라고 청하다가, 나중에는 성녀가 황제한테 ‘황궁 재판’ 때문인지 아프다고 편지까지 썼다고 한다.
요즘 더웠는데 날씨가 적당히 선선했다.
바람을 쐬던 내가 베티에게 물었다.
“베티, 넌 성녀가 진짜 아프다고 생각해?”
“에이, 당연히 거짓말이겠죠! 황제 폐하께서 황궁의를 붙여준다고 했는데 거절했잖아요. 진짜 아픈 거였다면, 황궁의를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다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바보도 많지 않아?”
“……가끔 그런 바보들과 함께 이 제국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뇌가 없는 신종 인류인 걸까요?”
가벼운 농담인 줄 알고 웃었는데, 베티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내가 눈동자를 굴리며 베티에게 말했다.
“신앙심이 너무 깊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치면 세상에 종교는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베티가 진지하게 말했다.
“요즘 성녀를 보고 있으면, 성국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니까요.”
“그 정도야?”
“성국 신관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저런 여자를 성녀라고 보내는 신이나, 무지성으로 모시고 사는 신관들이나 다 똑같이 느껴지는걸요.”
제국에서 아테아교는 아주 굳건한 종교다.
신도가 아닌 사람조차도 은연중에 믿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베티도 한때 아테아 신을 믿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되면 성녀도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는데.’
물론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예스텔라는 어떻게 성녀 스텔라가 된 걸까?’
나무나 이시도르에게 물어봐도 스텔라에 대한 부분만큼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애초에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부분이니까.
‘설마 내가 잘못 본 걸까?’
익숙한 자기부정이 들었지만, 나무들이 해줬던 말에 대해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네 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진실의 눈이다.
-아무리 믿기 어려워도, 네가 보고 있는 게 진짜다. 그걸 믿어야 돼.
그때는 참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나한테 참 필요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 정도로 살면 무슨 신통력이라도 생기는 걸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에덴 로즈를 만지며 베티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성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말을 하고 다니는지, 누구랑 무슨 일을 하는지 조사해줘.”
“네, 그럴게요.”
“이제 슬슬 안으로 들어갈까?”
나는 베티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베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마님, 지금 아기 공자님 보러 가시는 거죠?”
“응. 이제 일어날 때 됐잖아.”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 아기들과 비슷했지만, 정령 아기는 확실히 인간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정령 아기는 딱 하루에 한 시간 정도만 깨어 있고 대부분 잠을 잤다.
-자고 있을 땐 곁에서 누가 지켜봐 주기만 해도 돼. 정령을 누가 해칠 수 있겠니.
가끔 컨디션이 좋을 때는 간혹 몇 시간 더 깨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피곤해하는 게 느껴져서 잠을 재웠다.
최근에는 하녀들을 자주 봐서인지 이제 낯을 가리지도 않는다.
‘그게 아니었다면 맡기고 가지도 못했겠지만.’
방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를 보려고 했는데, 선객이 있었다.
요한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앉은 요한은 매끈한 정장을 입은 채 정령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냉미남이 아기와 함께 있는 모습이 근사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요한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걸친 채, 잠든 아기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요한은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아.’
어쩌면 지금 저 모습은, 냉혹한 흑막의 가면 아래에 감춰져 있던 그의 진짜 모습인 것 같았다. 블란쳇 공작가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가졌던 모습.
요한이 침대에 앉은 채 나를 보며 가볍게 한쪽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에스텔, 많이 놀란 표정이네.”
“그거야 요한이 지금 집에 있을 줄 몰랐으니까. 언제 온 거야?”
“방금 전에.”
요한은 길고 우아한 검지로 타이를 천천히 풀어냈다. 느슨해진 옷깃 사이로 남자다운 목울대가 드러났다.
“이제 우리 아기 깰 때가 된 것 같아서 바로 보러 왔지. 너도 이때쯤이면 여기에 있을 거고.”
“지금 성녀 때문에 정신없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정화 의식이 제국에 당장 해결되어야 할 문제 같은 건 아니었다. 페스칼로스 숲은 생존보다는 명예와 관련된 문제였으므로.
하지만 명예와 관련된 문제도 일정 이상을 넘어가면 아주 심각해진다.
이미 황제는 전 제국에 정화 의식을 치르겠다고 공표한 지 오래다. 다른 때도 아니고, 가장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여름 축제 시기에.
‘이제 정화 의식은 황제의 위신 문제가 됐지.’
요한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문제가 됐지.”
그의 길쭉한 검지가 아직 쌔근쌔근 잠든 아기의 볼을 쿡 찔렀다.
“성녀 측 요구사항이 워낙 괴팍해서 말이야.”
“왜, 어떻길래?”
“귀족들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치러졌던 황실 재판을 비공개로 바꿔 달라더군. 사람들 앞에 너무 노출된 게 성녀가 부담을 느낀 원인인 것 같다고.”
와, 노림수가 너무 확실해서 다른 속셈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다.
‘이제 슬슬 재판이 불리해졌다 이거네.’
나는 요한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리고 또 있어?”
“아직은 크게 없어. 하지만 또 모르지, 마음에 차지 않는다 싶으면 또 아프다고 쓰러질지.”
요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빈정거렸다.
“덕분에 상황이 참 재밌게 됐어. 조만간 황제가 성국에 칼을 빼 들 것 같아.”
“성국에? 그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은 성국이라 해도 결국 인간이 사는 곳이잖아. 불가능한 건 없지 않을까?”
요한이 아기의 보드라운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평화롭고 다정해 보였으나 왜인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자기가 내겠다는 것 같네.’
하지만 내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나는 요한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은근히 성녀에 대한 얘기를 다시 꺼냈다.
“그러면 요한은 혹시 성녀 스텔라에 대해 따로 조사한 것 있어?”
“아니.”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일순 빛났다.
“왜,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그렇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야.”
스텔라 성녀가 예스텔라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나는 내 나름대로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조사했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딱히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요한은 다르겠지.’
물론 내가 이미 성녀의 정체를 다 알고 있다는 것까지 요한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내 능력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이상, 어디서 알게 된 정보인지 설명할 수 없으므로.
“저번에 보니까 성녀가 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더라고.”
“성녀가?”
요한이 여상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 여자가 어떤 말로 널 신경 쓰게 했어?”
크게 감정 변화 없는 목소리였지만, 난 그가 내 얘기에 아주 집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요한 너랑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는 것 같았어. 물론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것 같았고. 물론 알고 있다고 확실히 말한 건 아니어서 정확한 건 아닌데…….”
아기를 쓰다듬던 요한의 손이 멈췄다.
“계속 얘기해봐.”
“난 이상하게 그 이야기가 사실인 것 같았어. 그래서 요한한테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요한은 또 성녀를 처음 본다고 했잖아?”
사실 이건 개인적으로 나 역시 궁금한 부분이다.
‘도대체 왜 예스텔라가 요한한테 접근하는 걸까?’
태도를 보면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잘 모르겠어서 답답하다.
‘그러면 어쩌겠어.’
내 손으로 안 된다면, 잘난 흑막의 손이라도 빌려서 파헤쳐보는 수밖에.
“물론 성녀의 출신은 밝히지 않는 게 원칙이라는 건 나도 알아.”
그동안 성녀의 출신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성국은 성녀로 각성하면서 성녀가 새로 태어났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녀 이전의 과거는 성녀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계속 신경 쓰이더라고. 그래서 그런데, 알아봐 줄 수 있을까? 무리할 필요는 없어.”
“네가 신경 쓰인다면 당연히 알아봐야지.”
일순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 같은 눈빛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좀 신기하네.”
그가 입가에 미소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불쾌하기도 하고.”
역시 요한도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에 불쾌했던 모양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계속 들러붙는다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 부인한테까지 지껄이고 있었을 줄이야.”
……그 부분이 아니었네.
“이건 내 실책이야.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모르겠다.”
“에이, 책임이랄 것까진 없어.”
요한의 목소리가 너무 심각해서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요한은 딱히 내 말에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다.
“왜 내 문제가 아니야.”
“그런가?”
“내 문제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 너한테 피해나 준 머저리가 됐는데.”
때마침 정령 아기가 일어나 말똥말똥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우?”
정령 아기는 짤따란 두 팔을 버둥거리며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열심히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고 보니 요한, 정령 아기 이름은 어떻게 할까?”
아무리 정령에게 이름이 중요하다지만, 그래도 계속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 건 좀 고민됐다. 그러자 요한이 가볍게 한 단어를 말했다.
“룬.”
“……룬? 그동안 그런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어?”
“아주 옛날에.”
요한은 어딘가 그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이 태어나면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거든.”
왜인지 이상하게 가슴이 따끔했다.
‘언제?’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정령 아기에게 물었다.
“룬이란 이름은 어때? 마음에 드니?”
그러자 정령 아기가 마음에 든다는 듯 방싯방싯 웃었다.
“꺄우우우!”
“마음에 든다고?”
“꺄아아!”
요한이 두 손으로 정령 아기를 안아 들었다. 이제 룬이 된 정령 아기가 요한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니! 이름을 그렇게 정해버리다니!
나무들이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며칠 내내 정령 아기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 대회의를 열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회의를 연 보람이 없지 않느냐?
-룬이란 단어에 어떤 의미가 있지? 고대어인가? 아니면 평범한 제국어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어허! 최선의 이름이라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하여튼 난 처음부터 저놈이 마음에 안 들어!
나무와 요한이 사이가 좋아지는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 같다.
***
스텔라 성녀가 천천히 황제의 앞에 섰다.
“감사합니다, 폐하.”
“고마워할 것 없다. 성녀가 먼저 의무를 다해준다니 짐으로선 고마울 뿐이지. 다시 정화 의식이 밀리는 일은 없겠지?”
그러자 스텔라 성녀는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예, 폐하. 제가 당장 페스칼로스 숲을 정화하겠습니다.”
성녀가 우아하게 황제에게 말한 뒤 알현실에서 벗어났다. 알현실을 벗어나자마자 스텔라는 표정을 싹 굳힌 채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부족해.’
카를로스 황태자는 도움이 될 듯싶더니 결국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때 멀리서 오르테카 재상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성녀는 사르르 미소 지었다.
“어머, 오르테카 재상님.”
더 훌륭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저, 재상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정화 의식을 먼저 하기로 했어요.”
“몸이 안 좋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괜찮아요.”
스텔라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웃었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으니까요.”
“좋은 모습을 말입니까?”
“아,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네요.”
오르테카 재상이 성녀에게 상냥하게 웃어줬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오르테카 재상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신다면 오르테카 재상님께만 말씀드릴게요.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야 성녀님의 후견인 아닙니까. 비밀이야 응당 지켜드려야지요.”
“사실…….”
스텔라가 부끄럽다는 듯 두 볼을 붉혔다.
“제가 블란쳇 공작님을 연모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