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재판 연기
(106/182)
106화 재판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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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재판 연기
2022.12.06.
늦은 밤.
나는 요한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태피스트리를 뜯어 이시도르를 만나러 갔다.
이시도르는 거대한 나무 아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바깥에선 별일 없었느냐?”
-그렇게 반겨주면 저 아이가 네가 기다렸는지 어떻게 알겠어. 빨리 요란하게 신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라, 이시도르.
이시도르가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저 나무 놈 얘기는 귀담아들을 것 없다. 지루하다는 핑계로 나를 놀리기 위해 사는 놈이니까.”
“걱정 마세요. 저도 안 믿어요.”
“……뭐?”
“어차피 이시도르 씨가 저한테 신경 써주는 것도 제가 마지막 요정이라서지, 딱히 저라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이시도르는 요정의 수호자다. 지위만 봐도 요정들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필요한 걸 연습하는 데 집중하죠?”
아무리 몇 번 더 들어올 수 있다지만 횟수가 정해진 만남이다. 그러자 이시도르의 남색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네?”
“네가 요정이라서 신경 쓰고 있는 건 맞다. 마지막 요정 아이인데 신경을 안 쓸 수 있나. 하지만…….”
이시도르의 귓가가 살짝 달아올랐다.
“네가 널 신경 쓰는 이유는 마냥 네가 요정이라서만은 아니다. 나라고 모든 요정 아이들을 좋아했던 건 아냐.”
“…….”
“큼큼, 물론 싫어하더라도 내 의무는 수행했겠지만 지금 같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너를 많이 아끼니까.”
솔직히 이시도르의 말은 모순되었다.
‘요정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을 거면서.’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이 헷갈리지 않는 건, 망설이는 목소리 속 스며 있는 애정이 확실해서였다.
“……제 뭘 보고요? 이시도르 씨는 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잖아요.”
“모든 것을 알아야 아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바람이 불어와 이시드로의 백금발을 흐트려놓았다. 뒤에 있는 나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고고한 현자 같은 분위기가 났다.
“너도 그런 적이 있지 않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불현듯 요한이 생각났다.
‘여전히 요한의 마음을 모르겠어.’
나는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끊임없이 신경 쓰며 똑같은 고민을 되풀이했다.
요한은 비밀이 많고, 나는 그의 비밀 로 인해 힘들지만.
‘그래도 요한이 좋아.’
내게 거짓말을 해도, 나는 요한을 사랑했다.
‘아, 그래서 내가 기쁘지 않았구나.’
요한의 거짓말이 괜찮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상처받았던 거였어.’
요한이 나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리어 생각해 보면 그건 가장 요한답지 않은 행동이다.
‘요한은 내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르니까.’
괜한 얘기를 떠들어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안 그래도 스텔라 성녀로 힘든 상황에서 짐을 더 얹고 싶지 않은 거다.
요한 나름의 배려다.
“……에스텔, 괜찮으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까이 다가온 이시도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울고 있구나.”
“제가요?”
무심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니, 눈물이 묻어나왔다.
“어, 그러게요. 울 정도의 일은 아니었는데.”
“울고 싶었던 모양이지.”
“솔직히 그런 것보다는 원래 눈물을 잘 흘리는 체질이에요. 울고 싶다고 마음을 먹을 때마다 눈물을 흘릴 수 있거든요.”
요즘 불쌍한 척하려고 눈물을 자주 흘리고 다녔더니, 원하지 않을 때도 이렇게 새어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별거 아니에요. 갑자기 고민하던 걸 깨닫게 돼서 좀…….”
“조금?”
“혼란스러웠나 봐요.”
어차피 이시도르는 바깥에 나갈 수 없다. 요정인 나를 어른처럼 보살펴줄 뿐만 아니라 해칠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편하게 솔직한 얼굴을 드러냈다.
“왜 별일 아닌데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자질구레한 고민 같은 거 있잖아요. 요새 사는 게 편해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봐요.”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조했다.
‘배가 부른 거지.’
요한에게서 생존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으면, 이딴 실망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요한 스스로 나에게 과거 얘기를 해줬다고 기뻐했을 거다.
요한은 나에게 아주 잘해주고 있다. 이번 황실 재판만 해도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해주지 않았던가.
‘성녀 일도, 성녀가 잘못한 거고.’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다.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뜻밖에도 이시도르의 얼굴은 더 심각해졌다.
“에스텔 네 안에서 아주 큰 슬픔이 느껴지는구나.”
“방금 우는 걸 봐서 그런 게 아닐까요. 다들 그렇게 착각하던데.”
“요정끼리는 민감하게 서로의 감정을 눈치챌 수 있다. 요정의 기운에 상대의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담기기 때문이다.”
나보다 머리 한 뼘은 큰 이시도르가 팔짱을 낀 채 그러고 있으니 정말 문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시도르 씨가 느낀 제 감정은 어떤데요?”
“불안과 우울.”
“그런 걸 종종 느끼긴 하죠.”
“아픔과 슬픔, 아주 거대한 고독과 공허함,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상처.”
이시도르의 남색 눈동자가 좁아졌다. 그와 눈을 마주 보고 있던 내가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내 모든 게 다 읽히고 있는 것 같아.’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게 훅 들었다. 나는 이시도르에게 말간 미소를 지어줬다.
“그래도 이시도르 씨, 전 괜찮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죠. 한때는 정말 그랬을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 상황이 많이 좋아졌어요.”
나는 이시도르에게 최근 요한과 있었던 좋았던 일과 설렜던 일들을 얘기해 줬다. 이시도르는 무응답으로 일관했고, 침묵을 참다 못해 나무가 버럭 소리쳤다.
-반응 좀 해줘라! 연애 얘기 듣는데 너처럼 돌같이 구는 놈도 없을 거다.
“시끄럽다.”
-아무튼 그래서 너는 그놈을 사랑하지만, 마음속에서 자꾸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 고민되는 거구나.
“맞아요, 하지만 이 정도 고민은 다들 하는 거잖아요.”
이시도르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저는 잘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네가 느끼기에 네 감정이 그렇다면야.”
이시도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네 감정에 대해 물어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요정의 기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감정이요?”
“저번에 요정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대강 설명했지, 그러니 이번에는 요정의 능력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사용할 수 있는지 얘기해 주마.”
이시도르의 시선이 나무 한구석을 향했다. 그 자리 위로 흰색의 꽃이 자라났다.
“저 꽃을 자세히 봐라.”
꽃이 핀 바닥 아래로 스멀스멀 이시도르의 기운이 번져갔다. 그리고 일순 강력한 번개가 내리치듯 꽃이 까맣게 타 사라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 긴장감은 뭐지?’
단순히 꽃이 사라지는 걸 봐서가 아니다. 방금 전, 나도 모르는 내 감정에 온몸이 전율한 듯했다.
“방금 그건……?”
놀란 눈으로 이시도르를 돌아보자, 이시도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분노를 담아 요정의 힘을 사용한 거다. 네 능력이 정해져 있더라도 어떤 감정을 담느냐에 따라서 활용도가 달라진다.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은 네 능력을 나처럼 사용할 방법을 찾아내 연습하는 거다.”
“그러고 보니 요정의 힘은 어떤 식으로 정해지나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아, 이시도르 씨는 파괴하는 힘이고, 저는 진실을 보는 눈이라면서요. 다른 요정들도 제각기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원리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팔짱을 끼고 있던 이시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본인의 소망이 발현되어 정해지는 거다.”
“소망이요?”
이시도르의 설명을 들을수록 요정에 대한 호기심이 더 늘었다.
‘그러면 나는 진실을 보고 싶어 했다는 건가?’
내 능력을 잘 사용하고 있기는 하나, 막상 내 소망이었다고 하니 신기했다.
“그러면 방금 전 꽃을 피우게 하는 건 모든 요정이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래.”
“그러면 그때 피우게 하는 꽃의 종류도 정해져 있어요?”
“상황마다 피어나는 꽃이 다르다.”
들으면 들을수록 참 활용도가 많은 힘이다.
‘요정은 어쩌다 멸망했을까?’
얘기만 들으면 엄청나게 강한 종족 같은데!
“그러면 왜 요정들은…….”
“여기서 그만.”
이시도르의 표정이 엄해졌다. 왠지 다른 의미로 오싹해졌다.
“질문은 충분히 받아줬으니 이제 실전에 들어갈 차례다.”
그 순간 갑자기 땅에서 두꺼운 넝쿨이 불쑥 자라나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이시도르가 냉정하게 말했다.
“참고로 요정의 힘도 몸 쓰는 거랑 비슷해서, 고생하면서 배워야 가장 잘 익혀진다. 그러니 원망하지 말고.”
“자, 잠깐만요-!”
갑자기 넝쿨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
요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디 갔지?’
품에 끌어안고 있던 에스텔이 사라졌다. 순간 등골이 싸늘하게 식으며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설마 어디 도망가기라도-’
그때 바닥 근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에스텔의 모습이 보였다.
‘태피스트리?’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에스텔은 로이엄 왕국에서 선물해 준 태피스트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요한이 그런 에스텔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귀여워.’
하지만 감히 제 품을 벗어나려 한 건 용서할 수 없다.
요한은 에스텔을 안아 들어 침대에 올렸다. 이불을 덮어쓴 채 폭 끌어안았다. 에스텔 특유의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 안정감이지.’
이제 요한은 이 온기가 없으면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눈을 감고 있던 에스텔이 비척거렸다.
“자, 잠깐만…….”
에스텔이 신음하듯 끙끙거렸다.
“……힘드니까 시간을 좀…….”
어쩐지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요한은 돌처럼 굳은 채 그런 에스텔을 바라봤다.
‘또 학대당하는 악몽을 꾸는 건가?’
에스텔이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마다 요한은 비참해졌다. 에스텔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너는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요한이 조심스럽게 에스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에스텔은 잠꼬대를 멈추고 편히 숨쉬기 시작했다.
‘역시 거짓말하기를 잘했어.’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에스텔이다.
‘내가 에스텔을 증오했으며, 복수할 마음으로 결혼했다는 걸 알게 되면…….’
에스텔은 완전히 무너져 버릴지도 몰랐다. 거기다 완전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어차피 그는 이제 에스텔에게 복수할 마음 같은 것도 없고, 그 계획은 아무도 모르게 몽땅 폐기해 버렸으니까.
에스텔이 평생 알 리 없는 사실이다.
“괜찮아, 에스텔.”
요한은 에스텔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줄게.”
***
성국은 스텔라의 재판으로 발칵 뒤집혔다.
추기경들은 성황 앞에서 재판 과정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도대체 시몬 추기경은 무슨 생각으로 성녀님을 고발한 겁니까? 본인이 추기경이라는 자각은 있는 겁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어지간히 생각이 없지 않고서야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성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당장 성국으로 모셔야 합니다. 제국은 성녀님께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자 재판을 전달했던 신관이 곤란을 표했다.
“하나 성녀님께서 성국으로 돌아오실 마음이 없으십니다.”
“……도대체 어째서, 이 난리를 겪고도.”
신관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그때 가만히 있던 성황이 자애롭게 웃었다.
“누구에게나 성장할 기회는 필요합니다. 저는 이번 일이 성녀가 성숙해질 기회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황 폐하, 이번 일은 너무 크고 위험해서 성국의 입지까지 흔들릴 수가……!”
“그래서 지금 제 뜻을 거역하겠다는 겁니까?”
성황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반대하던 추기경을 바라보자, 추기경들이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성황 폐하의 고견에 반대하겠습니까.”
“그러면 됐군요. 우리 성국은 성녀를 지금처럼 최대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시몬 추기경은…….”
그러자 성황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제가 따로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게 성국의 회의가 끝났다. 추기경들은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성국의 답장을 받은 스텔라가 황제에게 조심스럽게 편지를 보냈다.
[폐하, 저는 저번 재판 일로 심신에 큰 타격을 받아 운신할 수 없을 듯싶습니다.]
요컨대, 재판부터 정화 의식까지 모조리 미뤄버리겠다는 통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