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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그럴싸한 거짓말 (105/182)


105화 그럴싸한 거짓말
2022.12.02.



 
황궁 시종이 다이아나 공주를 데리러 갔다. 성녀는 카를로스 황태자에게 기대어 선 채 그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어찌 감히 그런 일이.”

아무래도 황태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있었던 일에 대해 일러바치는 모양이었다. 황태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루이지를 노려봤다.


“그대는 성녀의 절친한 친구가 아니었던가?”

루이지는 움찔 떨었다.


“성녀님은 절친한 친구인 저를 이용하려 했어요. 저는 정당해요.”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감히 성녀를 음해하고도 멀쩡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의 강한 기세에 루이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요한을 살폈다. 루이지의 반응만 봐도 요한이 수작 부렸다는 걸 알겠다.


‘어떻게 루이지를 설득한 걸까?’

루이지네 가문을 고소했다는 건 들었지만, 고작 그 정도로 저렇게 태도를 바꿀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 왜 그쪽을 보지? 배후의 눈치가 보이시나?”

“황태자 전하, 저는 어디까지나 진실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블란쳇 공작에게 유리한 진실이겠지!”

카를로스는 대놓고 요한을 언급했다. 요한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왜 제가 그랬다 생각합니까?”

“다이아나 공주에게 직접 들었기 때문이지.”

카를로스가 당당히 다이아나 공주를 언급했다.


“공주가 말하더군. 블란쳇 공작 부인이 협박하여 어쩔 수 없었다고.”

“정말 공주가 그랬습니까?”

“어차피 곧 들을 이야기 아닌가?”

그때 카를로스의 뒤에 있던 성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아, 다이아나가 드디어 용기를 냈군요.”

“성녀인 그대가 지지해 준 덕분이지.”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직 다이아나 공주는 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이미 다이아나가 확실한 증언까지 마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진짜 다이아나가 나를 배신했나?’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속이 쓰렸다.


‘그래, 루이지도 성녀를 배신했는데 다이아나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그래도 뭔가 마음이 아픈 건, 다이아나를 나름 내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당당한 태도에 휘둘린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정말 다이아나 공주가 그리 증언했다고요?”

“어쩐지 루이지 양이 하고 있는 말이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글쎄…….”

신기할 정도로 사람들은 금세 성녀가 ‘그럴 리 없었다’는 식으로 돌아섰다.


‘성녀라는 직위 때문일까?’

매번 느끼지만 세상이 참 스텔라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몰리자 루이지는 뒷걸음질 쳤다.


“아닙니다. 전 그저 진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블란쳇 공작이 영애를 고소한 이후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그건…….”

“지금이라도 솔직히 털어놓으면 거짓 주장으로 황실 재판을 능멸한 죄는 묻지 않도록 도와주지.”

루이지의 눈빛에 망설이는 기색이 떠올랐다. 스텔라가 그런 루이지에게 호소했다.


“맞아요, 루이지. 루이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와줄게요.”

“저는.”

“네, 루이지.”

루이지는 결심이 선 듯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저는 사실, 블란쳇 공작과 오늘 재판 내용을 가지고 거래했습니다.”

귀족들이 놀란 듯 헛숨을 들이켰다. 카를로스가 입술을 히죽 올렸다.


“역시.”

나는 이 상황 자체가 몹시 의문스러웠다.


‘요한이 이렇게 일을 허술하게 했다고?’

생각해 보면 루이지를 고소한 것도 그랬다. 그렇게 대놓고 루이지를 압박하고, 태도를 바꾸게 하면 누구든 진실을 의심하게 되지 않나.


‘뭔가 있을 거야.’

그때 요한이 나를 힐끔 돌아봤다.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휘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건, 요한이 계획해 둔 거야.’

 

***

카를로스는 매우 기뻤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루이지 영애가 갑자기 배신해서 당황했지만, 카를로스는 오히려 그것을 유리하게 바꾸는 데 성공했다.


“블란쳇 공작과 무엇을 거래했지? 영애의 가문을 가지고 협박했던가?”

솔직히 효과적인 협박 수단이야 정해져 있었다.


‘나도 다이아나 공주를 그렇게 협박했지.’

이렇게 확정된 상황에선, 다이아나 공주도 분위기를 따라 증언할 수밖에 없으리라. 블란쳇 공작 부인이 성녀를 음해하도록 시킨 범인이라고.

루이지는 아직도 망설이는 듯 입술을 깨물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에게 유리하게 증언을 해주면, 고소를 취하해 주고 저희 가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도와준다고 블란쳇 상단에서 지원해 준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끔찍한 짓을……!”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네. 그래서 저는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루이지는 증언을 하는 와중, 이번에는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블란쳇 공작과 황태자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황태자의 편에 서기로 한 모양이었다.


“모든 게 다 제 죄입니다. 아무리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성녀님께 너무 큰 피해를 끼쳤어요. 어떻게 해야 속죄할 수 있을지.”

“괜찮아요, 루이지.”

성녀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루이지를 다가가 포옹했다.


“역시 루이지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줄 알았어요. 이제라도 루이지가 용기를 내줘서 기뻐요.”

“성녀님…….”

두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서로를 보듬었다. 요한이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증거는?”

“……네?”

“내가 영애를 협박해서 증언을 바꾸게 했다는 증거가 있나?”

루이지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당당하게 나섰다.


“저 자신이 그 증거예요! 방금 전 제가 했던 증언 자체가 블란쳇 공작이 저를 협박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어차피 성녀님이 블란쳇 공작 부인을 욕하고 다닌 건 사실인걸요? 성녀님과 다니는 영애들 모두 다 알아요, 아닌 척해도 성녀님이 공작 부인을 미워한다는 거.]

그때 루이지의 목소리 위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루이지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이, 이건 또 무슨…….”

“혹시나 해서 준비했지요.”

요한이 품에서 마력이 느껴지는 마도구를 꺼냈다.


“루이지 양과 같이 대화했던 내용입니다.”

“그, 그런 마도구가 있다고는…….”

“그거야 새로 만들어진 마도구니까요.”

요한의 태연한 말에 루이지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브, 블란쳇 공작이 수작을 부린 건지 어떻게 알죠? 마법으로 조작-”

[솔직히 꾸며낼 것도 없어요, 성녀님이 시킨 일을 다 얘기하기만 해도 돼서요.]

“아니, 그러니까 이건.”

[증거요? 매번 신전으로 사람을 부르는데 어떻게 증거가 있겠어요. 하지만 성녀님이 부르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사람 모으기는 쉬울 거예요.]

“아니야!”

루이지가 발악하듯 외쳤다.


“성녀님, 저는 저런 소리 한 적 없어요! 블란쳇 공작이 마법을 쓴 거라고요!”

“루, 루이지…….”

“그럴 거라 생각하십니까?”

요한은 긴말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지 않았다.


“설령 그렇데도, 저 영애의 말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요한의 태도는 담백하고 우아했으며, 누가 봐도 진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루이지 영애의 증언을 신뢰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솔직히 매번 말을 바꿔서 저 사람을 믿는 게 맞는지…….”

황제가 손으로 이마를 꾹 누르며 말했다.


“황당하군. 황실 재판에서 감히 이런 짓을 벌이는 겁 없는 영애가 있을 줄이야. 황족 능멸죄가 두렵지도 않은가.”

“폐, 폐하. 저는…….”

“다이아나 공주는 언제 오지? 이제 올 때도 되지 않았나?”

황제는 루이지의 애원을 무시하고, 황궁 시종을 불렀다.

끼이익-

시간에 딱 맞춰 문이 열렸다. 하지만 알현실로 들어온 것은 모두가 기다리던 다이아나 공주가 아니었다.


“폐하, 큰일입니다. 다이아나 공주님이 계시던 방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습격?”

“예. 다이아나 공주님께서 의문의 괴한에게 납치당하신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하면…….”

요한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사건을 보며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이거, 참 안타깝군요. 증인이라고 모인 게 다 저 모양이라니.”

하나도 안타까워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에스텔은 그런 요한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루이지를 내버려 둘 마음이 없었어.’

왜냐하면 루이지 역시 성녀와 짜고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애초에 루이지가 저렇게 배신하길 바라고 상황을 구상한 거다.


‘이걸로 루이지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지고…….’

다이아나의 실종으로 재판은 더 커지게 되었다.

황실 재판이라는 이름도 무거운데, 사건에 여러 가지 일이 끼어들면서 더 주목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성황이 나설 수밖에 없겠어.’

그리고 거기서, 요한이 진정으로 노리던 것이 밝혀질 거다.

***

재판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황제는 재판을 다른 날로 연기시켰다.

나는 요한보다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탁자 위에 공작 부부를 위해 준비된 와인이 있었다.


‘황궁에서 준비한 거니까 비싼 거겠지?’

평소 와인을 즐겨 마시지 않아서 얼마나 좋은 와인인지 모르겠다. 나는 와인잔을 든 채 커튼을 걷어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밤이 찾아와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황궁은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인, 뭐 보고 있어?”

요한이 가운만 걸친 채 방에 들어섰다.


“아, 잠깐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어.”

가운을 걸친 모습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널따란 어깨와 단단한 근육으로 부푼 가슴, 완벽한 역삼각형의 몸매가 두드러져 있었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설레지 않겠어.’

솔직히 내가 요한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너무 완벽한 남자였다.


“밤의 황궁은 낮의 황궁보다 더 볼만하지.”

요한은 나와 나란히 창가에 서서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한 잔씩 할까?”

“좋아.”

와인에선 달달한 향이 났다. 입맛에 맞아서 계속 홀짝거리자, 술기운이 올라왔다. 가만히 나와 같이 창밖을 보고 있던 요한이 입을 열었다.


“옛날얘기 하나 해줄까?”

요한은 어쩐지 내가 평소 보던 표정과 다른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긴데?”

“리베르탄 공작가의 음모에서 겨우 살아남아 복수한 남자 이야기.”

누가 봐도 요한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 표정을 본 요한이 입매를 늘어뜨렸다.


“알고 있었네?”

“음, 어쩌다 보니 듣는 게 있어서.”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 그럴 수밖에.”

요한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베르탄 공작가는 블란쳇 공작가에게 거짓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죽였어. 내 가문은 억울하게 멸망했지.”

“…….”

“나는 리베르탄을 증오해.”

설마 요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평생 말하지 않을 줄 알았어.’

머리가 새하얗게 질리며 불안이 앞섰다. 요동치는 심장 속에서 달콤하게 웃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그러면 요한은 나를 증오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어디까지 아는 척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를 굴렸다.


“잘 모르겠어. 나는 요한이 아니니까. 하지만 좋지는 않았을 것 같아.”

“부인이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그래도 나는 요한이 증오하는 가문의 딸이잖아.”

그러자 요한이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틀렸어.”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그가 가볍게 미소 짓자, 홀릴 것처럼 나른한 매력을 풍겼다.


“난 부인을 증오한 적 없어.”

“……진짜로?”

“그래, 리베르탄 공작가가 지은 죄지, 부인이 저지른 죄도 아니잖아.”

“…….”

“내가 왜 부인을 증오하겠어?”

요한은 내 뻣뻣하게 굳은 표정을 보며 달래듯이 볼을 꼬집어줬다. 평소처럼 달콤한 애정표현이다.


“내가 너를 증오하고 있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 감정이란 게 이성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어.”

그의 눈빛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너무 믿고 싶을 정도로, 근사하고 아름다운 비밀이다.

그대로 믿고 싶다.


“그러면 나와 결혼한 이유는 뭐야?”

“부인이 안타까워서.”

요한이 나를 품에 안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부인은 리베르탄의 혈족도 아닌 입양아잖아. 그런 네가 리베르탄의 죄로 피해 입게 될 게 싫었어.”

“왜 그렇게 나를…….”

“나도 모르겠네. 이런 게 운명인가?”

요한은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리며 내 얼굴에 제 콧등을 문질렀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될 운명이었나 봐.”

“…….”

“이렇게 마음 쓰고 있을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해서 안심시킬 걸 그랬네. 미안해, 부인.”

‘기뻐해야 하잖아.’

요한이 나를 버릴 가능성이 더 적어졌으니까. 내가 그를 사랑하듯이 그 역시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조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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