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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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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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
2022.11.29.
철퍼덕!
성녀가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지, 지금 성녀가-”
먼저 입을 열었던 누군가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스텔라는 황궁 재판의 중심에서 넘어져 있었다.
스텔라를 도와준다는 건, 그 사건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누군가는 성녀를 돕겠지.’
‘하지만 그게 내가 되면 위험해. 가뜩이나 거물들이 얽혀 있는 일인데.’
이렇게 다들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성녀는 이런 공식적인 장소에서 조심성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운지, 아니면 바로 일어설 용기가 나지 않는지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때, 아가. 꼴 좋지 않으냐?
-저 성녀라는 지독한 여자가 그동안 너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고 다니지 않았느냐?
나무들이 뿌듯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시몬 추기경이 성녀를 부축하며 일으켜주었다. 스텔라는 가녀린 팔로 시몬 추기경의 도움을 받으며 울먹거렸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성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방금 전 제가 서 있던 자리를 힐끔거렸다. 그 자리에 무언가가 있었던 것처럼.
-당연히 저 여자의 발을 걸고 없앴단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그래, 갑자기 없던 식물이 생겨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아니니?
솔직히 성녀가 넘어진 것보다 나무들이 한 행동에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곧바로 물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식물을 자라게 하고, 없앨 수도 있어요? 나무가 전혀 없는 자리에서도요?
이곳은 황실 재판이 열리는 장소다. 흔한 돌이나 잔디도 없었다.
‘그동안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도움받기가 어려웠는데.’
이런 식으로 나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자 나무들이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어려울지도 모른다.
-왜요?
-사실 방금 건 우리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본 거다. 네 요정의 힘이 갑자기 조금 늘어난 김에 가능할까 싶어서. 그런데 이번 사용으로 네 요정의 힘을 많이 끌어다 써서…….
-네? 그러면 이제 제 힘이 얼마 안 남았어요?
그게 어떤 힘인데!
-미, 미안하다.
-우리도 진짜 될 줄 몰랐지. 물론 되라고 한 일이긴 하다만 그래도 이렇게 네 힘을 가져다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힘을 회복하면 사용할 수 있다니까.’
요정의 힘은 점차 회복하고 있는데다, 요정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이시도르 씨도 있다.
시몬 추기경이 말없이 바닥을 보고 있는 성녀를 불렀다.
“성녀님?”
성녀는 평소와 달리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겠지,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로 망신을 더 당했으니.’
하지만 증거는 없고, 요정의 힘에 대해서 증명할 수 없는 이상 성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다. 그래 봐야 자기만 이상-
“제가 넘어진 게 아니에요.”
그러나 스텔라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여자였다.
“무언가가 저를 일부러 넘어뜨렸어요.”
“예? 무언가라니…….”
시몬 추기경이 곤란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게, 성녀의 치맛자락 근처에는 밟고 넘어질 만한 돌조각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성녀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슬픈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누군가 성녀인 제게 악의를 품고 공격하려 하고 있어요.”
“예?”
“생각해 보면 계속 이상했어요. 루이지도, 시몬 추기경도 갑자기 변해서 저에게 이상한 말을 하고. 역시 누군가 저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성녀의 눈가가 촉촉해지며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
“이게 무슨 일이지?”
황태자 카를로스가 황실 재판장에 들이닥쳐 성녀에게 다가왔다.
“왜 성녀인 스텔라가 바닥에 엎어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까?”
위기에 빠진 연인을 발견한 것처럼 무척 사나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스텔라는 다가오는 카를로스를 보며 조금 더 서러운 표정을 짓더니, 나를 힐끔 쳐다봤다.
카를로스의 금안은 곧장 내게 꽂혔다.
맹수처럼 위협적인 눈빛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 그때 따듯하고 큰 요한의 손이 떨리는 내 손을 꽉 쥐었다.
“무서워하지 마.”
요한이 여유롭게 카를로스 황태자를 보며 내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네 곁에 내가 있는 한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해.”
“…….”
“네가 무슨 행동을 했더라도, 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게 될 테니까.”
요한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진하고 매혹적인 붉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의뭉스럽게 빛났다.
‘뭘 아는 거야?’
마치 요정에 대한 무언가를 짐작하는 듯한 눈빛이다.
‘내가 뭘 한 게 맞긴 한데.’
요한이 도대체 뭘 알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
다이아나 공주가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었다. 황태자마저 떠나가자,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야.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황태자는 왕국의 미래를 걸고 다이아나를 협박했다.
‘황태자의 지위를 걸고 연합 왕국 측의 무역에 엄청난 제약을 걸 거다. 그렇게 되면 연합 왕국은 로이엄 왕국을 버릴 수밖에 없겠지.’
‘연합 왕국의 연대가 강하다고? 그래 봐야 약소국들의 모임일 뿐이다. 네가 공주라면 더 잘 파악하고 있을 텐데?’
물론 다이아나는 카를로스의 협박을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마음이 굴복하려는 순간, 이사벨라 왕비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다이아나 네 정의를 지켜야 한다. 이 어미가 너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하지만 어머니도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나올 것을 예상했을까?
‘황태자가 나서서 연합 왕국을 망치려 한다면 어떻게…….’
철커덕, 철컥.
“다이아나 공주님, 계십니까?”
방 바깥에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와 동시에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바깥을 지키던 기사들과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다이아나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말했다.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다이아나 공주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차분한 회색 머리카락에, 청회색 눈동자를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다. 남자의 발아래로 기절한 기사들이 보였다.
‘만만치 않은 실력자다.’
다이아나가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찾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저는 당신의 정체를 물었어요.”
“아, 대답하는 게 늦었군요. 저는 에리히 블로뉴 남작입니다. 블란쳇 공작님께서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블란쳇 공작이요?”
“예. 공작 부인께서 공주님의 안위를 많이 걱정하셨군요.”
그러고 보니 에스텔을 만나면서 스치듯이 저 남자를 봤던 것이 떠올랐다.
“에스텔이, 당신을…….”
하지만 다이아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제가 사라진다면 에스텔이 더 곤란해질 겁니다. 제국 기사들을 멋대로 쓰러뜨리고, 황궁에서 조사하는 죄인을 빼돌리기까지 하면 아무리 블란쳇 공작가라도…….”
“걸리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예?”
다이아나의 두 눈이 커졌다.
“이 녀석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절 보기도 전에 약으로 기절시켰으니까요.”
자세히 보니 황궁 기사에겐 상처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 귀신 같은 솜씨였다.
“그래도 블란쳇 공작가가 의심받을 겁니다. 그리고 로이엄 왕국의 입장도 곤란해질 거고요.”
그러자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에 묘한 빛이 어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이엄 왕국에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그거야 주인님께서 나설 것이기 때문이지요. 황궁 보안에 문제가 생겼으니 그 황태자도 날뛰지 못할 겁니다. 어디 공주를 잃은 왕국에 죄를 묻겠습니까?”
다이아나가 긴장감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블란쳇 공작이라면 가능할지도.’
다이아나도 딱 한 번, 블란쳇 공작을 만난 적 있었다. 에스텔을 보기 위해 블란쳇 공작저에 들어갔을 때였다.
‘아주 무서운 남자였지.’
반듯한 신사처럼 보이던 블란쳇 공작은 곧 죽일 죄인을 보는 듯한 눈으로 다이아나를 힐끔 보고는 했다. 애초에 그 살의를 숨길 마음도 없어 보일 정도로 오만한 남자.
“지금 바로 결정하셔야 합니다.”
에리히가 손을 들어 방문을 통통 쳤다.
“지금 당장 블란쳇 공작가의 손을 잡고 도망치실 겁니까?”
***
카를로스가 성녀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카를로스 황태자가 막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이었다.
“-도대체 성녀가 이렇게 되도록 누가-”
“조용!”
황제가 그 누구보다 먼저 끼어들었다.
“카를로스 황태자, 이건 황궁 재판이다. 누가 멋대로 재판 중에 뛰어들라 하였느냐?”
“하나 아버지.”
카를로스는 입술을 꽉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족은 황실 재판에 참여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그 의무를 이행하러 온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조용히 물러서 있었으면 될 일이다. 어찌하여 앞뒤 상황을 분간하지 않고 끼어들어 재판장을 소란스럽게 하느냐?”
“……죄송합니다.”
황제의 일침에 카를로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성녀를 품에 안은 채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지금 죄인을 안고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죄인?”
카를로스가 거슬린다는 눈으로 요한을 돌아봤다.
“지금 그것이 성녀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러면 달리 죄인이 있습니까?”
“블란쳇 공작, 그녀는 성국의 성녀다. 제국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를 그리 칭하는 건 무례가 아닌가?”
“죄인에서 벗어나면 정식으로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면 됩니까?”
요한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카를로스는 오히려 그 공손한 말투가 더 신경에 거슬렸다.
‘감히 내게.’
요한은 마치 애정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에스텔과 손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짜증이 불쑥 올라왔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전하, 저는 괜찮아요.”
품에 있던 성녀가 가냘픈 목소리로 나섰다.
“블란쳇 공작님의 말대로 제가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성녀도 저리 말하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카를로스는 요한의 뜻대로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성녀를 품에서 내려주었다. 그리고 성녀에게 말했다.
“계속 이 자리에 있어도 괜찮겠나?”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성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황태자의 곁에서 조금 떨어져 다시 황제의 앞에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놓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모두의 앞에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하지만 저를 걱정해 주신 황태자 전하의 행동을 안 좋게 보진 말아주세요.”
“그리하겠다.”
카를로스가 에스텔을 돌아봤다.
‘……왜 나를 보지 않지?’
에스텔은 카를로스의 등장에 당황하긴 했지만, 성녀와 붙어 있는 그를 보고 아무런 미련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조금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설마 공작이 널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하지만 지금 카를로스는 다이아나 공주가 잘 알아듣게 협박까지 한 상황이었다.
블란쳇 공작은 황태자인 그와 달리 멋대로 다이아나 공주를 만나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거다.
“폐하, 재판과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카를로스, 무엇이냐?”
“지금 이 자리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진짜 죄인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성녀의 얘기를 듣기 전 다이아나 공주의 증언을 듣는 것이 필요하긴 하겠군.”
황제가 한쪽 손을 들며 명했다.
“다이아나 공주를 데려오라.”
***
“……무슨 일이지?”
뒤늦게 한 기사가 다이아나가 갇혀 있던 방을 찾았다. 리안드로의 손에는 다이아나의 방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의 열쇠가 들려 있었다.
‘에스텔의 친구를 미리 구해주려 했는데.’
누군가, 리안드로보다 먼저 다이아나를 납치해서 데려갔다.
‘도대체 누구지?’
리안드로가 바닥에 쓰러진 기사를 강제로 깨웠다.
“정신이 드나? 어떤 자가 너희를 습격했지?”
하지만 아무리 기사를 닦달해도 리안드로가 원하는 정보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습격이라 정체는 알 수 없었습니다.”
리안드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나는 또 에스텔을 돕지 못했다.’
이번 일로 친구를 잃은 에스텔은 더 크게 상처를 받을 거다. 그리고 사악한 블란쳇 공작은 슬픔에 빠진 그녀를 이용할 게 분명하다.
‘황궁 기사를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실력자라면…….’
블란쳇 공작밖에 없다.
‘죽이지 않고 흔적 없이 납치한 것도 그래서겠지.’
다이아나 공주나 기사들이 죽으면 일이 커지게 되니까. 그래서 실종처럼 느껴지게 상황을 조작해서 흐지부지 넘기려 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펠시스 경. 방금 전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못 했는데.”
그때 기사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리안드로에게 물었다.
“펠시스 경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