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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성녀와 무슨 사이야? (103/182)


103화 성녀와 무슨 사이야?
2022.11.25.


충격적인 증언에 귀족들은 곧바로 수군거렸다.


“루이지 양의 말이 사실일까요? 도대체 성녀님은 왜 그렇게 블란쳇 공작 부인을…….”

“하지만 루이지 양은 성녀님을 만나기 전에도 블란쳇 공작 부인을 미워했잖아요. 성녀님 입장을 한 번 더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스텔라 성녀님은, 여러모로 참 말이 많으시네요. 여태 이런 성녀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스텔라 성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가련한 성녀의 얼굴을 향한 순간, 성녀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그런 적 없어요.”

그러자 근처에 있는 신관들이 성녀를 옹호하고 나섰다.


“성녀님께서 아니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건 모두 모함입니다. 저 영애가 성녀님의 이야기를 곡해해서 들은 게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도대체 성녀님께서 왜 블란쳇 공작 부인을 음해하려 한단 말입니까?”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예민한 반응이다.


“루이지 양이야말로 결백한 성녀님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죄를 깎으려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말 다 했어요?”

루이지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쳤다.


“저는 이 자리에 제 모든 명예를 걸고 나왔어요!”

“루이지 양의 증언만으로 모든 것을 믿으라는 겁니까? 성녀님이 루이지 양에게 그러셨다는 증거라도 있으시냔 말입니까.”

재판의 중심은 금세 성녀와 루이지에 대한 문제로 바뀌었다. 화두에서 내가 빠져버린 것이다.


‘이게 바로 흑막의 솜씨인가?’

요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워낙 소란스러운 와중이라 아무도 요한의 행동을 알아차라지 못했다.


“네가 알아서 하고 싶어 하겠지만, 그래도 나서지 않을 순 없어서 힘 좀 썼어.”

요한이 은근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멋대로 움직였다고 화내지 않을 거지?”

“뭐, 요한이 나를 위해서 한 거니까 내가 화낼 게 뭐가 있어.”

“다행이다.”

요한은 안심했다는 것처럼 작은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부인한테 원망 들을까 봐 걱정 많이 했거든.”

“요한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내 부인이 워낙 종잡을 수 없어야지.”

그가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쌌다.


“아무것도 안 하고 평생 곁에 있어주면 참 좋을 텐데.”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살폈다. 그의 시선에 노출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왜 불안한 걸까?’

요한은 내가 곤란할 상황을 대비해서 더 완벽하게 도움을 준 거다. 미리 말할 수 없는 사정도 대강 짐작이 갔다.


‘루이지에 대한 얘기를 다 털어놓기엔 시간이 촉박했겠지.’

특히 요한은 지키지 못할 말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실패할 가능성이 존재하기만 해도 내게 말하지 않고는 했다.


‘그건 내가 이해해 줘야 할 부분인 거고.’

심지어 요한은 내가 속상할까 봐 내 걱정까지 해주지 않는가. 나는 그의 배려에 감사해야 마땅한 처지다.


‘그런데 왜 마음이 마냥 편하지 않을까?’

한창 신관과 드잡이질을 하던 루이지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애초에 블란쳇 공작 부인이 성녀님을 밀었다는 사실도 다 거짓말이잖아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 그 자리에 없는 줄 알아요?”

신관들이 노골적으로 동요하자, 루이지가 눈에 불을 켜고 신관 몇몇을 손가락을 짚었다.


“생각해 보니 당신들도 다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그때 공작 부인이 성녀님을 밀어서 곤란하게 했던가요? 오히려 그 반대였죠.”

“루이지 양, 그건 성녀님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명령했다는 것과는 논지가 다른-”

“아무튼 성녀님이 공작 부인에 대한 누명을 씌우고 다녔다는 건 확실하잖아요! 내가 틀렸어요?”

요한에게 집중하고 있던 나는 루이지의 깽판에 감탄했다.


‘이래서 내부 폭로자가 무섭구나.’

루이지는 백작가를 믿고 나대는 망나니라는 평판에 걸맞게 짜증 냈다.


“그 거짓 소문은 누가 다 퍼뜨렸는데요. 그 소문 다 내가 냈어요? 아니잖아요!”

안 그래도 내가 신전에서 성녀를 만난 일화는 어느 순간 내가 성녀를 괴롭혔다는 일화로 둔갑해 있었다.


‘어쩐지 목격자가 그렇게 많은데 이상하게 퍼져 있다 싶더라니.’

귀족 하나가 건수를 잡았다는 것처럼 루이지에게 물었다.


“그러면 그 거짓 소문을 성녀님이 냈다는 겁니까?”

“물론 제가 그건 알 수 없죠. 하지만 정확한 건 전 사실 그 소문에 대해 퍼뜨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가 직접 본 게 있으니까.”

“그러면 신전에서는 무슨 일이…….”

“그때 제가 신전에 간 건 성녀님이 공작 부인과 만나기가 두렵다면서 저와 제 친구들을 불러서였어요. 아마 이 부분은 제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좋아요.”

루이지가 살벌한 눈빛으로 성녀를 노려봤다.


“성녀님이 블란쳇 공작 부인을 뵈러 갔을 때였어요. 그때 성녀님이 걱정되어 찾아간 제 앞에 보인 건……. 피를 토하며 쓰러진 블란쳇 공작 부인이었어요.”

신관이 얼굴을 붉히며 루이지가 아닌 황제에게 호소했다.


“폐, 폐하. 현재 재판 분위기가 너무 과열된 듯합니다. 잠시 재판을 다른 날로 미루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적당히 과열된 것도 괜찮지 않은가?”

“예?”

팔짱까지 끼고 구경하던 황제가 씩 웃었다.


“애초에 이런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생각보다 중요한 증언인 듯하니, 계속 저 이야기를 들어보지.”

황제가 루이지의 편을 들자, 신관이 아연실색했다. 분위기가 제 편이라고 느낀 루이지가 한층 자신감이 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성녀님은 피를 토하고 쓰러진 블란쳇 공작 부인을 치료할 마음도 없어 보였어요.”

“루이지 영애! 그건 억측입니다!”

“오죽했으면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성녀님께서공작 부인을 해쳤다고 말하고 다녔겠어요? 그리고 왜 그 대단한 성녀님께서 공작 부인을 치료하지 않고 쓰러질 때까지 두셨는데요?”

신관이 조심스럽게 성녀의 눈치를 살폈다. 가만히 신관에게 몸을 기대어 서 있던 스텔라 성녀가 겨우 앞으로 나섰다.

더 이상 성녀가 숨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성녀는 모두에게 주목받으며 의혹을 제기받는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가냘픈 몸을 휘청거렸다.

요한이 나한테만 들리도록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성녀를 보니까 어때?”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저 상황, 부인이 종종 올라가 있던 자리잖아. 이제는 부인이 성녀를 구경하고 있고.”

모두의 의심이 모인 자리, 제 결백을 주장하게 된 성녀.


“이것도 요한이 계획해 둔 거야?”

“비슷해.”

요한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부인이 다른 상황에 있어 봤으면 했거든. 그래서 일부러 말하지 않고 목격자를 꼬드겨놨지.”

그때 성녀가 나를 비껴가 요한을 애타는 눈망울로 바라봤다. 울 듯 말 듯 일그러진 얼굴은 누가 봐도 요한과 깊은 사연이 있어 보였다.

나는 이때를 틈타 그동안 계속 묵혀두었던 질문을 했다.


“요한, 성녀랑 무슨 사이야?”

그러자 요한이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사이도 아니야.”

“진짜야?”

“저런 정신 나간 여자 같은 건 몰라.”

 

***

카를로스 황태자가 다이아나를 찾았다. 다이아나가 카를로스 황태자를 보며 물었다.


“이제 제가 증언하러 가야 하나요?”

“그래. 생각은 좀 바뀌었나?”

다이아나 공주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카를로스 황태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이아나 공주를 협박했다.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됐나, 아니면 너 하나만 피해 보면 끝이라 생각했나?”

다이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를로스 황태자는 다이아나의 동요를 눈치채고 조롱하듯 웃었다.


“멍청한 공주여. 네가 처리되고 나면 그다음은 네 가족이다. 설마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너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나?”

“왜, 도대체 왜 저희 가족을……!”

“너희 가족의 죄는 없다.”

“…….”

“하지만 성녀를 이용해서 손에 넣어야 할 게 있거든. 그래서 성녀는 이번 재판에서 꼭 이겨야 해. 흠 하나 없이.”

 

***

성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주변의 신관이 도움을 주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루이지 양, 너무해요.”

이렇게.

성녀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루이지에게 말했다.


“루이지 양을 제 진실한 친구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루이지 양, 지금이라도 얘기해 주세요. 왜 제 진정한 친구였던 당신이 제게 그리도 모진 말을 하고 계시는지.”

처연하게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린 스텔라가 루이지에게 물었다.


“설마, 오늘 재판 전 블란쳇 공작 부인을 만나기라도 했나요?”

‘거기서 왜 내가 나와?’

루이지가 버럭 소리 질렀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전 루이지 양의 마음을 이해해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없던 일을 감싸줄 수는 없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스텔라의 말은 비논리적이지만, 제법 효과적이었다. 눈물 어린 호소에 루이지는 완전히 말린 것처럼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나도 싫지만, 루이지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쟨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지?’

나 역시 그런 스텔라가 몹시 신기했다.


‘저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튀어나올 수 있지?’

물론 나도 스텔라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끔씩 나한테 보여주는 행동이나 말투 같은 것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왜 시몬 추기경은 가만히 있지?’

본래 추기경이라면 다른 그 어떤 신관보다 먼저 나서서 성녀를 옹호하고 나섰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시몬 추기경은 무척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스텔라는 울먹거리는 와중에 시몬 추기경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시몬, 뭐라도 말해주세요.”

“……스텔라 성녀님.”

“시몬은 성국의 성녀인 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추기경님의 증언이면 다들 이해해 주실 거예요.”

나는 성녀의 말에서 묘한 가시를 느꼈다.


‘성녀라는 지위를 대놓고 강조하고 있잖아?’

확실히 성국의 추기경인 그로서는 성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시몬 추기경이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뭔가 좀 변했다 싶더니 결국 성녀 편을 들겠네.’

시몬 추기경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때 황제 옆에 있던 오르테카 재상이 은근히 성녀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듯 말을 얹었다.


“폐하, 성녀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시몬 추기경은 성황 폐하의 최측근이자 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추기경 중 한 분이 아닙니까?”

“흠, 그렇다면 신전 내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확실히 잘 말할 수 있겠군.”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몬 추기경에게 물었다.


“그때 신전에서 정확히 어떤일이 벌어졌던가?”

겁에 질린 듯 보이는 성녀가 시몬 추기경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그의 옆에 붙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추기경에게 속삭였다.


“시몬, 부탁해요.”

“폐하, 그날 신전에서는…….”

입술을 깨물었던 시몬 추기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성녀님과 단둘이 신전 정원을 산책하러 나가자마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성녀가 잡고 있던 시몬 추기경의 옷소매를 놓았다. 성녀의 하늘색 눈동자가 깨진 유리처럼 흔들렸다.


“시, 시몬. 어째서……?”

시몬 추기경은 성녀를 외면하듯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스텔라 성녀님께서 그 일을 두고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자신을 밀었다고 말하고 다니셨습니다.”

황제조차 제법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시몬 추기경,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성녀님의 행동에 악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블란쳇 공작 부인께 폐를 끼친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시, 시몬! 그러지 말아요!”

스텔라가 애원하며 붙들던 성녀가 갑자기 드레스 자락을 밟고 쓰러졌다.


‘갑자기 왜?’

그때 나무들이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해냈다!

-우리가 한 거다! 저 여자가 넘어지게!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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