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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재밌지? (102/182)


102화 재밌지?
2022.11.22.



 
내 격렬한 반응에 이시도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제, 제가 키스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왜 물어보시는 건데요?”

“요정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니까.”

“요정은 키스를 하면, 무슨 일이라도 생기나 보죠?”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시도르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요정은 인간에게 마음을 줄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고요? 수명이라도 줄어드나요?”

요정에게 그런 엄청난 비밀이 있었다니!


‘잘못하다간 죽는 거 아니야?’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무섭게 생각할 건 없다. 수명과는 관련 없는 문제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요정의 힘이 약해진다는 뜻이니까.”

“왜, 왜 약해지는 거예요?”

요정의 힘이 지금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데.


‘내 유일한 무기라고.’

그래서 요정의 힘을 키우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건 알 수 없다. 나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른다. 주변에서 자주 보게 돼서 알게 된 사실에 가깝지. 내가 너에게 갑자기 키스했냐고 물어본 것도 그래서다.”

이시도르의 남색 눈동자가 일순 사나워졌다.


“네 힘이 아주 약해져 있어서.”

“음, 그렇지만 제 힘이 약해져 있는 건 제가 저주에 당해서인 걸 수도 있어요.”

“……저주?”

“네. 나무들이 얘기해 줬는데, 제 요정의 힘이 계속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있다고 했거든요.”

이시도르가 내 머리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보살핌을 받는 듯한 손길이라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뭐, 뭐 하시는 거지?’

이시도로는 고개를 저었다.


“음, 그것도 영향이 있을 수 있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 다르다. 인간을 사랑하게 된 요정의 힘은 조금 다르게 변하거든.”

“그러면 전 이제 어떻게 해요?”

“접촉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 접촉하고도 최대한 요정의 힘을 유지할 수 없나요?”

이시도르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자상한 눈빛이다.


“그 인간을 그렇게나 사랑하나?”

같은 요정이어서일까. 어쩐지 나를 보는 이시도르의 눈빛이, 철없는 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졸지에 가족 앞에서 내 연애사를 까발리는 기분이라 매우 부끄러웠다.


“그렇게라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일단 너는 사랑하는 것 같다.”

나는 상기된 두 뺨을 가리지도 못하고 물었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나요?”

그래도 표정 관리 하나는 꽤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이시도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반응을 보니, 그 인간에 대한 네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서 말이다.”

어쩌면, 며칠 전만 해도 나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 마음을 부정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달라.’

“네, 아주 많이 사랑해요. 그래서 제 마음을 바꿀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그렇게 가볍게 변할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결심하지도 못했을 거다. 요한의 무서운 모습을 보면서도 흔들리지도 않았고.


“그것참 마음에 안 드는 놈일세.”

“아직 요한은 만나보지도 않으셨잖아요.”

“그 인간 놈 이름이 요한이냐? 이름부터 참 마음에 안 드는 놈이군. 하지만 마지막 요정인 네가 그렇게나 그놈을 사랑한다면야…….”

눈살을 찌푸리던 이시도르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최대한 요정의 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애초부터 그런 걸 위해서 내가 남아 있던 거니까.”

역시 방법이 있을 줄 알았어!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이번 한 번으로 제가 다 배울 수 있을까요?”

“너무 걱정 마라. 아직 내 힘이 몇 번 더 남았으니 동일한 방법으로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다.”

이시도르 뒤쪽에 있던 나무가 곧게 뻗은 가지를 흔들었다. 푸른 잎사귀가 꽃잎처럼 떨어졌다.


‘요정의 힘을 쓰는 거다.’

정확히 요정의 힘이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무형의 힘이 요정의 힘이라는 건 여실히 느껴졌다.

푸른 잎사귀가 떨어진 자리마다 하늘색 꽃이 빠르게 자라났다.


“우와…….”

‘저렇게도 요정의 힘을 사용할 수 있구나.’

본격적으로 요정의 힘을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시도르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요정마다 다양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진 요정의 힘은 식물에 적을 파괴하는 힘을 담는 거였지.”

뒤에 있던 나무가 아무렇지 않게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저놈이 요정의 수호자였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에게 대답이 들려와 깜짝 놀랐다.


“거기 나무분도 말하실 줄 아셨어요?”

-응? 원래 나무는 다 말할 줄 아는데.

“그건 맞기는 한데…….”

내 반응에 나무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요정들끼리 아주 감동적인 만남을 하고 있길래 내가 방해할 수 있어야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네놈이 아주 반가워서 설레는 게 다 느껴졌거늘.

“시끄럽다. 가르쳐 줘야 할 게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방해하지 마라.”

-수줍어하기는.

나무의 말에 나는 신기한 눈으로 이시도르를 바라봤다.


‘나를 보고 반가워했다고?’

물론 나 같아도 마지막 요정을 보게 되면 반가울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표정이 저렇게 차갑고 무표정한데.’

이시도르의 눈빛이 따스하지 않았다면, 반가워한다고 느끼지도 못했을 정도로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시도르 녀석이 뚱하게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누구보다 네 존재를 반가워하니까. 네가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 틈틈이 어리광도 부리고.

“너도 알겠지만, 나무들은 종종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 테제비아는 나와 이 공간에 오래 남아 있어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는 한다.”

“테제비아요?”

-내 이름이란다. 이시도르 덕분에 나는 이름이 생긴 나무가 되었지.

이 자리에 있을수록 점점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되는 기분이다.


‘나한테는 아주 좋은 기회야.’

요정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나무조차도 요정의 힘에 대해서만 알 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잘 몰랐다.


‘이 기회에 요정의 힘에 대해 잘 알아두면 좋겠어.’

이시도르가 나무 기둥을 주먹을 퍽 치면서 나를 돌아봤다.


“다시 돌아와서, 요정의 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느냐다. 혹시 나무에게서 네 힘이 어떤 건지 들었느냐?”

“아, 네. 들었어요. 진실을 보는 눈이라고 했어요.”

“……진실을 보는 눈?”

어쩐지 이시도르의 반응이 조금 특이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내가 방금 네 힘을 탐색했을 때와 조금 다른 힘이 느껴져서였다.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군. 혹시 여러 가지 힘을 동시에 사용한 적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그런 적은 없었다.


“아뇨. 그런 건 없었는데요.”

“그래? 그러면 왜 네게서 여러 가지 힘이 느껴지는 거지? 다른 요정의 힘도 느껴지는 게…….”

“그게 문제가 되나요?”

반응이 너무 심각해서 물어본 건데, 이시도르는 빠르게 부정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말거라. 나쁜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 힘이 있다는 건, 그만큼 네게 많은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이시도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왜 나한테 쩔쩔매는 거 같지?’

그래서 괜히 장난기가 돌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돼요.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그, 그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복잡한 표정을 짓던 이시도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원래 어린 요정과 잘 대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혹시나 내가 이상하게 말해서 기분이 상했다면.”

남색 눈동자를 굴리던 이시도르가 심각하게 물었다.


“사탕이라도 줄까?”

“……?”

이 요정, 도대체 나를 몇 살로 보는 거지.


 

***

황실 재판은 황실의 입김이 가장 많이 들어간다.

귀족들은 본격적으로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황제를 찾아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폐하, 블란쳇 공작의 행보가 너무 패도적입니다. 황실의 권위로 한번 눌러줄 필요가-”

“성녀가 어떤 행동을 보였든 이번 대 성녀의 힘은 진짜입니다. 성국의 편을 한 번 들어주는 것이-”

이렇게 성녀 쪽에 힘을 실어주는 귀족이 있는가 하면.


“황실의 이름을 달고 여는 재판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이름도 걸려 있고요. 모든 절차가 공정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다른 귀족들의 의견대로 성국의 편을 들어줬다 황실의 명예가 떨어질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황실은 어디까지나 중재자의 입장으로-”

황제는 생각보다 꼬인 상황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특히 요한이 중간에 루이지를 고소하는 바람에 다른 재판까지도 끼게 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최측근인 오르테카 재상을 불렀다.


“재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제 생각엔 우선 상황을 더 확인해 본 뒤 판단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오르테카 재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섣부른 결정은 언제나 어리석은 선택을 불러일으키니까요.”

 

***

다음 날, 황제가 관련된 귀족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물론 한 다리 건너면 대부분의 귀족이 엮여 있기 때문에 그 수는 아주 많았다.


‘이거 생각보다 아주 큰 판이 되었는데.’

나는 어쩐지 조용한 요한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분명 뭘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특히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데다, 재판장에 늦게 도착한다고 해서 더 이상했다.


‘늦게 올 사람이 아닌데.’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걸 준비해 놓은 거다!


‘도대체 요한은 뭘 준비해 놓은 걸까?’

나도 내 나름대로 이번 황실 재판을 위해 몇 가지를 준비했다. 일단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루이지가 나를 악의적으로 모욕한 증언들을 다 수집해 놨다.


‘걱정 마십시오, 마님! 오늘을 위해 제가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제 사교계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그 머리 빈 영애를 완전히 끌어내리겠습니다.’


‘감히 블란쳇 공작가에게 싸움을 건 그 백작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습니다!’

물론 페트리샤, 베티, 에리히가 너무 열심히 해줘서 크게 내가 할 것도 없었다.


‘솔직히 이 증언들을 쏟아내기만 해도 루이지의 평판은 떨어지게 되어 있어.’

그동안 루이지가 마구 떠들어댈 수 있던 건 기록이 남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황실 재판은 재판이니만큼 모든 과정이 기록으로 남는다.


‘악소문이나 퍼뜨리고 다니는 숙녀라니.’

앞으로 사교계에서 활동하기는 어려울 이미지다.


“-그때 루이지 양은 다이아나 공주님께 일부러 블란쳇 공작 부인의 이름을 말하며 깎아내렸습니다.”

“무어라 했던가?”

“블란쳇 공작 부인을 은근히 지칭하며, ‘수준 떨어지는 평민 핏줄’이라고 했습니다.”

주변에서 과장되게 놀라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보통 귀족이라면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모욕이다.

내 얼굴을 살피며 걱정하는 귀족도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리베르탄 공작가의 입양아였지만, 리베르탄 공작가가 반역으로 사라지면서 무의미해지지 않았던가.


‘아마 루이지도 그쪽으로 정당성을 주장하겠지?’

증언하던 귀부인이 나를 힐끔 보며 말했다.


“다이아나 공주님의 행동이 거칠었던 것은 맞지만, 먼저 그릇된 행동을 한 것은 루이지 영애였습니다. 그 부분을 고려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이아나 공주가 나오기 직전, 루이지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 언제나 화려한 치장으로 나서던 전과 달리 초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황제가 루이지를 보며 물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을 모욕한 사실을 인정하는가?”

“……저는.”

루이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 도착했는지 성기사들에 둘러싸인 채 슬픈 눈으로 서 있는 스텔라 성녀가 보였다.

성녀는 손수건으로 촉촉해진 눈가를 찍고 있었다.


‘다행히 루이지를 구할 생각은 없어 보이네.’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지가 황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인정합니다. 저는 블란쳇 공작 부인을 악의적으로 모욕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죄질이 나쁜지도 알고 있었나?”

“예.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루이지는 성녀를 휙 돌아보며 외쳤다.


“그 악소문 모두, 성녀님이 제게 해주신 말이었으니까요!”

성녀가 희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렸다.


“루, 루이지!”

“그래서 저는 제 잘못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성녀와 루이지에게 쏠렸다. 하지만 난 연회장의 입구 근처에 있을 사람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당연하다는 듯 요한이 서 있었다. 나를 보며 눈짓한 요한이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말했다.


‘재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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