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성녀님만 믿었는데 (100/182)


100화 성녀님만 믿었는데
2022.11.15.



 
소문을 퍼뜨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번 일의 배후에 내가 있다는 얘기가 도는 만큼, 사람들은 새로운 가십거리를 원했을 테니까.


‘그 가십거리가 강렬할수록 더 쉬울 거고.’

성녀를 질투하는 악녀만큼, 악녀를 질투하는 성녀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자극적이다. 더 떨어질 구석 없는 나와 달리 성녀는 잃을 게 아주 많으니까.


‘거기다 애써 꾸며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소스가 참 풍부했지.’

솔직히 자세히 소문을 퍼뜨리면서, 성녀가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고의가 아니라기엔, 성녀가 나타나는 상황이 공교로운걸.’

특히 내가 봤던 어린 예스텔라를 생각해 보면 더욱 껄끄럽다.


‘죽었다고 알려진 예스텔라와 나 사이에 뭔가 관련이 있어.’

어쩌면 그것이 나도 모르는 새 나를 괴롭히던 그 저주일지도 몰랐다. 나는 성녀의 손을 잡고 위로해 주었다.


“괜찮아요, 성녀님. 그래 봐야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불과한걸요.”

“예, 예. 그렇지요.”

성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호수처럼 맑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지만 어쩌다 그런 소문이 났는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요.”

시선만 딱 보면, 성녀는 이미 나를 범인으로 단정 짓고 있는 것 같다.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성녀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불편했다. 성녀가 내게 피해를 끼치고, 짜증 나는 예스텔라여서만은 아니다.


‘성녀에게선 악의가 잘 느껴지지 않았지.’

온갖 악의를 받아온 나는 사람의 악의를 쉽게 감지했다. 그런데 스텔라는 내게 악의도 없으면서, 묘하게 불편하게 만들고는 했다.


‘그래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왜 그렇게 고민했나 싶다.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인지, 이제는 성녀에게서 악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확인을요? 하지만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를 소문의 출처를 확인하는 게 가능할까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확인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소문의 주동자를 잡아 성국의 이름으로 처벌할 거예요.”

“어떤 오해로 소문이 났을지도 모르는데 벌써 처벌 얘기를 하는 건 너무 성급한 것 아닐까요?”

성녀가 강경하게 나올수록 나는 은근슬쩍 꼬리를 마는 척 성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여태 배려와 용서를 행하셨던 성녀님답게 좀 더 온화한 태도를 취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이것이 제 개인의 일이라면 저도 그리했을 거예요. 저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답니다.”

성녀는 나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푸른 눈동자에 서린 의기양양함만은 꺾이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이건 저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소문은, 성녀인 제 명예를 더럽히는 것뿐만 아니라 성국 전체, 아울러 성국이 모시는 아테아 신의 이름마저도 모독했어요. 그건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에요.”

성녀의 태도에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한마디를 얹었다.


“확실히 성국의 성녀로서 쉬이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로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성녀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상냥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면 저,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이번 소문의 출처를 조사하는 일에 도움을 주시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블란쳇 공작 부인이?”

“예. 저와 절친한 분이자 이번 사건의 큰 관련자인 만큼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나서주시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성녀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꼭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 같은 게 감히 날 이길 수 있을 줄 알아?’

아마 나를 조사하는 역할로 밀어 넣고, 내가 소문의 주동자였다는 사실을 밝혀서 매장시킬 계획인가 보다.


‘어차피 난 사교계 인맥이 적으니 잘하기도 어려울 거고.’

상식적으로는 거절해야 맞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의 의사는 어떠한가?”

“아…… 폐하.”

일단 나는 망설이는 척 말을 끌었다.


“전 그렇게 막중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공작 부인,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아요. 공작 부인은 잘할 수 있어요.”

성녀가 잡고 있던 내 손에 힘을 주며 상냥하게 말을 얹었다.


“정 자신이 없으시다면, 제가 공작 부인이 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많이 도와드릴게요. 그러니 꼭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짐이 생각하기에도 블란쳇 공작 부인이 조사하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폐하와 성녀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예.”

성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역시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다가 그녀의 손에 꽉 힘을 주어 눌렀다.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보며 막 깨달았다는 듯 밝게 외쳤다.


“그러고 보니 저한테 마침 딱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어떤 생각이지?”

“만에 하나 놓치는 일이 아무것도 없도록 황실 재판을 열고 싶습니다.”

재판이라는 말에 자신만만하던 성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성녀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재판은 너무 과한 게 아닐까요? 잘하려는 부인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황족의 일도 아닌데 황실 재판을 여는 것은 과한 일 같아요.”

“걱정 마세요. 다행히 이번 일에는 카를로스 황태자 전하도 관련되어 있는 일이잖아요.”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거기다 다이아나 공주가 감옥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 명분도 결국 황실 모독죄와 관련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황실 재판을 열기에 과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아요.”

황실 재판은 황실에서 황족과 관련하여 큰일이 벌어졌을 때 이를 중재하기 위해 여는 재판이다.

대귀족들까지 엮이는 사건이다 보니 과정과 결과, 절차 모두 철저하게 조사하고 판결이 내려진다.


‘그리고 황실 재판에서 내려진 판결은 뒤집을 수 없지.’

아마 사교계에 큰 영향력이 없는 내가 조사하는 것보다 훨씬 까발려지는 게 많을 거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공작 부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텐데요.”

“짐의 의견 역시 그렇다.”

황제의 금안이 나를 바라봤다.


“곧 제국에서는 성녀가 정화 의식을 벌이고, 사냥 무도회를 열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황실 재판이 열리게 되면 제국민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어.”

황제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성녀는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도 저리 말씀하시네요. 공작 부인의 마음은 고맙지만, 황실 재판을 여는 건 곤란할 것 같아요.”

“그러면 성녀님께서는 황실 재판 자체가 열리는 건 동의하신다는 의미시죠?”

“저야 공작 부인에게 조사를 부탁한 만큼 공작 부인의 결정을 믿지요.”

“그러면 됐네요.”

나는 의문스러워하는 성녀를 앞에 두고 황제에게 예의 바르게 말했다.


“폐하, 다이아나 공주로 명분이 부족할 것 같다면 성녀님과 제가 동시에 공식적으로 황실 재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과 성녀가 동시에?”

“어찌 되었든 황가의 이름이 거론된 이유는 저와 성녀님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희 둘 모두가 공정하게 재판을 받으면 모든 의문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제가 팔걸이에 턱을 대며 물었다.


“짐은 방금 전 공작 부인에게 제국민의 혼란을 염려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일을 더 키워 황실 재판을 열겠다는 것이냐?”

“하지만 폐하, 현재와 같은 소문이 도는 상황에서 행사를 강행한다고 제국민의 혼란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불안감이 커질 수도 있지요.”

어느 정도 예상해 둔 상황이라 해도, 황제와 성녀를 앞에 두고 말하고 있으니 자꾸 긴장됐다.


“그런 만큼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확실히 상황을 정리한다면, 문제의 원인을 없애는 것이니 제국의 혼란을 잠재우는 데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더 예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성녀님께서도 저를 믿고 따라주신다고 했으니 가능한 일이에요. 저 혼자만 재판을 받았다면 공정성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요.”

“공작 부인, 저는…….”

“이게 다 성녀님 덕분이에요. 성녀님과 제 우정을 모두의 앞에서 확실히 알리고,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기뻐요. 성녀님도 그러시죠?”

성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하지만 공작 부인, 황실 재판을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는 건 아닐까요?”

그녀가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자, 온몸 가득 뿌듯함이 차올랐다.


‘쟤가 기분 나빠하는 걸 보니까 내가 아주 잘했나 보네.’

성녀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가슴 한쪽에 손을 올리며 황제에게 호소했다.


“폐하, 저 역시 공작 부인의 마음에는 동의하지만 중요한 일인 만큼 다른 분들과 신중히 논의해 본 뒤 결정하는 것이 나을 듯해요.”

“하긴, 황실 재판에는 여러 귀족이 동원되는 일이니.”

“예. 저도 추기경께 말씀을 전하고 상의해야 할 것 같아요. 성녀라고 해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거든요, 공작 부인도 제 마음 이해하시죠?”

성녀가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해 줬다.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네?”

“성녀님께서 이번 소문은 성녀님뿐만 아니라 성국, 더 크게는 아테아 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그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다 들어준 거다.


“설마 다른 곳도 아닌 성국이 신의 명예와 관련된 일에 반대할 리가 없어요.”

“그, 그래도 다른 귀족들의 동의도 받아야…….”

성녀가 마지막 구원줄을 보는 것처럼 황제를 바라봤다. 그동안 성녀의 편에 선 듯했던 황제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

“짐이 알아서 모집해 보겠다. 최대한 공정하게.”

성녀, 스텔라의 표정이 파리하게 굳었다.


“그, 그렇다면 폐하.”

“오르테카 재상, 스텔라 성녀가 정화 의식을 치르는 즉시 이번 사건에 대한 황실 재판을 열 수 있도록 하라.”

나는 그녀를 보며 황제와 몰래 눈빛을 교환했다.


‘역시 미리 거래해 두기를 잘했어.’

자고로 이런 함정을 팔 땐, 중요 인물과는 미리 거래해 두는 게 가장 확실하다.


‘황제의 명으로 너를 이곳에 부를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어야지.’

 

***

이사벨라 국왕 대리에게서 상황을 다 들었을 때, 내가 내린 결정은 황제를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녀의 편에 카를로스 황태자가 있어.’

그렇다면 나는 황태자를 권력으로 누를 수 있는 자를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요한에게 부탁해 황제와의 자리를 마련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이 짐에게 할 말이 있다고?”

“예, 폐하.”

나는 황제를 보며 우아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성녀를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성녀를 불러달라?”

황제의 금안이 나를 훑어내렸다.


“짐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예.”

나는 그런 황제를 보며 태연하게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찾고 계신 보물의 위치를 제가 알고 있으니까요.”

저번에 황제의 허리춤에서 봤던 보물, 그 보물을 이용하는 거다.


‘나도 그게 어디 있는진 모르지만.’

최소한 황제가 그것을 몹시 원한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내 당돌한 말에 황제가 작게 미간을 좁혔다.


“짐이 탐내는 보물? 우습군. 공작 부인은 지금 짐을 무엇으로 보는 거지?”

“정녕 짚이는 게 없으십니까?”

“설령 있다 해도 신하 된 도리로서 감히 짐과 거래하겠다는 것이냐?”

나는 노여움 가득해 보이는 황제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금이 간 황실의 옥쇄.”

“……!”

“옥쇄를 잃어버리신 것을 언제까지 감추려 하셨습니까.”

당연히 나와 황제 사이의 거래는 잘 이루어졌다. 황제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

시몬 추기경이 성녀를 찾았다.


“성녀님, 도대체 황실에서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황실 재판이라니요.”

“아, 시몬 추기경.”

성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시몬 추기경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가련한 모습도 추기경의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성황 폐하께서 성녀의 단독행동에 매우 분노하셨습니다. 인장을 멋대로 사용하신 것도 모자라 황실에서 재판을 받으시겠다니요!”

시몬 추기경은 이번 기회야말로 성녀의 단독행동을 바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성녀가 보인 반응은 시몬 추기경이 바라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성녀가 슬픈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단지 신께서 이끄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신께서 성녀님께 이런 행동을 시키셨다고요?”

성녀는 슬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 추기경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신의 뜻이란 인간의 사고로는 당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저 역시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요. 하지만 아테아 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시몬 추기경이 머리를 짚었다.


“아테아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시련을…….”

그때 한 귀족 영애가 다급한 걸음으로 방 안으로 돌진했다.


“성녀님! 이제 저 어떻게 해요!”

시몬 추기경에 이어 루이지까지 달려들자, 성녀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루이지.”

“블란쳇 공작이 블란쳇 공작 부인을 모욕했다고 저를 고소했어요!”

루이지가 울먹거리며 성녀에게 마구 소리쳤다.


“거기다 여기 성녀님께서 현장을 증언해 주실 거란 개소리도 적혀 있어요. 이거 뭐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는 성녀님을 믿고 있었는데!”

스텔라는 루이지의 징징거림을 들으며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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