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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네 곁에 있을게 (97/182)


97화 네 곁에 있을게
2022.11.04.



 
요한의 얼굴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붉은 눈동자에 가득한 살벌한 눈빛만이, 그의 불쾌한 심경을 드러낼 뿐이었다.


“성녀의 파트너는 황태자 아니었던가?”

“공작님도 알고 계셨군요?”

성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요. 지금 제 파트너는 카를로스 황태자 전하시죠. 황제 폐하께서 제국에 아는 분이 적은 제 처지를 배려해 주신 덕분이지요.”

긴 속눈썹을 내리깐 성녀는 입가에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거기에 제 의사는 없었어요.”

성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요한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화사한 금발을 귀 뒤로 넘기자 고생 한 번 한 적 없는 듯한 하얗고 깨끗한 목선이 두드러졌다.

달짝지근한 백합향이 진해졌다. 성녀를 바라보는 요한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요한. 꼭 살아남아야 한다. 약속해.’

처절하게 퍼지던 피비린내와 모든 것을 살라 먹을 듯이 치솟던 화마. 귀가 먹먹해지고, 질식할 것처럼 목이 조여왔다.

기억들이 온몸을 잠식했다.


‘요한 블란쳇. 불에 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아나? 살갗이 타들어가면서 차라리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게 되지.’


‘넌 참 운이 좋아. 저런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다니. 그런 면에서 네 가족들은 아주 운이 나빴지만.’

요한이 주먹에 힘을 주었다. 당장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싶다. 가족들의 비명이 애써 묻어둔 폭력성을 충동질했다.


“요한?”

성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요한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성녀의 얼굴을 꿰뚫어 볼 듯 노려보았다.


‘역시.’

스텔라는 환희를 감추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진짜 자신의 반려가 누구인지, 그도 본능적으로 알아챈 거야.’

요한 블란쳇 공작은 혼란스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빌려준 자리를 탐낸 가짜와, 진짜 부인으로서 에스텔이 받아야 할 대우를 가져야 마땅했을 자신 사이에서.


‘하지만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대로 내가 그를 구원하고-’

요한은 더 이상 증오를 삼키지 못했다.

스텔라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남자의 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상대의 숨통을 틀어쥘 듯이.


‘저 여자를 죽여버려.’

그의 손이 스텔라의 목을 꺾어버릴 듯 움직이던 찰나.


“거기까지만 하시지요.”

유들유들한 태도의 목소리,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강해 보이는 누군가의 손이 요한의 손을 잡았다.

오르테카 재상이 실눈으로 웃으며 스텔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요한의 냉혹한 시선이 오르테카 재상을 향했다. 재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황제의 적을 잔인하게 숙청하는 황제의 독뱀이었다.


“죄송합니다, 블란쳇 공작님.”

재상은 이례적으로 요한한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고개까지 깊게 숙이면서.


“성녀님이 무도회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신 모양입니다. 신전에서 곱게 자라신 분이라 이렇게 종종 미숙한 모습을 보이시곤 합니다.”

우아하게 성녀를 깎아내리는 말이다.

요한이 설핏 눈썹을 모았다. 신전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황제의 측근답지 않은 태도다.


‘황제가 시킨 일이군.’

오르테카 재상이 요한의 마음에 공감한다는 듯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의 파트너는 황태자 전하십니다. 그렇게 정해졌지요. 공작님께서 성녀님의 실수를 가벼이 넘어가 주신다면, 이대로 제가 데려가 성녀님께 단단히 황궁의 예법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스텔라는 재상의 말에 시무룩하게 항변했다.


“……재상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공작님과 알아서 잘 대화하고 있었어요. 아무런 사심 없이 서로 친구가 되고 있었는걸요.”

“나는 네 친구 따위가 아니다.”

요한이 날 선 목소리로 경고했다. 자기도 모르게 흉포한 살의가 드러났다.


“성녀님, 말했습니다.”

재상이 옆에서 성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녀를 보호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재상은 그녀를 위협하고 있었다.


“자중하시라고요. 특히 황실의 귀빈인 블란쳇 공작께는요.”

스텔라는 더 제멋대로 굴지 못했다.

요한은 자기가 느낀 깊은 살의와 에스텔 사이에서 어지러웠다.

죽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날부터, 모든 원수를 씹어 잔인하게 응징하기만을 고대해 왔다.

그래서 그녀를 죽이려고도 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살의가 떠올랐던 적은 기필코 없었다.


‘도대체 저 여자는 뭐지?’

리베르탄보다 더 요한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증오를 건드리는 여자.

다시 머리가 찌를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한은 그 고통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요한이 성녀를 무시하고 갔다.

당장 이딴 여자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찾는 것.’

요한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였다. 블란쳇을 멸문시킨 원수들을 죽이고자 했다.


‘에스텔은…….’

에스텔은 그 원수들과 달랐다.

이미 죽었다는 친딸 예스텔라를 끄집어내 모독할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 제 아내가 된 에스텔에게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요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스텔이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방을 떠날 때부터 애타게 그리웠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볼 수 없는 이 순간이 지옥인 것 같았다.

에스텔이 필요했다.

너무도 절절히.

***



“브, 블란쳇 공작님!”

스텔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요한을 보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아직 많이 혼란스럽겠지.’

오르테카 재상이 스텔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성녀님, 오늘 일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작님의 의중을 확인해 봤을 뿐이에요. 저도 공작님을 곤란하게 할 마음은 없었고요. 한 번 더 물어볼 수는 있잖아요?”

스텔라가 애교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공작님의 뜻은 이해했어요. 저도 공작님을 곤란하게 만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공작님의 의사와 별개로 언제든 당신의 곁에 공작님을 위해 기도해 줄 한 사람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황궁 벽에 있는 창문으로 따듯한 햇살이 쏟아졌다. 성녀의 푸른 눈이 고결하게 반짝였다. 기도하듯 조신하게 두 손까지 모은 그녀에게선 한 점의 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상님도 제 마음 이해하시죠?”

“아아. 그러시군요.”

오르테카 재상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성녀는 블란쳇 공작에게 큰 관심이 있다.’

정작 공작은 성녀에게 매우 적대적인 것 같았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겠어.’

스텔라는 성국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성녀다.

신성력도 신성력이지만, 아테아 신도가 많은 제국에서는 그 자체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로이엄 왕국 발표회에서 한 거짓말도 흐지부지 넘어간 거겠지.’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차마 성국에서 공인한 성녀를 감히 의심하기 어려웠을 터이니.

오르테카 재상이 스텔라를 보며 자상하게 웃었다.


“성녀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다만 성녀님의 후견인으로서 다른 자들이 순진한 성녀님의 마음을 곡해할까 두렵군요.”

“어머나, 그러게요. 그런 이들이 있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시몬 추기경의 부탁을 받아 성녀님을 살피기로 한 만큼 제가 많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스텔라가 재상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

나는 로이엄 왕비가 준 태피스트리를 확인했다.


‘이시도르가 맞아.’

심지어 그 이름 근처에서 요정의 힘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태피스트리를 한번 뜯어보겠느냐?

“네, 태피스트리를 뜯어보라고요?”

-그래. 아마 그 이시도르라는 이름의 요정이 다른 요정을 위해서 무언가를 남겨둔 게 틀림없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걸 확인해 봐야지 않겠느냐?

“그건 그런데…….”

이 태피스트리는 이사벨라 왕비가 선물해 준 물건이다.


“남의 선물을 함부로 부서도 되는 걸까요?”

-흠, 너는 요정이지 않느냐. 인간의 예법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을 거다.

-그래. 꼭 필요한 일인데 어쩌겠느냐. 너한테 태피스트리를 선물해 준 인간도 너한테 더 도움이 되는 걸 바랄 거다.

평범한 태피스트리도 아니고, 이사벨라 왕비가 본인의 집무실에 애지중지하며 걸어두었던 물건이다.


‘혹시나 그 태피스트리를 어디에 뒀냐고 찾아보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내가 로이엄 왕국에 은인 대우를 받고 있다지만, 충분히 감정이 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다.


“어쩔 수 없다. 비슷한 걸 또 구하는 수밖에.”

나는 태피스트리를 손에 쥐고 ‘이시도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부분을 후두둑 잡아당겼다.

[이시도르.]

태피스트리는 점점 뜯어졌지만, 그 가운데에 있던 이시도르의 이름은 점점 선명해졌다. 아롱거리는 반짝이는 요정의 기운 사이로 환영 같은 게 스치듯 보였다.


‘어린 요한?’

어린 나이의 요한이 어머니, 누이와 함께 황궁의 침실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전대 공작 부인인 요한의 어머니가 릴리를 위해 수건으로 동물을 접는 게 보였다.


‘자, 릴리. 이거 보렴. 토끼를 닮았지?’


‘요한, 요한도 봤어? 엄마가 수건으로 토끼를 만들었어!’


‘그래, 봤다.’


‘엄마. 다른 동물도 만들어줄 수 있어요?’


‘그럼. 요한도 만들 줄 알지? 릴리한테 한번 만들어볼래?’

어린 요한은 묘하게 귀찮아 보이는 듯했지만, 릴리가 칭얼거리자 수건을 접어서 백조를 만들어줬다.


‘자, 됐지?’


‘와! 요한은 대단해! 어쩜 이런 걸 바로 만들 수 있지? 나도 할 수 있을까?’


‘대충 접으면 바로 모양이 나오는 건데 뭐.’

하지만 그 당당한 포부와 달리 릴리는 손재주가 별로 없는 듯했다. 요한이 단번에 백조를 만들었던 것과 달리 릴리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 식으로 접는 게 아니야. 그냥 따라서 접어봐.’


‘으음. 너무 어려운데…….’

그때 남매를 흐뭇하게 보고 있던 요한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작 부인, 폐하께서 공작 부인을 부르십니다.’


‘아, 그런가요?’

일순 전대 공작 부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우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차림새를 정돈했다.


‘릴리, 요한. 엄마 잠시 나갔다가 올게. 둘이서 얌전히 있으렴.’

그때 내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게 보였다.


‘저건 에메랄드 귀걸이?’

전대 공작 부인은 소매 속에 에메랄드 귀걸이 한쪽을 조심스레 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왜 저러시는 거지?’

벌컥-

그때 요한이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왔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는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보이던 환영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어라? 태피스트리도-’

이상하지만 눈 깜빡할 사이 내가 뜯었던 태피스트리도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이것도 요정의 힘인가?’

하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요한이었다. 나는 태피스트리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처럼 요한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요한 왔어?”

요한은 가만히 선 채로 말없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었다. 어쩐지 그 표정이 묘하게 지친 것처럼 느껴졌다.


“……에스텔.”

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큰 팔이 숨 쉴 구색도 없이 옭아맸다.

절박한 몸짓이었다.

요한은 잠시도 참을 수 없다는 듯 내 몸을 꽉 안은 채, 목덜미에 높은 콧대를 문질렀다. 내 체취를 맡는 두꺼운 그의 흉통이 들썩였다.

한참 숨이 막혔다가 쉴 수 있게 된 사람 같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지만 물어보기에는, 요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요한이 이럴 만한 일은…… 리베르탄밖에 없어.’

하지만 리베르탄과 관련된 복수는 거의 다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 요한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할 만한 일은 없을 텐데.

말없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가파르게 호흡하던 요한이 천천히 얼굴을 떼어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해 있었다.


 


“부인.”

그가 느긋하게 내 손을 깍지를 꼈다.


“부인이 내 곁에 있어서 기뻐.”

요한은 나를 바라본 채 천천히 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눈 하나 제대로 깜빡하지 못하고 잘생긴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애타는 빛을 띠었다.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줘.”

작게 속삭인 그가 여전히 나를 바라본 채, 손등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느긋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 뜨거운 입술이 손등 위를 지그시 눌렀다.

이제 요한의 시선은 애타는 것을 넘어서 평생을 굶주린 자처럼 격렬한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타오르고 있었다.

맥박을 타고 흐르는 내 심장 소리, 사그락거리는 침대보의 소리, 고요한 공기마저도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응.”

그때까지도 그의 진득한 시선은 여전히 내게서 계속 떨어질 줄 모르고 타올랐다. 그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시선에 사로잡혔다.


“나 어디 안 가고 계속 요한 곁에 있을 거야.”

나는 요한에게 하는지, 내게 하는지 모를 기분으로 대답했다.

***

한창 사교 모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지루한 얼굴로 영애들을 상대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떠들고 있을 셈이지?’

이렇게 평범한 귀족 영애처럼 있을 때면, 기사 작위를 받아 마음껏 말을 타고 검을 수련하던 때가 떠올랐다.


‘작위를 박탈당한 게 억울하지는 않지만…….’

그때 루이지 영애가 친근한 얼굴로 다이아나에게 다가왔다.


“어머, 다이아나 공주님. 참 오랜만에 뵙네요.”

“아, 루이지 영애.”

“소식은 들었어요. 블란쳇 공작 때문에 기사 작위를 잃어버리셨다면서요.”

루이지 영애는 다이아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투덜거렸다.


“사람이 어쩜 그런대요. 다이아나 공주님께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 못된 여자에게 속았을 뿐인데 기사 작위까지 잃게 하다니.”

“그건 제 잘못이었습니다.”

“아이 참, 공주님. 지금 이 근처엔 블란쳇 공작 부인이 안 계세요.”

루이지 영애가 비밀을 얘기하듯 은근히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수준 떨어지는 평민 핏줄을 아무 데나 부를 순 없는 노릇이고요. 공주님도 이해하시죠?”

짜악!

루이지 영애는 별안간 뺨을 맞아 눈을 끔뻑거렸다. 물론 그 주위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아나 역시 자신의 손을 보고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루이지 영애. 미안해요.”

“지, 지금 이게 무슨-”

“너무 사람 같지 않은 말을 들어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어요.”

물론 다이아나는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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