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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가자, 여보 (95/182)


95화 가자, 여보
2022.10.28.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요정이라면요?

-……요정이라니.

검은 넝쿨은 허탈한 목소리로 헛웃음 쳤다.


-이제 와서 이렇게 되는 것도 내 운명이란 말인가?

사연이 있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말이 되돌아왔다.


‘요정이랑 관련된 아주 중요한 정보야.’

요정에 대한 정보는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로이엄 왕국의 태피스트리 정도밖에 얻지 못했다.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해.’

검은 넝쿨은 지금도 카를로스와 기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오는 목소리에 적의 같은 건 없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은 그만하는 게 어때요?

-알아듣지 못할 말이라. 그것도 사실이군. 이제 남은 요정은 너뿐일 테니까.

-혹시 당신은 요정인가요?

검은 넝쿨이 카를로스의 검을 빼앗아 후려쳤다. 근처의 기사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게 보였다.


-…….

침묵 끝에 돌아온 목소리엔 묘한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한때는 요정이 맞았다. 이제는 요정이라고 말하기엔 우습겠군.

어쨌거나 과거에는 요정이 맞았다는 거다.


-당신은 요정이 맞군요.

-다 옛날이야기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모르겠나?

나는 검은 넝쿨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기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검은 넝쿨은 우악스럽게 자라나며 기사들의 힘을 점점 압도해 가고 있었다.


-아주 추악한 괴물이지. 제 뜻과 무관하게 육체도 잃어버린 채 명령된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니.

분명 검은 넝쿨은 식물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지?’

검은 넝쿨과 대화를 나눌수록 검은 넝쿨 건너편에 있는 그의 모습이 설핏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절망하다 못해 체념한 자의 얼굴, 눈물이 흐르다 못해 메말라버린 모습이었다.

그가 요정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그가 안타까워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 요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어찌 보면 내가 여태까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건 마지막 요정인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군.

검은 넝쿨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에 요정은 더 이상 없다. 모두 멸종했다.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라면 네가 남아 있다는 것뿐이다.

검은 넝쿨도 쉽지 않은 얘기인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 모든 건 요정을 완전히 멸종시키려는 자 때문에 생겨났다.

-그게 누군데요?

-우리도 모른다. 단지 이 모든 시작에 신의 피를 이었던 요정의 존재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순간 검은 넝쿨 하나가 강철처럼 날카로워지며 나를 향해 꽂힐 듯이 쏘아졌다.

카앙!


“위험합니다, 마님!”

상대하고 있던 기사가 검으로 넝쿨을 막아냈다. 하지만 넝쿨과 부딪친 검은 부서지고 말았다. 기사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으며 단검을 꺼냈다.


-미안하다. 이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요정에 대한 정보가 중요하다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지금 나는 어둠의 조종을 받는 마물이나 다름없다. 더 강한 힘만이 나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그러니까 당장 없앨 수 있는 방법이…….

그러던 때였다. 나를 향해 날아오던 검은 넝쿨이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그리고 푸른 불꽃은 마법진까지 삼켜댔다.

키에에엑!

검은 넝쿨이 비명을 질러댔다. 공중에 푸른 불씨가 꽃가루처럼 퍼뜨려졌다. 불씨가 다른 검은 넝쿨에 옮겨붙으며 화마가 퍼졌다.

순간 떠오른 건 단 한 사람이었다.

방금 전까지 애타게 이름을 불렀던 남자. 내가 죽도록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은 남자.

그걸 증명하듯 바깥쪽에서 검은 넝쿨을 처리해 나를 지키려 했던 기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블란쳇 공작님이 오셨다! 모두 조금만 더 버텨라! 공작님께서 마법으로 처리해 주실 것이다!”

“사악한 마물을 처리해라!”

기사들의 외침 사이로, 남자의 인영이 선명해졌다. 수려한 남자는 일직선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래 걸렸지?”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방금 전까지 기사들을 죽여댈 것처럼 난리 치던 검은 넝쿨이 속수무책으로 불탔다. 넝쿨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맥없이 죽어갔다.

떨어지는 불꽃 사이로, 요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정장에, 단정한 모습 모두 내가 알고 있던 요한의 모습 그대로였다.


“요한. 너무 늦었잖아.”

그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주위에 다른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요한이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이 됐다.

왜인지 눈시울이 붉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 같았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

“생각보다 처리할 일이 많았어. 네 연락을 받는 순간 바로 오고 싶었는데. 저 마물이 마법을 방해해서 위치가 분명하지 않더라고.”

조금 걸린다 싶더니, 저 검은 넝쿨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내 마도구의 작동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마물을 자기 마음대로 불러대다니. 상황이 아주 재밌어졌어.”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요한도 이번 습격의 배후를 몰라?”

“그러니까.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딴 짓거리를 할 놈이 그리 많지 않은데.”

요한의 설명을 듣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요정을 멸종시킨 존재와 관련되어 있어.’

어쩌면 이번 습격 자체가 내가 요정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


‘누구지? 누가 내가 요정이라는 걸 알고 있지?’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검은 넝쿨에게 물었다.


-지금 요한이 당신을 공격했는데 괜찮은 건가요? 이렇게 사라지는…….

마차 주위에 있는 검은 넝쿨들은 거의 무너졌다. 남은 것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기 직전의 넝쿨들뿐이었다.


-그래, 검은 넝쿨이 나였으니 나는 이제 죽는다.

-아…….

-어린 요정아, 슬퍼하지 말거라. 너를 지켜주는 자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요정의 마지막 희망을 내 손으로 없애는 비극이 벌어졌을 터이니.

검은 넝쿨은 한결 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죽음은 나에게 축복이다. 더 이상 고통받는 일은 없겠구나.

-당신을 구할 방법이 없었을까요?

나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그러자 검은 넝쿨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건 없다. 영혼을 잃어버린 존재에게 어찌 구원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그나마 가장 나은 순간이다.

이제 검은 넝쿨은 나뭇잎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쓰레기처럼 바닥에 버려져 있는 이파리 몇 개가 불꽃에 재가 되어갔다.

나는 곧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검은 넝쿨에게 물었다.


-당신 이름은 무엇인가요?

일순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바람결에 실려 날아가던 한 줌의 재가 겨우 한 단어를 남겨줬다.


-이시도르.

그 순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와 대화하고 있던 요정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기분이 이상해.’

두려움에 꼭 쥐고 있던 손에 묘한 기운이 들어왔다. 말도 안 되지만, 울창한 숲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시도르, 이시도르.’

나는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중얼거렸다.

***

카를로스가 허탈한 얼굴로 불에 타 완전히 상황이 종료되어 버린 전장을 바라봤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의 경지에 이른 자신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카를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건 도대체, 무슨 힘이지?”

“전하, 저건 블란쳇 공작의 마법입니다.”

황궁 기사의 대답에 카를로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단지, 저런 힘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블란쳇 공작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이었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것인 만큼 숨길 수도 없었다.


“저건…… 황궁에서 전해 들었던 것보다 더 엄청나지 않은가. 저걸 인간의 힘이라 할 수 있나?”

카를로스도 블란쳇 공작의 경지에 대해서는 전해 들은 적 있다.


‘황궁 마법사도 상대할 수 없는 엄청난 마법사.’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래서야, 완전히 밀리지 않는가.”

그 순간 요한이 에스텔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요한은 에스텔의 손을 잡고 카를로스에게로 걸어왔다.

요한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그래, 반갑군.”

“제 부인을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마물을 완전히 없앤 건 공작이지 않은가.”

“그래도 전하가 없었다면 지키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요한은 에스텔의 허리를 감싸 쥔 채 다정한 눈으로 에스텔을 바라봤다. 에스텔은 그런 요한의 태도에 부끄러운 듯 두 볼을 붉혔다.


“요한의 말이 맞아요.”

두 사람의 관계는 너무 견고해 보였다.


‘나로는 안 된다는 건가?’

카를로스의 온몸에 박탈감이 차올랐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비참함이다. 머리로는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기이한 갈증이 계속 느껴졌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다.”

“무엇을 말입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과 단둘이 대화하고 싶은 이야기다.”

요한이 짙은 눈썹을 추겨올렸다. 하지만 에스텔을 구해준 공로가 있는 이상 마땅히 잘라내기도 어려웠다.


“요한, 내가 알아서 잘해볼게.”

에스텔이 요한을 살짝 밀어내며 나섰다.


“……알았어. 문제가 생기면 바로 나를 불러.”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요한이 에스텔의 말 한마디에 바로 물러났다.

요한이 마물을 상대하느라 다친 다른 기사에게 가며 거리가 벌어지자, 에스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전하. 제게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솔직하게 대답해다오.”

카를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좋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나?”

카를로스는 자꾸만 목구멍이 메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사랑스러워 보이는 에스텔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혹시나, 어떤 감정의 편린이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그런 적 없어요.”

“……정말 단 한 번도? 블란쳇 공작과 결혼했다고 과거의 감정마저 모두 부정하지 말고, 솔직히 얘기해다오.”

“전하께서 어떤 말을 원하시든 제 결론은 동일해요. 전 이미 결혼했고, 저는 제 남편인 요한을 사랑해요.”

사랑.


“정말 사랑한다고?”

“네, 사랑해요.”

요한의 이름을 말하며 에스텔이 배시시 웃었다. 카를로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말랑말랑하고 수줍은 미소였다.


“그래도 이번에 전하께서 저를 구해주셨기 때문에 저희 사이에 있었던 악연은 모두 잊어드릴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게 서로에게 더 편하잖아요. 어쩌면 전하께서도 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러시는 걸 수도 있고.”

에스텔은 카를로스를 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전하께도 좋은 인연이 찾아올 거예요.”

그 말을 남긴 에스텔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요한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요한의 팔짱을 낀 에스텔이 재잘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에스텔이 하는 말은 카를로스에게도 생생히 들렸다.


“가자, 여보.”

 

 

***

다행히 황태자는 내 말을 잘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황궁에 도착한 뒤엔 황태자를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의외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들었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스텔라 성녀님께 한눈에 반하셨대요!”

“사실 두 분이 엄청 큰 인연이 있었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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