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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요한! (94/182)


94화 요한!
2022.10.25.



 
요한은 여전히 가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에서 일말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다. 리안드로가 눈매를 살짝 좁혔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나 역시 펠시스 후작가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거다.’

아무리 블란쳇 공작이 온 제국에 손을 뻗어놨다 한들, 이런 비밀까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뭐, 말은 대강 알아듣겠어.”

요한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지금 에스텔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란 거다.”

“자신감이 아주 대단한데?”

“사실을 얘기하는 것뿐이다. 부외자인 너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부외자.

요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자신감이 아니라 어리석은 거였군. 어리석은 걸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갑자기 변해버린 기세에 리안드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긴장했다. 요한이 리안드로에게 느긋하게 한 발자국 다가가 경고했다.


“네가 파악한 내 부인의 운명이란 게 뭔데?”

“그건…….”

리안드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후대의 펠시스 가주에게 전하는 문서다.]

지하에 감춰져 있던 가주의 보관실. 그곳에서 기이한 기록이 있었다. 리안드로의 아버지가 집필한 기록이었다.

[제물을 찾았다. 다행히 제물은 어떤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주가 특별히 잘 먹힌 모양이다.]

[수월한 처리를 위해 리베르탄 공작가가 제물을 입양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제물에게 있는 보호가 뛰어나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영혼의 상처를 받지 않는 것 같다.]

본능적으로 리안드로는 저 제물이 에스텔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이 변했다. 펠시스 후작가의 명예를 위해 모든 일을 빠르게 정리하기로 했다.]

[현재 리베르탄 공작가와의 연을 정리할 기회를 노리는 중이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리안드로는 기록에서 말하는 저주나 진실에 대해 더 알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정도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게 있었다.


‘펠시스 후작가에서, 리베르탄 공작가와 손잡고 에스텔을 제물로 삼았다.’

평생 기사로서 살아온 리안드로는 저주나 제물에 대해 무지했다. 하지만 끔찍한 행위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악녀라 매도했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다.

하지만 리안드로는 에스텔을 구원하고 속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피해서는 안 됐다.


“그건, 말해줄 수 없다. 네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라는 것뿐.”

“재밌네.”

요한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딴 말로 내가 넘어가 줄 거라 여겼나? 펠시스 후작가에서 리베르탄 공작가와 손잡고 추악한 짓거리를 했다면-”

그러던 때였다. 검은 정장 아래 두르고 있던 팔찌에 따끔하고 전기가 올랐다.


-요한! 요한!

에스텔이 다급하게 그를 부르고 있었다.

***

카를로스 황태자가 칼을 뽑아 들며 외쳤다.


“습격자들에게서 공작 부인을 구해라!”

황태자의 뒤로 기사 여럿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습격자들은 예상치 못한 지원군의 등장에 바짝 긴장했다.


“젠장! 벌써 지원군이 도착하다니!”

“아무래도 이번 계획은-”

습격자 중 하나가 비장하게 외쳤다.


“상대가 늘었다고 해도 당황하지 마라! 전투에서 애써 이길 필요 없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타깃을 납치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미 카를로스는 내 근처까지 도착했다.

말을 타고 달려오며 가속도가 붙은 카를로스의 검과 습격자의 검이 매섭게 부딪쳤다.

제국에 유명하던 황태자의 실력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습격자들은 카를로스의 검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황태자랑 습격자들이 아는 사이 같지는 않은데.’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심각했다. 맹렬하게 부딪치는 검격 역시 적을 대하는 듯했다.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는데…….’

카를로스의 손에 습격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자, 습격자들이 초조하게 외쳤다.


“공작 부인만 노려! 공작 부인만 노리라고!”

그러나 분위기는 이미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걱정 마십시오, 마님. 저희 실력으로 뚫는 건 어려웠어도 지키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 말 그대로 호위 기사들은 훨씬 안정적인 모습으로 나를 지키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있는 기사한테 조심스럽게 물었다.


“습격자들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나요?”

습격자들은 모두 검은색 복면을 쓰고 있는 데다 말투도 평범한 편이어서 특징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짐작 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에요, 그럴 만하죠.”

요한을 부르긴 했지만, 요한의 도움 없이도 해결될 것 같다. 미세하게 빛나는 마도구를 곁눈질한 뒤 요한을 찾았다.


‘요한은 안 오는 건가?’

“이번 작전은 실패다. 모두 후퇴하라!”

남은 수가 몇 안 남은 습격자들은 결국 도주를 선택했다.


“기사들은 모두 저 무도한 습격자들을 쫓아라!”

카를로스는 기사들에게 명령한 뒤 호흡을 고르며 내게 다가왔다. 호위 기사가 황태자에게 먼저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블란쳇 공작 부인.”

카를로스의 금안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묘한 기대감이 어린 눈빛이다.


“큼, 공작 부인은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전하께서 구해주신 덕분에 무사합니다.”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 나는 예의 있게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카를로스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감사할 필요 없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까.”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주셨는데 당연한 일이라니요.”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틀린 말은 아니군. 내 도움이 없었다면 공작 부인에겐 아주 큰 문제가 생길 뻔했을 테니까. 보아하니 그 정도 기사들론 대응하긴 어려웠을 거고.”

카를로스는 오만한 눈으로 호위 기사들을 쭉 훑었다. 호위 기사들은 면목이 없는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마음에 안 들어.’

카를로스의 연극이든 뭐든, 어쨌거나 나는 황태자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이들을 깔보는 느낌이라 들어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도움을 주고도 기분 상하게 하기 쉽지 않은데.’

생각해 보면 카를로스는 만날 때마다 늘 이랬던 거 같다.


“이렇게 습격당할 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언제든 이런 습격에 대비해서 붙어 있는 게 호위 기사 아닌가? 최소한 호위 대상이 불안해할 만한 상황은 만들지 않도록 해야지. 너희의 생각은 어떻지?”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호위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애초에 마님께서 습격을 눈치채기도 전에 처리하는 게 맞습니다. 저희의 무능으로 마님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 죄, 죽어 마땅합니다.”

“그럴 것까지야…….”

“옹호하지 말거라. 본인 스스로 죄를 인정한다지 않느냐?”

카를로스는 그것 보라는 듯 내게 턱짓했다. 제 얼굴이 잘난 것을 잘 아는 카를로스답게 오만하지만 근사한 모습이었다.


‘저것 때문에 아직도 황태자를 흠모하는 영애들이 넘쳐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저 잘생긴 얼굴 아래 얼마나 못난 심보가 숨겨져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백마 탄 왕자처럼 잘생긴 황태자의 모습이 재수 없어 보였다.


“고개 들어. 잘못에 대한 이야기는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간 처리할 일이니까.”

“예, 마님.”

나는 백금발을 쓸어넘기며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전하께서 때마침 이 근처를 지나가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전하께선 어쩌다 저희를 발견하게 되셨나요?”

“우연히 가던 길에 보게 되었다.”

“정말요? 원래라면 황태자 전하께선 지금 황제 폐하의 곁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방금 전 황제는 황궁 근처 숲에서 귀빈들과 인사하고 있었다. 그런 자리라면 무릇 황태자도 곁에 있어야 했다.


“원래 나도 그곳에 있기는 했다.”

그 말뜻을 이해한 카를로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우연히 널 발견하게 되었던 거니까.”

“정말 다행인 우연이네요.”

“뭐, 네가 걱정돼서 따라왔던 것도 맞다. 네가 위험한 걸 두고 볼 수 없었으니.”

아까부터 카를로스가 나한테 말을 놓고 있었다. 묘하게 거슬려서 고마운 사람인데도 심사가 계속 뒤틀렸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거절을 뭐라고 생각한 거지?’

리안드로도 그렇고, 카를로스도 그렇고 내 말을 까먹는 저주라도 걸린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 말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더 대놓고 말해야 하나?’

나는 황태자를 보며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전하, 전하께서는 저를 스토킹하신 거군요?”

“……뭐?”

예상하지 못한 말인지 카를로스가 흠칫 굳었다.


“네가 잘 가고 있나 지켜보려고만 한 거다. 그러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나선 거고.”

“전하께선 선량한 스토커시다?”

“난 엄연히……!”

그때 습격자들을 쫓아갔던 황태자의 기사들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전하. 숲에 들어가자마자 인기척이 끊겨 더 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기척이 끊겼다?”

“예. 아무래도 이 숲에 따로 준비를 해두었던 모양입니다. 저희가 쫓아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치며 사라졌습니다.”

“제법 위험한 놈들이군.”

카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상황이 복잡해졌으니, 이제부터 공작 부인은 내가 에스코트하겠다.”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놀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저런 호위들을 데리고 움직이다 언제 또 위험한 습격에 당할지 모르지 않나. 그러니 내가 특별히 너를 보호하겠다는 거다.”

“아, 블란쳇 공작저까지 데려다주신다는 건가요?”

‘설마 황궁으로 데려가겠다는 거겠어.’

하지만 카를로스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엄청난 막가파였다.


“당연히 황궁으로 가야지.”

“어째서 황궁으로……?”

“블란쳇 공작가는 이번 여름 축제에서 황실에 머무르기로 하지 않았나? 어차피 황궁에 가기로 한 거, 이르게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라.”

카를로스가 바로 나를 에스코트할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자기 말에 태우려는 것 같았다.


 


“너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호위랑 같이 있는 것보단 그편이 안심되지 않나?”

“송구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카를로스의 금안이 점점 짙어졌다. 나는 지지 않고 그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


“전하께서 저를 구해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제 남편에게 말해서 보상할게요. 하지만 전하의 호위를 받고 황궁을 가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

“무엇보다 제가 싫어요. 이것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카를로스는 말없이 나를 노려봤다. 위험하게 눈동자를 번뜩이던 그가 시체를 발로 툭 차며, 자신이 처리한 습격자를 들어 올렸다.


“이걸 보고도?”

카를로스가 시체의 복면을 벗겼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끔찍해.’

잘은 모르겠지만, 나를 납치하라고 시킨 존재가 잔혹한 존재라는 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때 참혹한 얼굴 아래로 검은빛이 보였다.


‘뭔가 움직이는데?’

복면인의 머리를 감싼 검은빛이 꿈틀거렸다. 황태자가 복면을 흔들며 거들먹거렸다.


“정녕 내 호위가 필요없-”

“전하, 잠깐만요……!”

검게 잠식된 시체가 재가 되어 후두둑 스러졌다.


“이건 또 뭐야!”

휘우우우웅-!

주위에 있던 다른 시체들 역시 재가 되어 단번에 스러졌다. 그리고 시체들 위로 괴이한 식물 줄기 같은 형체가 마구 자라났다.

키에에엑-

검은색 줄기들이 바닥을 쿵쿵 내리찍으며 주위를 후려치고 삼켰다.

줄기에 닿은 곳마다 검은색으로 변하며 재로 변했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모습이다.


“하다 하다 어디서 또 이런 마수가 튀어나와서!”

카를로스가 이를 아득 갈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줄기는 하나만이 아니었다. 카를로스가 줄기 몇 개를 상대하는 동안 다른 줄기 몇 개가 땅에서 계속 돋아났다.


“마님. 벗어나야 합니다.”

기사가 뒤로 나를 데려가려 했지만, 검은 줄기는 나를 둘러싸듯 마구 자라났다.


“이건 도대체…….”

기사들이 곤란한 침음을 삼키고, 나 역시 주먹을 꽉 쥐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뭔가 이상한데.’

꿈틀거리며 발버둥 치는 검은 줄기를 보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아.’

설마 저것도 식물이라고 나한테 말 시키는 건가?


-나무님들! 저 이상한 식물이 나타났는데요. 검은색 넝쿨 같은 줄기들이에요. 혹시 뭔가 아세요?

-……검은색 넝쿨?

-네. 저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아서요.

검은 줄기가 나를 향해 뻗어온다.


“마님! 도망치십시오!”

나는 최대한 차분한 얼굴로 나무의 말을 건넸다.


-이봐요! 내 말 들려요?

그때 나를 향해 돌진하던 검은 줄기가 잠시 멈췄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 가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이 상황은…… 뭐지?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요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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