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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네 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있지? (93/182)


93화 네 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있지?
2022.10.21.



 
황제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짐의 판단이 괜찮았나?”

황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친근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래서 더 무섭지.’

겉으로만 보면 요한도 완벽한 신사 아닌가. 실제로 현 황제는 강한 외가를 가진 형제를 모두 몰살시킨 전적이 있었다.


“신하 된 자로서 폐하의 현명함에 놀라게 되는군요.”

“그렇지 않다면 공작이 내 판단에 반기를 들었을 것 아닌가?”

“폐하께서 이리 현명하신데 제가 어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거 예의를 차리는 듯하지만, 결국 황제한테 경고하는 거잖아.’

황제의 판단이 현명해지지 않았을 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황제한테 저렇게 해도 되는 건가?’

황제가 허허 너털웃음 소리를 냈다.


“짐이 이래서 자네를 좋아하지. 자네의 가치만큼만 행동하지. 신전에 대한 자네의 의사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예정인가?”

“예. 성국은 물론이고 성녀랑도 엮일 생각이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용만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게 제법 많아 보이던데.”

“제 부인이 조금이라도 불안하거나 싫어할 만한 일엔 일말의 여지도 없습니다.”

“블란쳇 공작의 입에서 이런 로맨틱한 말이 나올 줄이야.”

황제와 요한 사이에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두 사람 사이를 살폈다.


‘요한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

그런 내 판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제였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제국의 충실한 기둥이 되어주게.”

황제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황제의 허리띠에서 찰랑거리는 장신구가 눈에 띄었다.


‘도장 같은 건가?’

황제가 차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잔뜩 금이 가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차림새랑 되게 느낌이 다른데.’

전체적으로 깔끔한 의복에 걸치기에는 과할 정도로 어색한 장신구였다. 나는 불현듯 내 능력에 대해 되새겼다.


‘저게 황제의 비밀인가?’

바로 짚이는 것이 없었다.

요한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진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 긴장되지?’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그 여자, 최대한 빨리 치울게.”

다행히 요한이 걱정하고 있던 것은 다른 쪽이었다.


“그 여자라면…….”

“성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들을 사람도 없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괜히 놀라 주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요한은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왜?”

“누가 내 얘기를 들었든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러니까 너는 한 가지만 얘기해 주면 돼. 그 여자, 거슬리잖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지는 않아.”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신전의 성녀인 데다 아직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 행동으로 충분히 큰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아?”

요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싸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힘든 게 있으면 그때 요한한테 말할게. 내가 또 이르는 거 하나는 잘하거든?”

솔직히 요한과 함께 성녀 얘기를 더 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았다.


‘괜히 요한이 더 그 여자를 신경 쓰는 것도 싫어.’

어차피 성녀의 일방적인 수작뿐이라면, 존재 자체를 잊는 게 더 좋은 방안일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한은 황궁에서 축제를 보내본 적 있어?”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종종 축제 때 황궁에 귀빈으로 묶은 적 있었다. 물론 입양아인 내게 그런 건 사치였다.


‘우리가 네 체면 생각해서 끌고 가지 않는 걸 다행이라 생각하렴.’

그럴 때면, 리베르탄 공작가에 홀로 남겨진 에스텔은 노골적인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그나마 방패막이 역할로 딸 행세나마 할 수 있게 해주던 리베르탄 공작 부부마저 사라졌으니까.

남겨진 나는 황궁에 간 공작 부부가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빌었다.


‘직접 묶어 보면 어떤 곳인지 궁금하네.’

요한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몇 번은?”

“어땠어?”

“답답하기도 하고, 신기할 때도 있었지.”

나도 모르게 놀라 요한을 올려다봤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왜?”

“아, 요한이 뭔가를 신기해했다는 게 안 어울려서.”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요한이 짓고 있는 미소가 다정한 빛으로 물들었다.


“으음. 뭐든지 다 경험해 본 것처럼 보여서 그랬지.”

‘요한이 과거에 겪었던 일이야.’

몸에 긴장감이 올랐다. 요한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준 건 처음이었다.

그때 요한이 걸음을 멈췄다.


‘마차?’

블란쳇 공작가의 마차가 앞에 있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요한이 바로 안으로 나를 들여보내 줬다.

일단 나는 요한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마차에 올랐다.


“지금 바로 돌아가게? 황제 폐하와 인사밖에 안 했는데?”

“그 정도면 귀빈으로서 할 건 다 했지. 그거 외에 할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보통 다른 귀족들과 교류를 하곤 하니까.”

요한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잠시 고민하는 티를 냈다.


“혹시 남아서 더 하고 싶은 게 있었어? 그러면 지금 바로 돌아가도 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었어. 난 원래 새로운 장소로 놀러 가는 건 좋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요한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

“어느 정도는.”

요한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는 잘 몰라. 네가 원하면, 평생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해줄게.”

‘응?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지?’

나는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요한이랑 있을 땐 상관없거든. 오히려 안심도 되고, 새로운 재미가 되니까 좋지.”

요한은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지?’

흑막인 요한의 오해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도 요한이랑 저택에 돌아가서 같이 있을 거니까 상관없어.”

“이거 어쩌지.”

요한이 눈썹을 살짝 내렸다.


“지금 급한 볼일이 있어서 너를 혼자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급한 볼일?”

“응. 바로 끝나자마자 보러 갈 거긴 한데,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여기서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 혼자 뒀다가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해.”

요한의 큰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택에 먼저 돌아가 있을 수 있지?”

“내가 뭐 어린앤가. 마차 타고 돌아가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무슨 일 생기면 꼭 나를 불러. 알았지?”

마지막까지 요한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하여튼 나를 너무 어린애로 본다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요한의 생각만큼 순진하지도, 남에게 쉽게 휘둘려서 상처받을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요한이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게 좋았다.


“내가 그렇게 걱정되면 최대한 빨리 돌아오든가.”

솔직히 요한의 걱정과 별개로 황성에서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이다. 상시 기사단이 돌아다니고, 마차도 많이 지나가는 곳이라 안전은 두말할 것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무슨 일이 생기기도 어렵겠는데.’

 

***

에스텔이 탄 마차가 사라졌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요한은 여전히 마차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나오지?”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요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거기 있는 것 다 알고 있으니 시간 끌지 말고 나와. 강제로 끌어내야 나올 셈인가?”

그러자 나무들 사이로 갑옷을 입은 리안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안드로가 무표정한 얼굴로 요한을 노려봤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살랑거리는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리안드로는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대었고, 요한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분명 내 부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지 말라 했을 텐데.”

“요한 블란쳇. 오늘 난 너와 싸우러 온 게 아니다.”

“그럴 거였다면, 남의 부인을 건드리지 말지 그랬어.”

요한의 빈정거림에 리안드로가 얼굴을 미미하게 일그러뜨렸다.


“그건-”

그러던 리안드로는 주먹을 꽉 쥔 채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래, 거기엔 내 잘못도 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누구 마음대로 중요하지 않단 거지?”

“넌 에스텔 리베르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마치 에스텔에 대해 본인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요한은 리안드로의 반응이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뭔가를 알게 됐나?’

리안드로를 상대하는 건 불쾌한 일이지만, 에스텔을 위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참아줄 수 있었다.

요한은 일부러 리안드로를 자극하듯 말했다.


“아무 사이 아닌 사람보다야 많이 알고 있지.”

“에스텔이 어쩌다 리베르탄 공작가에 입양되었는지는 모를 텐데.”

“그러는 넌 알고 있나?”

“물론.”

리안드로의 눈빛에 묘한 슬픔이 차올랐다.


“에스텔 리베르탄을 가장 먼저 찾아낸 것은 펠시스 후작가였다. 그리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고아원에 넣어 리베르탄 공작가가 입양할 수 있게 했지.”

“…….”

“그리고 서로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예스텔라와 내가 약혼했던 거다.”

 

 

***

쿵! 쿠웅-! 키이이익!

마차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쿠션감으로 아무 흔들림 없던 마차가 멈췄다. 잠시 졸고 있던 내가 일어나 바깥을 살폈다.


‘저건 뭐지……?’

밖에는 검은 복면을 쓴 남자들이 블란쳇 호위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습격이다!’

기사 하나가 정신을 차린 나를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마님! 정신이 드십니까?”

“언제부터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블란쳇 기사단만으로는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마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탈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와 습격자들끼리 싸우는 치열한 전장의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속이 매슥거렸다.


‘습격이라…… 누구지?’

나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기사에게 물었다.


“여기서 내 안전은 보장될까?”

“블란쳇 기사단 모두가 나서서 마님을 지켜내겠습니다.”

“알았어.”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나는 기사의 손을 잡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마차 밖을 나서자, 바깥의 위기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습격자들은 원형으로 우리를 두른 채 공격하고 있었다.

비극적이게도, 우리 편보다 수도 많고 실력도 더 강해 보였다.


‘블란쳇 기사단이 밀릴 정도면 상당한 세력이란 건데.’

나를 목격한 습격자들이 소리쳤다.


“블란쳇 공작 부인이 나왔다! 모두 블란쳇 공작 부인을 노려라!”

“마님을 지켜라!”

내 호위 기사와 습격자들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내 주위에 붙은 두 명의 기사가 내 안전을 위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퇴로를 고민했다.


‘맞아, 요한이 자기를 부르랬어.’

요한이 선물로 준 마도구를 잊지 않아서 다행이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요한. 지금 나 이상한 습격에 당한 것 같아.”

마법이 걸린 팔찌에 마력이 돌며 작동했다.


‘바로 요한이 소환되는 구조는 아닌가 보네.’

하긴. 전에 요한이 공간 이동은 많은 제약이 따른다고 하긴 했다.


‘그래도 요한한테 확실히 연락이 갔겠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도구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요한, 요한! 나 잘못하면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

그때 멀리서 군마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요한이?’

하지만.


“멈춰라!”

안타깝게도 나를 구해주러 나타난 사람은 요한이 아니었다. 백마를 타고 나타난 황태자 카를로스가 위풍당당하게 달려왔다.


“지금 공작 부인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나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며 옆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지금 황태자가 저희한테 도움이 될까요?”

“그러지 않겠습니까?”

“황태자가…… 과연……?”

내 불신 가득한 표정에 기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태자 카를로스는 그야말로 동화 속 왕자님처럼 달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타이밍이 좀 이상한데. 황태자가 일부러 짜고 치고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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