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황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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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황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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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황제의 초대
2022.10.14.
싸늘한 정적.
신관들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에리히는 기다렸다는 듯 사납게 몰아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만해요, 에리히.”
“예, 마님.”
광견처럼 날뛰던 에리히가 단번에 조용해지자, 신관들은 과장 조금 섞어 경외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리히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한 번은 실수였다 해도 여러 번은 더 이상 실수라 할 수 없지요. 그것이 일국의 성녀라면 더더욱.”
꿀꺽, 시몬 추기경이 침을 삼켰다.
“저 역시 블란쳇 공작 부인으로서의 입장이 있다 보니 마냥 이해하고 넘길 수 없어요.”
“예, 저 역시 이해합니다. 공작 부인께서 원하시는 보상이 있으시다면…….”
딱 봐도 책임자로 보이는 시몬 추기경의 입에서 보상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입가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손사래 쳤다.
‘어디 쉽게 보상으로 끝내려고.’
“보상을 바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상황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신관님들의 잘못이 뭐가 있겠어요. 게다가 제가 깨어날 수 있었던 건 신관님들께서 저를 치료해 주신 덕분이잖아요.”
예상치 못한 말에 시몬 추기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면 이 일을 넘어가시겠다는…….”
“네. 저를 치료해 주신 은인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엄밀히 말해 성녀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증거도 증인도 없는 상황이니, 문제 삼기도 어렵다.
‘이번 사건이 공론화되어 봐야 내 손해야.’
굳이 성녀의 죄를 꼽자면, 성녀는 아내인 내 앞에서 요한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행세했을 뿐이니까.
내가 피를 토한 것도 정황적으로 오해받기 딱 좋지만,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나중에 가서 신관들은 성녀인 스텔라를 비호하려 할 거다.
‘아마 나만 이상하고 예민한 여자가 되겠지.’
어쩌면 실수로 남편 이름을 부른 것 가지고 피까지 토하며 난리 친 미친 여자가 될 수 있다. 성녀는 기다렸다는 듯 용서해 달라면서 자기 이미지를 챙기겠지.
그러니 내가 가장 유리한 지금, 얻어낼 수 있는 걸 얻어내야 한다.
“신전에서 이번 일을 조용히 덮을 수 있을 때 평화롭게 넘어가려, 흑…….”
눈에 힘을 주고 오래 뜨고 있자,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시몬 추기경이 경악했다.
“고, 공작 부인?!”
“지금 많이 힘드시면 치료를 더-”
일부러 슬픈 듯 고개를 숙였다. 신관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아직 속상한 마음이 덜 풀렸던 모양이에요.”
“…….”
“하지만 제 의지는 변함없어요. 제가 우연히 아팠던 것으로 넘어가요.”
나는 신관들 얼굴을 하나하나 보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시몬 추기경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 그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야기가 잘못 퍼져 공작 부인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는데…….”
“전 괜찮아요. 사람들이 무어라 나쁘게 떠드는 건 익숙하니까요. 그리고 신관님들 모두 신의 부름을 받아 제국을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이시잖아요.”
갑자기 칭찬받은 신관들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분들께 힘든 일을 더 드리고 싶지 않아요.”
“아테아 신이시여…….”
벅차오르는 감동을 참기 힘들었던 신관 몇은 기도하듯 조용히 신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다.
시몬 추기경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아테아 신을 모시는 신관으로서 상처 입으신 공작 부인께 아무런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것은 도리에 어긋납니다.”
“그런가요?”
“예. 그러니 사소하게라도 저희에게 부탁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정 그러시다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전 그거면 충분해요.”
부탁 하나.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 조건. 하지만 분위기에 취한 시몬 추기경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시겠습니까? 추기경이긴 하나 제 이름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맞습니다, 공작 부인. 아무리 저희를 위해서라지만 조금 더 공작 부인의 안위를 생각해 주시는 것이…….”
그래도 신관이라서인지 다들 나를 걱정해 주고 있다.
‘어쩌면 이래서 스텔라한테 더 휘둘렸나?’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이건 당장 나한테 가장 필요한 거였다.
‘앞으로 스텔라와 일이 더 생길지 모르니, 신전 내부에 내 편이 필요해.’
나는 욕심 하나 없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웃었다.
“어찌 신관님들을 상대로 제 욕심을 챙길 수 있겠어요. 전 그 정도로 충분해요.”
신관 몇이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거렸다.
“성녀님께선 어쩌다 이런 분과 그런 오해를…….”
“소문 속의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이리도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셨다니.”
잠시 침묵하며 나를 보던 시몬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테아 신의 이름으로 약속드리겠습니다.”
다른 신관들 역시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지금 내 모습 때문에, 크게 무리한 부탁은 안 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림없지!’
성녀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알차게 사용해 주마.
***
카를로스는 뒤늦게 눈을 뜨고 일어났다.
“기다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 그의 곁에는 충성스러운 시종 벤뿐이었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지금 여기가 어디지?”
“황태자궁입니다. 전하께서 ‘장소’에 쓰러져 있으셔서 바로 모셔왔습니다. 혹시나 해서 다른 시종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카를로스의 눈에 팔 쪽에 난 흉이 보였다.
“역시 꿈이 아니었어.”
의식을 위해 사용된 흉터는 무슨 수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다. 흉터가 곧 제물의 성공을 나타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라지면 대가 역시 사라진다. 대신 의식에 사용한 것이라 끝난 뒤엔 고통은 남지 않는다.
“벤, 나 외에 ‘장소’에 출입한 자는 없었나?”
“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군.”
솔직히 카를로스는 황실 동굴에서 봤던 에스텔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애원하고, 매달렸던 모습이 싫어서.
‘결국 나를 외면했어.’
네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는데, 거절당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내가 만난 건 에스텔이 맞아.’
애초에 그동안 꿈에서 보던 에스텔과는 느낌이 아예 달랐다. 에스텔이 혹할 만한 조건이나 제안 따위를 내밀었어야 했는데.
정작 만나자마자 한 건 머저리처럼 매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리베르탄을 조건으로 매달리는 것도 안 되고…….’
지금 에스텔은 절대 그의 손을 붙잡지 않을 거다. 카를로스는 짜증스럽게 그 사실을 인정하며, 과거와 완전히 바뀌어버린 상황을 되새겼다.
‘나와 다르게, 그 여잔 이제 내가 필요 없어진 거야.’
그렇다면 카를로스가 다시 필요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면 된다. 과거 카를로스밖에 남지 않아, 애절한 편지를 보냈던 그때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놔야 해.”
“예?”
“벤, 블란쳇 공작에 대한 약점을 죄다 조사해 와.”
시종 벤이 곤란한 듯 대답했다.
“전하, 전에도 비슷한 명을 내리셨지만 전하와 달리 블란쳇 공작에게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건 없었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카를로스가 쾅! 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놈도 사람인 이상 치명적인 문제 가 있을 거 아닌가! 결혼하기 전에 사소한 여자 문제라도 있었겠지!”
“블란쳇 공작은 전하와 달리 깔끔하게 다 정리해서 그런 게 없었습니다.”
“……그놈은 밑바닥부터 올라온 놈이잖아. 상식적으로 그 과정에서 추잡한 짓 정도는 해야 했을 거 아냐?”
물론 요한은 유서 깊은 블란쳇 공작가의 혈통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란죄가 씌워 있던 사람이라 자수성가한 남자의 표본처럼 불리기도 했다.
“블란쳇 상단이라든가, 정치 공작이나 하는 데에서 사소한 의혹 같은 것도 없어?”
“일단 제가 조사한 바로는 아무 문제 없이 깨끗합니다.”
카를로스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 오만한 성격에?”
카를로스도 오만하기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만난 요한은 카를로스보다 더한 남자였다.
“제가 그래도 전하의 시종인데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는 걸까요?”
“어디 한번 말해보든가.”
“블란쳇 공작님께서 오만하신 분이긴 한데, 그분은 다른 귀족과 다릅니다. 행동에 오만함을 앞세우지 않으시니까요.”
“…….”
“황태자 전하께서도 기품 있으시지만, 블란쳇 공작님은 뵙고 있으면 태생적으로 다른 듯한 우월감이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스스로를 낮추고 다니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존경심을 이끌어내시는 것 같기도요…….”
벤은 슬금슬금 카를로스의 눈치를 봤다. 카를로스는 물건을 집어 던질 것처럼 이를 꽉 깨물었지만, 다행히 그에게 물건을 던지거나 화를 풀지는 않았다.
“젠장, 방법이 없단 건가?”
카를로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그보다 전하, 밖에 전하를 찾아온 손님이 있습니다.”
“누군데?”
“신전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만나기만 하면 바로 알아보고 반겨주실 거라며 신전의 증표를 보여줬습니다. 혹시 신전과 약속하신 것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무슨 헛소리야. 당장 쫓아내.”
평소처럼 성의 없이 손을 내젓던 카를로스의 몸이 멈칫 굳었다.
“잠깐, 내가 알아볼 거라 했다고?”
“예,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혹시 여자인가?”
“어…… 여자기는 합니다.”
“일단 데려와 봐.”
“예?”
벤이 카를로스에게 되물었다.
“그 여자분이 예쁜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런데도요?”
“누가 뭐래?”
“평소 전하께서 만나셨던 분은 다 기억하는데…… 저 몰래 만났던 분이라서 그러십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카를로스가 으르렁거리자 벤은 서둘러 그 손님을 데려왔다. 손님은 허름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약속 없이 찾아와 주신 저를 궁에 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고 투명한 목소리였지만, 카를로스는 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에스텔이 아니군. 내가 웃기지도 않는 기대를 했어.’
얼굴을 찌푸린 카를로스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내가 보면 한 번에 널 알아볼 거라고?”
“황궁에 제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나 황태자 전하를 뵈었으니 저도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겠지요.”
허름한 후드 속에 감춰져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한 금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여자는 후광처럼 빛나는 금발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결하고 단아한 백합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저는 성국의 성녀 스텔라라고 합니다.”
“성녀라…… 들어본 적은 있지.”
성녀는 자신을 훑어보는 카를로스의 시선에 싱긋 웃어 보였다.
“전하께서 저를 알고 계셨다니, 영광이에요.”
“그래서 그 대단한 성녀가 날 찾아온 이유는 뭐지?”
“그건…….”
성녀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애수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뜻하지 않은 죄에 휘둘려 고통받는 걸 보았기 때문이에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카를로스의 비웃음에도 스텔라는 성녀답게 품위를 잃지 않았다. 우아하게 시종이 내준 차를 마신 스텔라가 나직이 말했다.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인 걸 알아요. 이것이 다 신의 말씀을 전하기엔 부족한 제 부덕이겠지요. 하지만 제 눈에는…….”
성녀의 시선이 카를로스의 팔 부근에 닿았다.
“전하의 아픔이 보이는걸요.”
카를로스는 왠지 흉터를 들킨 것만 같아 갑자기 불쾌해졌다. 눈썹을 찡그린 카를로스가 성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뭘 해주겠단 거지?”
“제가 전하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해주세요.”
“뭐?”
“그러면 전하께 큰 축복을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전하께서 아픔을 잊을 수 있도록.”
스텔라의 푸른 눈이 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착각했어. 남의 것인지도 잊고 살 정도로 염치가 없었다니.’
하지만 성녀인 그녀는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 자리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
나는 요한이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볼까 두려웠다.
“잘 다녀왔어?”
하지만 요한은 신전에서 다녀온 내게 별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그림이나 선물을 사 왔다며 다른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요한은 안 궁금한가?’
하지만 그래서 반대로 나 역시 요한에게 그때 일에 대해 더 물어보기 어려웠다.
‘요한이 아무것도 안 묻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정령 아기와 단란하게 놀아주는 요한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요한은 정령 아기에게 새로 산 딸랑이를 흔들어주고 있었다.
“이게 재밌나?”
정령 아기가 짧은 팔을 버둥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아부, 아뷰뷰!”
정령 아기는 나와 요한에게만 낯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요한을 부모라 생각해서인지, 같이 있는 걸 좋아했다.
딸랑이를 흔들어주던 요한이 물었다.
“에스텔, 무슨 고민 있어?”
“아, 아니야. 나도 흔들어볼래.”
하지만 정령 아기는 자기 스스로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손잡이를 줘 봤다.
“으, 으이우.”
톡, 또르르.
하지만 아직 작은 손으로는 잘 잡히지 않았다. 딸랑이가 자꾸 굴러떨어졌다.
“아, 잡기는 어려운가 보네.”
결국 내가 귀여운 딸랑이를 마저 흔들어주게 되었다.
‘정령이라서인가?’
정령 아기랑 놀고 있다 보면 복잡한 생각은 다 잊혀지고 그냥 웃게 된다. 그렇게 요한과 함께 놀아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막 재웠을 때쯤이었다.
황궁에서 손님이 도착했다.
“황제 폐하께서 블란쳇 공작님께 보내신 전갈입니다.”
[이번 여름 축제는 페스칼로스 숲에서 사냥 무도회를 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