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왜 가짜를 안고 계세요? (90/182)


90화 왜 가짜를 안고 계세요?
20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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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당히 황태자와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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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황태자하고는 그렇게 된 거야. 갑자기 마법진 같은 게 발동해서 나를 쫓아오는 게 무섭긴 했지만 요한이 구해줘서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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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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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말했는지 모르겠네.”

요한은 내 얘기를 다 듣고도 성에 차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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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해했어. 그 황태자 놈이 다 문제였다는 거잖아.”

……뭔가 생략이 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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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 황태자 놈이 다 문제인 건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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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요한이 이해한 대로가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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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 그대로 두면 안 되겠네.”

요한은 제국의 황태자를 대하는 것치고 과도하게 불손한 태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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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에서 못 벗어나게 근신으로 처박아두면 정신 차릴 줄 알았더니.”

그런 일을 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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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흑막은 달라. 황태자는 승부가 안 되네.’

황태자는 유일한 후계자라는 이유로 많은 후광을 두르고 있는데도 그랬다. 앞으로도 황태자 문제는 요한이 알아서 잘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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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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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짐작 가는 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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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정이라서 이동한 줄 알았는데.’

요한은 또 요한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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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걸.’

나는 눈을 반짝이며 요한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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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떤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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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비밀.”

요한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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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 말해주면 재미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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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어디 있어.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다 말해주는 게 더 재밌거든?”

나는 요한의 팔을 잡아당기며 집요하게 물어봤다. 어깨를 으쓱인 요한이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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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르는 척하시겠다?’

그렇지만 이건 내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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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집요한지 보여주지.’

요한은 어느새 긴 다리로 벌써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새삼 요한의 덩치가 크다는 게 실감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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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얘기 안 해줄 거야?”

나는 쪼르르 그의 뒤를 향해 달려가며 쉬지 않고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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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태자 얘기 다 해줬는데, 이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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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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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그렇게 말 안 해주는데.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평소라면 이렇게 하면 다 얘기해 줬는데.

요한은 나를 모르는 척하면서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 내 걸음 속도에 맞춰 걸어주고 있어서 의문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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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있는 건가?’

평소라면 두세 번 만에 얘기해 줄 요한이라 더 의문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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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진짜 그냥 놀리는 건가?’

간혹가다 날 놀리겠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도 해서 영 의심을 풀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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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 짐작하는 거라도 얘기해 줘.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요한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동굴의 울퉁불퉁한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때 요한이 바로 손을 뻗어 내 몸을 잡아주었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요한의 얼굴에 붙었다. 요한이 눈매를 반달처럼 접으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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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야지.”

왠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라 나는 삐진 것처럼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순간 요한이 도착한 장소가 어딘지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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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내가 처음 떨어진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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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여기였나.”

요한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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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의 심각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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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슨 큰 문제라도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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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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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인데…….?”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불길하게 발광하던 마법진의 빛은 잠잠해져 있었다.

요한은 마법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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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을 바치는 마법진이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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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되지 않은 게 그렇게 큰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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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진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건 더 큰 제물이 필요하다는 거거든. 그리고 저 마법 같은 경우에는-”

요한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내게 말하려 할 때였다. 유심히 마법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내가 요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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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제물을 바쳐야 완성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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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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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마법진의 문장 배치가 좀 잘못된 것 같아서. 그 배치만 잘 맞추면 완성되지 않으려나?”

요한은 날렵한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나를 바라봤다. 이윽고 마법진과 나를 번갈아 보던 요한이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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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칸? 저 마법진의 글씨가 보여?”

나는 요한의 질문이 더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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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글씨가 안 보이나?’

하지만 그런 것치곤 마법진 구석구석에 적혀 있는 글씨는 깨진 것 없이 매우 선명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요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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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도 고대어를 읽을 수 있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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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수야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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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려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고대어를 배웠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교사를 초빙해서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요한도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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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흑막이 못 하는 게 있으면 안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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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요한 눈에는 안 보이는 건가? 아니면 좀 흐릿해 보이는 부분이라도 있어?”

마법진의 고대어들은 몇 가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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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마법진이 좀 익숙해 보인다 했어. 내가 리베르탄에서 고생해서 배운 성경 내용이라 그랬네.’

[인간이여, 네 욕망을 증명하라.]

[신의 이름 앞에 네 희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깨달아라.]

[신께서는 악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를 내리셨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받은 일인가.]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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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마법진의 문장이 성경에 쓰인 문장이라는 게 좀 흥미롭네.’

설명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마법진에서 문장이 새겨진 부분은 석판처럼 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석판 하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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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가볍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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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맨 위에 있는 문장이 성서 마지막 문장이니까 끝에 가는 게 맞는 거 같아서.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그렇게 석판을 맨 마지막 칸에 올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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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야 성서의 구절이랑 맞는 것 같아서.”

내가 내려놓은 비석이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마법진에서 다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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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내가 뭘 한 것 같은데 이거 심각한 건 아니-”

막 요한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 순간 내 주위에 있던 마법진에 심상치 않은 빛이 빛나며 주위가 확 바뀌었다.

***

꿈처럼 아득한 곳이었다.

나는 이상한 지하실에 누워 있었다. 사지가 묶인 것도 아닌데 온몸에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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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그래서 지금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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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물어보지 말고 평소에 하던 대로 해. 당신이 잘하던 거잖아.”

내 앞에는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누워 있는 나를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쑥덕거렸다. 리베르탄 공작 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짝 바닥에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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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른 노예 놈들 교육하듯이 때려요?”

차악-

단순히 바닥을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허공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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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이런 걸 겪은 적 있었나?’

하지만 이런 곳에 끌려와 놓고 까먹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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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대놓고 날 때린 적이 별로 없는데…….’

리베르탄 공작 데미안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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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확실히 문제군. 너무 티가 나다가 저게 허튼 마음을 품고 잘못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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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그 말이에요. 저게 다른 버릇 없는 것들처럼 죽으면 어떻게 해요? 가뜩이나 몸도 약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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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튼튼해지기 전까지는 내버려 두는 게 어떨까? 어차피 시간은 많지 않나.”

데미안의 말에 로자리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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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려나. 그래요, 얼마 전 감기에 걸렸던데 그거라도 다 낫고 하는 게 좋겠어요.”

데미안이 경직되어 있는 나를 안아 들려고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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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그 순간 지하실을 밝히던 불이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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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가짜를 안고 계세요?”

멀어서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무척 귀에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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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짜를 정말 저 대신 딸처럼 생각하셨던 거예요?”

로자리아가 채찍을 바닥에 버리고 당장 소녀에게 달려갔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리고, 숨이 졸리는 것처럼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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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어디 저 애가 너 대신이나 될 수 있겠니? 엄마 속상하게 왜 그렇게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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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잠깐이라도 저 가짜가 제 자리를 누리고 있는 거잖아요. 방금 전에도 가짜를 괴롭히려다 마는 거 다 봤어요.”

결국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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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엄마 아빠한테 저 같은 건 죽어서 버린 딸인 거예요?”

그제야 나는 소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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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텔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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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텔라가 살아 있긴 하지만,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진심으로 딸이 죽었다고 슬퍼했다. 두 사람이 날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연기를 잘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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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뭐지? 이번에도 이상한 꿈을 꾸는 건가?’

그때 리베르탄 공작이 바닥에 날 내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내가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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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우리가 널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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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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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저 가짜는 너를 위해 존재하는 것뿐이다.”

리베르탄 공작은 담담한 얼굴로 로자리아가 바닥에 던진 채찍을 주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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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행동은 저 애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채찍이 내 몸을 향해 날아들려고 할 때였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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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눈앞에 에리히와 신관들이 보였다. 나를 본 신관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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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깨어나셨군요. 괜찮으십니까?”

 

***

황실 감옥 내부.

리베르탄 공작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초췌한 몰골의 리베르탄 공작 부인이 리베르탄 공작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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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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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되긴. 우리에겐 에스텔 그 아이밖에 없는데. 분명 이번에 살아난 것도 에스텔 그 애가 우리를 죽게 놔두지 못해서-”

그 순간 리베르탄 공작이 윽, 하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로자리아가 놀라 공작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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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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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상한 게 떠올라서.”

리베르탄 공작은 먹은 것 없는 속이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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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은 우리 스텔라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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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요?”

로자리아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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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탄 공작도 그렇고 슬프게 죽은 애 얘기를 왜 꺼내요. 그 애는…….”

그 순간 로자리아도 뭔가 생각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

방금 전까지 내가 무슨 일을 겪다 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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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이상한 꿈을 꾼 거랑 비슷한가?’

아무래도 나무들하고 얘기를 더 나눠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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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건 그거고.’

신관들이 내게 쩔쩔매고, 에리히가 짜증 내고 있는 걸 보아하니, 내가 쓰러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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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우리 집 싸가지.’

내 편일 땐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구나. 시몬 추기경이 따듯한 물을 마시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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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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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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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마님께서 성녀님과 단둘이 산책하던 중에 쓰러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에리히의 담담한 말에 상황의 심각성이 절절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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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께서 깨어나지 않으시면 성국과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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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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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란쳇 공작가의 안주인을 정식으로 초대해놓고, 변을 당하게 했으나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요.”

나를 초대한 편지에는 성황의 인장찍혀 있었다. 그리고 성황은 성국 그 자체나 다름없는 권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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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책임이 있겠지만…….’

그래도 전쟁이라니! 신관들이 저렇게 초췌해진 것이 슬슬 이해가 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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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성녀는 중간에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살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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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성녀님 말씀대로 이번에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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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제 아픈 곳은 없어요.”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치고 내 몸 상태는 아주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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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신성력으로 나를 치료해서 그런가?’

내가 요정이라는 비밀과 관련이 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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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과 무슨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시지요?”

시몬 추기경이 아주 절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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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께서는 공작 부인께서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셔서 자신을 밀치고 피를 토했다고 하셨습니다.”

아하, 그런 식으로 말하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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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기를 밀었다라.’

갑자기 그때 벌어졌던 작위적인 일 모두가 이해되었다. 돌부리에 넘어진 듯이 누군가 밀어서 넘어진 것처럼 굴었던 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오던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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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나를 모함하기 위해서 준비했던 거겠지?’

아마 다른 걸 더 준비했을지는 모르나, 내가 쓰러지자 당황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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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렇게 완전히 거짓말을 해버리면 문제가 생길 텐데.’

성녀는 이러다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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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나는 슬픈 듯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시몬 추기경이 힐끔 내 눈치를 살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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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의 말씀과 다른 게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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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무 송구스럽게도 당시엔 너무 아파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에리히가 바로 내 편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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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거 아닙니까? 마님께선 피를 토하셨습니다! 그런데 고작 바닥에서 넘어진 걸 쪼르르 사람들에게 일러바치는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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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 블로뉴 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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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르십니까, 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까칠한 에리히의 대응에 시몬 추기경이 쩔쩔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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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참 편하구나.’

나는 어지러운 듯이 머리를 짚었다. 성녀가 걸핏하면 그랬던 것처럼. 그러자 신관 모두가 경악해 내 상태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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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생기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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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님. 블란쳇 공작 부인께 신성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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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힘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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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성녀님과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네요.”

시몬 추기경이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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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성녀에게 제대로 상황을 듣지 못했던 탓인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가련하게 침대에 기대며 애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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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께서 갑자기 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때 에리히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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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녀가 또 주인님 얘기를 하며 이상한 짓을 했습니까? 블란쳇 공작저에서도 그러더니. 도대체 성녀는 유부남을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신관들의 표정이 흙빛이 되어갔다. 나는 당황한 척하며 친절하게 상황을 부정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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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야. 에리히. 내가 참으면 되지. 성녀님께선 악의 없이 바깥 일에 대해 무지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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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가 없으면 그런 짓을 해도 됩니까?”

시몬 추기경을 필두로 신관들이 침묵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저 표정이 어떤 의민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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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성녀가 또 사고를 쳤구나.’

물론 그렇게 생각하라고 말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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