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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질투 맞는데 (89/182)


89화 질투 맞는데
2022.10.07.



 
에리히의 엄포에 신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걸 어쩌면 좋지?’

‘아무리 성국이라 해도 블란쳇 공작가와 대놓고 틀어지게 되면…….’

날카로운 에리히의 쏘아붙임에 신관들이 궁지에 몰린 사냥감들처럼 쭈그러들었다.

그때 시몬 추기경이 나타나 당당히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곳이 어디입니까? 평범하고 흔한 신전도 아닌, 성녀님을 직접 모시는 신전입니다. 블로뉴 남작님께서 재촉하지 않아도 잘 처리할 겁니다.”

“시, 시몬 추기경님!”

시몬 추기경은 에스텔을 치료하다 무리해서 쓰러진 성녀를 방에 데려다주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었다.


“모두 수고가 많았네. 이제 블로뉴 남작님은 내가 상대하도록 하지.”

다른 신관들은 시몬 추기경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쳤다.

에리히가 시몬 추기경을 보며 도끼눈을 떴다.


“알아서 잘하시겠다는 분들께서 왜 아직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않으시는 겁니까?”

“블로뉴 남작께서 재촉하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에는 다 엄연히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저도 신성력이 회복되었으니 블란쳇 공작 부인을 한 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유롭게 대답한 것과 달리 에스텔을 바라보는 시몬 추기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왜 깨어나지 않는 거지?’

성녀뿐만 아니라 신성력을 쓸 수 있는 모든 신관을 끌어다가 무리하게 신성력을 사용하게 했다.

그런데 에스텔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저번에는 성녀님의 치료로 나으셨다고 들었는데.’

성녀님의 신성력도, 다른 이들의 신성력도 듣지 않는다니.


‘왜 이번만 다른 거지?’

솔직히 너무 해괴해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다.

문제는 신성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그대로 넘길 수 없는 문제라는 거다.


‘블로뉴 남작의 말대로 블란쳇 공작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애초에 이번 일이 성황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일이 복잡해진다. 블란쳇 공작 부인을 부를 때 성황 폐하의 인장이 들어간 편지를 멋대로 사용했으니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시몬 추기경을 노려보는 에리히의 눈빛이 점점 무시무시해졌다.


“지금 치료하지 않고 뭐 하는-”

“……감정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기도부터 하겠습니다.”

시몬 추기경은 재빨리 경건하게 기도를 시작했다.


“자애로운 아테아 신이시여. 제게 은총을 내리소서.”

추기경은 성황 아래에 있는 가장 높은 대신관이었다. 시몬은 젊은 나이에 추기경 자리에 오를 정도로 신성력이 많았다.

이 신전에서만 따지면 성녀 다음으로 신성력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내 신성력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니.’

시몬 추기경의 손끝에서 나온 신성한 흰 빛이 따사롭게 빛나며 잠든 에스텔의 몸에 스며들었다.


‘분명 신성력이 들어가고 있는데.’

시몬 추기경이 유심히 에스텔을 바라봤다. 신전의 귀빈실 침대에 누워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에스텔은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성경 속 천사를 보는 듯하군.’

특히 흰색의 긴 속눈썹과 반짝이는 백금발 때문일까, 금발 벽안의 화려한 미녀인 스텔라보다 이쪽이 더 성스러워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무의식적으로 에스텔의 분홍빛 입술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힌 시몬 추기경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시몬 추기경은 수련생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신성력에 집중했다. 그런데 에스텔의 몸에 스며들고 있던 신성력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건가?’

그런 특이체질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와는 달랐다. 그랬다면 아예 신성력이 깃들지 않고 튕겨 나갔을 테니까.


‘성녀님이 신성력으로 치료하실 때는 나아지셨다면서.’

그런데 시몬 추기경의 신성력은 에스텔의 몸을 스치고 어딘가로 자꾸 새어 나가고 있었다.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말이다.


‘이걸 더 제대로 파악해야겠어.’

시몬 추기경이 에스텔의 손을 잡으며 더욱 집중했다.


‘난 성국의 추기경이다! 내가 파악하지 못할 문제는 없어!’

시몬 추기경은 눈을 꾹 감고 신성력이 소실되는 마지막 부근을 파악했다. 시몬 추기경의 예상대로 에스텔의 내면에는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다.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살고 있나 싶을 정도로 거대하고 깊은 구멍이었다.


‘이건 단순히 새어 나가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이어진-’

시몬 추기경은 그 구멍 사이로 신성력을 일부러 넣으며 그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좋아, 어디 한번.’

그 구멍 사이를 막 들여다본 순간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어둠 속에 홀로 던져진 것처럼 차갑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이게 대체 뭐지?’

시몬 추기경은 집중하던 것도 잊고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그가 붙잡고 있던 에스텔도, 그를 노려보던 에리히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시몬 추기경이 겁에 질려 고개를 마구 두리번거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기괴한 어둠이 발끝에서 올라와 시몬의 몸을 천천히 지워버리고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방향 감각도 사라졌다.

점점 몸이 사라지는 느낌만 들었다.

시몬 추기경이 발버둥 치자, 낄낄거리는 기괴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몸이 사라지고 있다. 그가 완전히 지워진다.


“안 돼, 안-”

“시몬 추기경님?”

어깨에 익숙한 촉감이 느껴졌다. 후배 신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몬 추기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몬 추기경님, 치료에 집중하시는 와중에 불러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보이셔서…….”

“뭐라고?”

시몬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 창백해진 얼굴로 후배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예? 지금 블란쳇 공작 부인을 치료하고 계셨는데요…….”

“큼큼, 성국의 추기경이라 다를 거라더니,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마님께서 깨어나지도 않으시고. 정말 치료할 수 있기는 한 겁니까?”

에리히의 짜증스러운 말투에 시몬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신관복이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블로뉴 남작님. 그보다 자네. 방금 아무 일도 없었나?”

“무슨 일 말입니까?”

“어둠이라거나, 이상한 웃음소리라거나…….”

그를 바라보는 신관의 얼굴이 의문스러워졌다.


“치료가 너무 힘드셨던 겁니까? 그러면 제가…….”

“아니! 내 말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던 시몬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시몬은 힐끔 에스텔을 다시 돌아봤다.


‘방금 전 내가 본 게 다 착각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어찌 치료하다가 착각 같은 걸 할 수 있단 말인가.

똑똑.

귀빈실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에 성녀가 피곤이 가신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몸이 괜찮아진 것 같아 다시 공작 부인을 뵈러…… 어머, 시몬 추기경님. 어쩌다 그렇게.”

성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의 시몬에게 다가왔다. 품 안의 손수건을 꺼낸 성녀가 천사처럼 상냥하게 시몬의 땀을 닦아주었다.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성녀로서 공작 부인을 치료했어야 했는데.”

주위의 신관들이 성녀를 위로했다.


“아닙니다. 어찌 성녀님께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랬으면 저희가 있을 이유가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시몬 추기경님?”

“아, 예…….”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시몬 추기경이 쭈뼛 긴장했다. 머리끝까지 찌를 정도로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성녀에게서.


‘내 착각인가?’

다시 성녀를 칭송하는 분위기가 되자, 에리히가 고개를 저으며 산통을 깼다.


“그럴 시간에 빨리 환자를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인데, 이곳 신전이 문제인 겁니까, 성국이 개판인 겁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부인께서는 일어나실 수 있을 거예요.”

성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의 한 손을 두 손을 붙잡았다.


“아까 전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 대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다 준비하고 왔으니까요.”

“준비?”

“아아, 신께 기도를 드리고 왔다고요. 성녀로서 책무를 다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에리히는 팔짱을 낀 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어딘가 다 이상해.’

치료를 시작하던 시몬 추기경이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변한 것도 그렇고, 성녀가 갑자기 태연하고 여유롭게 돌아온 것만 봐도 그렇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에리히가 매의 눈으로 고뇌에 찬 시몬 추기경을 발견했다.


‘저자에게서 뭐라도 캐내야겠어.’

 

***

쿵! 쿠웅-!

동굴을 무너뜨릴 듯이 크게 울렸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너무 가까운데.’

요한 혼자 숨어 있으려고 만들어놓은 것이라서인지 둘이 있으려면 온몸을 딱 붙이고 있어야 했다.

단둘이서 좁은 공간에 갇힌 것 같다. 요한의 단단한 몸이 질감을 가진 옷 위로도 느껴졌다. 두껍고 긴 팔이 나를 보호할 듯 억세게 붙잡았다.


‘미쳤나 봐.’

내 입술을 막고 있는 요한의 큰 손이 의식됐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야?’

심장이 두근거리며 계속 뛰었다. 아마 붙어 있는 요한의 귀에도 들릴 것 같다.


‘그치만 어떻게 해.’

여기가 지금 어디인지 모르겠어도, 바깥에 무슨 괴물이 날 잡아먹고 있어도, 난 당장 내 옆의 요한이 가장 의식되는데!


‘나 전에는 어떻게 멀쩡한 척했지?’

아니, 생각해 보면 전에도 요한이랑 이렇게 붙어 있을 땐 전혀 멀쩡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도 만만치 않게 설렜는데……!


“에스텔.”

한참 바깥에 시선을 주던 요한이 나직이 숨을 내쉬며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잘생긴 얼굴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으, 응?”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요한이 고개를 내려 이마를 부딪쳤다.


‘더 가까워졌어!’

내 입을 막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 어깨를 감싸고, 한 손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쌌다. 허리가 찌릿하고 열기가 느껴졌다.

묘한 기류가 흐른다.


“오늘 신전에 가기로 한 날 아니었나?”

“그게 말이지. 사실 나도 여기에 왜 있는지 몰라.”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이 의식돼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자.’

둘러대는 것도 뭘 알아야 둘러대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무엇보다 이제 난 요한한테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거짓말하고 요한을 다시 볼 자신이 없다.


“신전에서 성녀를 만났는데, 정신이 들고나니 여기에 있었어. 요한은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이곳은 황실의 무덤이야.”

“황실의 무덤? 이 동굴이?”

“그래. 대대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황실에서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지. 보통 사람들은 존재도 모르는 곳이고.”

요한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설명해 줬다.


‘그래서 황태자가 여기에 있던 건가?’

그러면 내가 방금 전 밖에서 봤던 잔이나 마법진 같은 것도 다 그 제물과 관련된 것인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 순간 갑자기 황태자가 돌변해서 내게 외쳤던 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저 제물을 원한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차분히 상황부터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한은 어쩌다 여기를 알게 된 거야?”

“황실의 약점을 알아내려다 알게 됐지. 내가 여기를 알고 있는 이상 황실은 나한테 감히 못 맞서.”

차갑게 입매를 끌어 올리던 요한이 내게 물었다.


“그보다 너도 네가 왜 여기에 오게 된 건지 모른다고?”

“응. 여기가 황실의 무덤이란 것도 처음 알았어.”

“그러면 도대체 무슨 원리로…….”

“아, 그런데 도착했을 때 웬 이상한 마법진 앞에 떨어지긴 했어. 황태자가 피를 떨어뜨리고 있는 마법진이었는데. 그 마법이랑 관련되어 있을까?”

막 짚이는 게 있어 요한에게 말해줬다. 그러자 요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황태자가 피를 떨어뜨리고 있었다고?”

“응. 그리고 날 알아보고는 갑자기 옛날얘기를 꺼내…….”

그 순간 왠지 요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뭐, 뭐지?’

나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려 했다.


“그보다 이제 바깥에서 소리도 안 들리는데 나가면 안 돼?”

“나가도 되긴 하지.”

“더웠는데 잘 됐다.”

손 부채질을 하며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를 따라 마법 공간에서 나온 요한이 나를 뚫어져라 보며 물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뭐?”

“응?”

“옛날얘기 했다며. 거기서부터 다시 말해봐.”

요한이 평소처럼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조금 무서웠다.


“아니, 그 이상 할 말은 크게 없는데. 워낙 별거 없는 이야기라서.”

“별거 없는데 왜 말을 못 하지?”

요한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가 생각하기에 사소해 보여도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어. 그러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얘기해 봐.”

“여기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요한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아아, 날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

요한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거 재밌네. 기대된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내가 어색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기대할 것까지는 아닌데. 요한도 참.”

나는 요한의 눈치를 살피다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황태자랑 나 사이에 별일도 없었던 건 요한도 알잖아. 그게 다야.”

내가 황태자랑 약혼도 하지 못해서 남자나 밝히는 모자란 여자 취급받았던 건 아주 유명한 일이다. 요한이 몰랐을 리 없다.


“자꾸 그렇게 물어보니까 지금 요한이 황태자한테 질투하는 것 같잖아.”

“질투 맞는데.”

요한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지금 내 얼굴 보면 모르겠어?”

하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지금 너와 황태자 사이에 내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을까 봐 질투 나서 미쳐버릴 거 같아.”

“…….”

“별거 아니니까 편하게 있는 대로 다 말해봐. 그 새끼랑 무슨 일이 있었고, 여기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나는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이거 있지도 않은 전 애인을 들켜서 추궁받는 기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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