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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무슨 사정이 있든 (88/182)


88화 무슨 사정이 있든
2022.10.04.



 
카를로스의 금안은 진심으로 절절 끓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애끓는 마음에 나는 더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왜 이러지?’

마지막에 황태자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애절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리 내가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되었다지만, 그 잘나고 오만방자하던 카를로스에게 내가 필요해지다니.


‘진짜 말도 안 돼.’

“제가 필요하다고요?”

“그래.”

“도대체 왜요?”

당황스러움이 조금 가시자,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전하는 제가 필요한 그런 사람이 아니셨잖아요.”

“그건…….”

“일단 이 손부터 놓아주세요, 불쾌하거든요.”

내 짜증 섞인 말에 카를로스의 금안이 흔들렸다.


“내가 불쾌해?”

카를로스가 입술을 짓씹으며 내 말을 곱씹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러시는데 불쾌하지 않겠어요? 저희가 좋게 끝난 사이도 아니잖아요.”

“어째서?”

카를로스는 내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더 주며 물었다.


“왜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그러면 안 끝났나요?”

리안드로가 아예 제대로 관계조차 쌓지 않은 사이였다면, 황태자는 나름대로 어떤 관계가 있는 줄 알고 내가 멋대로 착각하던 사이였다.


“하긴, 뭘 끝내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었네요.”

“……날 사랑하던 거 아니었나?”

나를 바라보는 카를로스의 눈동자에 묘한 애틋함이 담겼다.


“나한테 마지막으로 네가 보낸 그 편지, 아직도 가지고 있다.”

“…….”

“그 편지, 그게 네 진심 아닌가? 지옥에서 너를 구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라고 했지 않나.”

그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를로스와 나는 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그 편지 내용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그 마지막 편지, 그 편지만큼은 나도 결코 내용을 잊지 못했다.


“전하.”

내가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때 제 편지 읽으셨어요?”

“그래. 다 읽었다.”

황태자가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네가 보낸 편지는 언제나 다 읽었어.”

“제대로 답장 보낸 적도 없으시잖아요.”

“그건 제대로 보낼 답을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황태자의 퇴폐적인 얼굴에 묘한 기대가 떠올랐다. 그는 아마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나는 황태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아야!’

너무 세게 흔들어서인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내 몸은 왜 이렇게 약해서!’

하지만 황태자한테 연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 더 차갑게 눈을 부릅떴다.


“언제 제가 전하 사정 물어봤나요?”

어떤 표정을 지어봐도 위협조차 되지 않는 얼굴이라지만, 그래도 나는 최대한 진심으로 다 해 냉소했다.


“마지막 편지, 그 편지 내용을 기억하고 계시면, 제가 왜 이러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아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

“이제 와서 편지고 사정이고 다 무슨 소용이에요, 그쵸?”

그 마지막 편지, 그건 리베르탄에 갇혀 있을 당시 내가 황태자한테 보낸 편지다.

어떻게든 수작을 부려 황궁으로 보내며 제발 나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던, 황태자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던 내가 썼던 편지.

나도 모르게 묻어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

원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즈음이었다.

그때 나는 매우 조급했다. 리베르탄을 탈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봤지만,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리베르탄의 멸망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요한과 결혼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이제 진짜 방법이 없어.’

그래서 나는 내게 은근히 호의적인 황태자에게 마지막으로 기대를 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나를 구해주실지는 모르겠어.’

첫 만남부터 나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며 ‘천한 피’라고 비하하던 황태자 카를로스. 사죄를 빌미로 개를 부리듯 심부름시키던 황태자.

하지만 그러면서도 황태자는 간혹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다.


‘이 천한 피가 왜 여기에 있냐고? 내가 불렀으니까.’


‘내가 원하면 이깟 천한 피라도 누구보다 존귀한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무시한다 해도 너 같은 게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황태자도 아닌 게 왜 멋대로 행동하지?’

가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보호해 주기도 하고, 예비 황태자비라는 달콤한 말을 해주기도 했다.


‘너도 황태자비가 되고 싶으냐?’

특히 편지를 자주 교환하면서 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기왕 꿈꾸는 거 아주 크게 황태자비 자리라도 꿈꿔라. 그편이 덜 비참하지 않겠느냐?’


‘네가 조금 더 노력하면 어쩌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철저한 내 착각이었다.

어느 날 나를 부른 황태자가 다른 영애를 끼고 노닥거리며 나를 반겼다.


‘기다려, 아직 네 순번이 올 때까지.’

황태자에게는 매번 새로운 놀잇감이 필요했고, 나는 그때 가장 신선하고 재밌는 놀잇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도 지금 내게 기댈 곳은 황태자밖에 없었다.

[카를로스 황태자 전하께.]

비참한 마음을 모두 접고, 황태자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전하께서는 믿으시지 않으시겠지만, 리베르탄의 멸망이 머지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저는 죽을지도 몰라요.]

[그간 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금의 동정이 생기셨다면, 제게 온정을 베풀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 구질구질한 편지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황태자가 마지막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태자의 편지를 계속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내 기대를 짓밟듯이 편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 또 멍청한 생각을 했구나.’

그렇게 나는 황태자와 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

그게 전부였다.

황태자가 주제 모르고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우스웠다.


‘리안드로도, 황태자도 진짜 이상해.’

나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도 그들은 내가 그때와 엄청나게 달라져 꼭 손에 넣어야 하는 귀한 보석이라도 된 양 굴었다.


“그래, 너를 구하지 않은 게 내 실책이었다. 너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네가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여자 중 하나일 줄 알았으니까.”

“실제로 그러지 않았나요?”

“아니었다.”

카를로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어떤 여자로도 너와 있던 순간을 채울 수 없었어.”

“뭐라고요?”

“이렇게 네 얼굴을 보니 더 확실해졌다. 별 볼 일 없는 줄 알았던 네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카를로스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어렸다. 그 황태자가, 무려 눈물까지 흘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늦었다고 탓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네가 필요하니까.”

“저는 전하가 필요하지 않은데요?”

나는 주위를 돌아보며 도망칠 구석을 찾았다. 이제 보니 범상치 않은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황태자의 발아래로 거대한 마법진이 보였다.


‘마법진?’

돌바닥을 갈라서 새긴 듯한 마법진이 바닥 전체에 깔려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 마법진의 그림 사이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거다.


‘저 피는…….’

놀랍게도 그 피의 시작점에는 황태자가 있었다.

황태자의 언행에 놀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가 오기 전까지 황태자는 마법진에 피를 붓기 위해 상처를 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이곳이 뭐길래?’

심지어 지금도 황태자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녕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카를로스는 힘들지도 않은지 내게만 집중했다.


“아직 악녀라는 네 소문이 그대로인 걸 보면 모르겠나?”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교묘하게 가늘어졌다. 나를 살살 꼬드기려는 듯한 기색이 가득했다.


“블란쳇 공작은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지 못해. 하지만 사교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면 가능하지.”

“…….”

“나라면 지금 리베르탄 공작가를 구명하기 위해 움직여 줄 수도 있다. 공작 부부가 다시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블란쳇 공작은 절대 들어주지 못할 소원이지.”

“진짜 무슨 개소리를…….”

순간 감상에 젖어 있던 카를로스가 내 목소리를 듣고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죄송하지만 전하와 제 인연은 끝났어요. 이 말이 어려우시면 다른 말로 해드릴게요.”

카를로스는 내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만큼 나는 카를로스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맞추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요한을 만나보니까 알겠어.’

나는 카를로스를 사랑한 적 없었다. 단지 그가 내 유일한 구원이라 생각했기에,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내 자신에 대한 감정조차 속였던 거다.


“전하가 알고 계시던 저는 죽었어요.”

카를로스의 잘난 얼굴이 무너지듯 허물어졌다.


“어째서 내게…….”

키이잉-

동굴 전체에 기이한 소리가 찌를 듯이 번졌다. 메아리치듯 퍼지는 소리에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있던 카를로스가 비틀거렸다.


‘분위기가 좀 이상해지고 있는데.’

마법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저, 저건 뭐야?’

카를로스가 바닥에 등을 기댔다.


“요정.”

카를로스의 금안이 보라색 빛으로 물들었다.


“마지막 요정, 네가 여기에 있었군.”

카를로스가 기대고 있던 동굴 벽 위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어떤 그림이 되었다. 온갖 마수를 엉망으로 붙여놓은 듯한 마물의 그림이었다.


‘저건 황태자가 아니야.’

소름이 쫙 끼쳤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저 제물을 원한다.”

그림자 같은 것들이 춤을 추듯 동굴 벽 위에 기어올라 왔다.


“마지막 희생양을 내게 바쳐라.”

다행히 내가 조금 더 빠르게 출발했다. 괴물 같은 그림자의 손길을 피해서 동굴 구석을 빙글 돌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얼마 안 있다 붙잡힐 거야.’

여기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동굴 천장 벽에서 솟구친 그림자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다.

그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에스텔?”

그림자 손이 나를 막 붙잡으려는 찰나.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요한이 내 앞에 나타나 그 그림자를 터뜨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한을 바라봤다.


“요한, 너는 어떻게 여기에…….”

“넌 오늘 신전에 가기로 했잖아. 거기다 내가 준 팔찌는 또 어디에 두고.”

요한은 날렵한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붉은 자국이 올라온 내 손목을 확인했다.


 


“무슨 짓을 당한 거야?”

쿵! 쿵! 쿵!

뒤쪽에서 거대한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눈썹을 찡그리던 요한이 나를 품에 꽉 끌어안고 동굴 안쪽으로 밀쳤다.


‘부딪친다!’

충격을 대비해 눈을 꼭 감았던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어리둥절한 채 눈을 떴다.


‘동굴 안쪽에 이런 공간이 있다고?’

범한 동굴 벽처럼 보였지만,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위장 벽이었다. 딱 둘만 숨어 있을 수 있는 크기였다.

요한이 내 입술에 검지를 댔다.


“쉿, 조용히.”

우리가 숨어 있는 곳 바깥에서 마물이 쿵쿵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나는 요한의 인도를 따라 겨우 호흡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요한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오늘 내가 신전에 간다고 했던 것처럼, 요한은 오늘 황궁에 간다고 했다.

***

에리히가 차갑게 말했다.


“이제 어쩔 겁니까?”

에리히는 추기경과 신관들을 보며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우리 마님께서 깨어나지 않으시면, 주군께서 성국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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