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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부인과 내 아이 (85/182)


85화 부인과 내 아이
2022.09.23.


나는 놀라서 요한을 바라봤다.


“요한?”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서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다가온다.


‘에리히가 알아봤던 것처럼 바로 알아볼까?’

만일 정령이란 걸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상한 오해를 빚을지도 모른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에 다가온 요한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검지로 당황한 내 뺨을 건드렸다.


“잘 있었어?”

정령 아기에 대해 물어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내 안부부터 물었다.


“으, 응.”

요한의 시선이 잠든 아기에게 향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눈빛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립고 따듯한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아기를 보던 요한이 다시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의 목울대가 잠시 꿈틀했다.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겼네.”

나는 내 검지를 꼭 쥔 작은 아기의 손을 흔들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기 예쁘지?”

“예쁘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을 닮아서 더 좋은 것 같아.”

“나를 닮았다고? 머리카락 색만 봐도 요한을 더 닮았는데.”

“자세히 봐봐. 여기 볼살이 말랑해 보이는 것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선이 부드러운 것도 다 너를 닮았어.”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쳐도 요한을 더 닮았는데?’

아무래도 요한이 객관적인 눈을 상실한 것 같다. 그때 요한이 고민하는 내 볼을 잡아당기며 픽 웃었다.


“이거 봐. 표정 똑같네.”

“잡아당기면 누구나 얼굴이 똑같을걸?”

“아니야. 이 사랑스러운 분위기만 보면 누가 봐도 네 아기인 걸 알아볼 거야. 그런 분위기는 어떻게 해도 따라 할 수 없는 거거든.”

사랑스럽다.


‘왜 이 단어가 색다르게 느껴질까?’

간지러운 기분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사랑스러워?”

요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지 꽤 됐는데도 난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 눈에도 사랑스러울까 걱정될 정도지.”

요한은 내 목 뒤에 팔을 넣어서 내 품 안에 있는 아기의 등에 큰 손을 얹었다. 평소처럼 여유로운 손짓이었지만, 나는 그의 손이 떨리는 걸 봤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요한이 숨 막힌다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렸다.


“어떻게 두고 갈 수 있었을까.”

그는 아기와 내 모습에서 과거의 가족을 덧씌워보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가족은…… 요한에게 전혀 다른 의미겠구나.’

요한은 가족을 완전히 잃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요한. 아기 이름은 어떻게 부를까? 아기 이름은 부모가 지어줘야 하잖아.”

-아니! 저런 무도한 흑마법사 놈에게 정령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게 하다니!

-아무리 저놈의 기운이 섞였다고 한들 정도가 있지. 정령에게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저런 놈이 이름을 짓게 한단 말이냐?

나무들이 난리를 피웠다.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린 요한이 아기의 말랑한 볼을 쿡 찔렀다.


“정령의 이름을 짓는 데는 신중해야 해.”

“……정령인 거 바로 알아봤어?”

“당연하지. 바로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런데 왜…….”

사실 나는 요한이 정령 아기를 바로 제 아기라 말하는 게 신기했다.


‘정령인 걸 알아봤으면 내가 이러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나?’

거기다 갑자기 등장한 정령이니, 나에 대한 의구심이 더 생길 만하고.


“우웅…….”

“이러니까.”

정령 아기는 요한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지 잠든 와중에도 요한의 품에 통통한 볼을 부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이미 이 아기는 너와 나 사이의 아기인걸. 그런데 정령인 게 뭐가 중요해.”

“…….”

“물론 이 아기에게서 내 기운이 느껴지고, 너를 닮아서 그런 것도 어쩔 수 없이 있지만.”

요한이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아, 불안해.’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죄이는 느낌에 나는 요한의 시선을 피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 모든 게 사라질까 봐 너무 무서워.’

이 순간 나는 과거의 내가 절대 가질 수 없었던 내 것이 이젠 너무 많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요한은 버틸 수 있었을까?’

아마 요한에겐 어린 날의 그 기억이, 내게는 지금 이 순간과 마찬가지일 텐데. 아예 없었다면 모를까, 제 것이라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굳이 할 필요 없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요한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

에리히가 고고하게 앉은 제 주인을 바라봤다.


“주인님, 에리히 블로뉴 남작입니다.”

에스텔에게 충성 맹세를 했지만, 그렇다 한들 요한이 그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에스텔이 요한보다 더 우선순위가 되었을 뿐이다.


“정령에 대한 조사는?”

“예. 여기 정령에 대한 기록입니다.”

정령에 대한 기록을 훑어보던 요한이 눈매를 좁혔다.


“결국 정령이 태어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는 거군.”

“예, 아무래도 정령은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보니…….”

“아니다. 오히려 정령의 탄생 과정에 대해 잘 밝혀진 것이 더 의문이겠지.”

다행히 요한에게는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블란쳇 저택에는 내 흑마법의 기운이 흐른다.’

지하에는 요한이 악마와 거래하기 위한 제단이 있기에, 이 블란쳇 저택은 그 자체로 요한의 공간이라 볼 수 있었다.


‘정령이 나를 닮은 건 그래서겠지.’

하지만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정령은 에스텔의 앞에서 태어났고, 에스텔을 닮았으니까.


‘에스텔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 텐데.’

“요정.”

요한이 에리히를 보며 말했다.


“정령에 대해 조사하면서 요정에 대한 것은 없었나?”

“요정…… 말입니까?”

에리히가 곤란한 눈으로 대답했다.


“요정에 대한 것은 워낙 자료가 없어 정령을 조사하면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그래. 알아봐.”

요정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최대한 미룬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든 대비해 두어서 나쁠 건 없다.

급한 상황에서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는 없으니.


“작은 정보라도 남김없이.”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에스텔을, 그녀의 품 안에 있던 귀여운 아기를 떠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릴리.’

요한이 자신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름을 되새겼다.


‘저를 욕하고 원망하십시오. 저는…….’

요한의 시선이 정원의 덤불에서 꺾어온 에덴 로즈를 향했다. 에덴 로즈의 푸르름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났다.

***

정령 아기는 아주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원래도 아기는 저택에 들어간 순간부터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블란쳇 공작저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기를 환영하고 무척 사랑해 주었다. 심지어 정령이란 말에도 쉽게 납득해 줬다.


‘내가 이상한 건가? 왜 이렇게 다들 쉽게 납득하지?’

요한이 넘어가 준 것을 제외한다고 해도 무척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움 때문이다!

그러자 나무들이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목청 높여 대답했다.


-방긋방긋 웃다가도 사람들이 오니까 품에 숨는 걸 보렴. 얼마나 귀엽니.

-귀여움은 모든 논리와 설명을 이기고 세상을 지배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령 아기를 데리고 빨리 숲으로 데려와 보거라. 어서!

확실히 인간을 초월한 귀여움이기는 했다.


‘나랑 요한을 닮았으니까.’

인형처럼 예쁘다는 소리를 언제나 듣던 나다. 요한의 외모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두 사람의 외모가 적절히 섞인 정령 아기는 아기 특유의 보드라움까지 더 해져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특히 정령 아기는 하루에 딱 1시간 정도만 깨어 있기 때문에 다들 치열하게 그 시간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마님, 아기님께서 깨어나셨나요?”

베티가 볼에 홍조를 띤 채 달려왔다.


“아직 자.”

“세상에. 자는 모습도 너무 천사 같으셔…….”

“그러다 또 거부당할라.”

“마, 마님. 제 아픈 상처를…….”

정령 아기는 베티의 적극적인 접근에 놀라서 베티를 외면했다. 아무래도 아기의 눈에 흥분한 어른이 많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요. 절대 흥분하지 않을 거예요.”

“베티가?”

“이래 뵈어도 제가 얼마나 냉철한데요. 마님 앞에선 냉철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지만, 냉혹한 사람이랍니다.”

“…….”

“진짜라니까요!”

똑똑.


“저, 마님. 이번에 정령 아기님께 필요하실지 모르는 물건을 좀 가져와 봤어요.”

문 앞에 모여 있던 하녀들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바깥에서 아기를 연신 바라보았다.


“가까이 와서 봐도 돼. 앞으로 같이 지낼 식구니까.”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 물론이지. 그리고 내가 아기를 돌보는 건 처음이라 너희 도움이 필요해.”

그러자 하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며 포부를 외쳤다.


“걱정 마세요. 마님! 제가 또 제 손으로 큰 동생들만 여섯 있는 장녀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마을 산파셨어요. 제가 또 아기를 돌보는 장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도 제 손위 동생이 꽤 있어서……!”

베티를 포함한 하녀들은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차마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아기가 겁을 먹을 것 같은지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아기는 단풍잎처럼 짤막한 손가락, 짧은 팔로 나를 꼭 붙잡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쩜 자는 모습도 저렇게 천사 같으실까.”

“어떻게 저렇게 주인님과 마님을 쏙 빼닮으셨을까요.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원래도 두 분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두 분을 닮은 아기님을 보고 있으니 벌써 두 분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 같아요.”

자신을 향한 호의적인 시선을 느꼈는지, 아니면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아기가 자던 와중에 볼살을 씰룩거리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아마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나는 아기의 머리를 소중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웃는 얼굴을 지켜보던 하녀들 사이에서 겨우 소리를 죽인 탄성이 쏟아졌다.


“웃으시는 거 봐요! 너무 귀엽다. 볼 한번 만져보고 싶다…….”

“마님. 정령 아기님께서는 성별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기님은 정령이시라잖아. 그러면 성별이 없으시지 않을까?”

나는 하녀들의 질문에 조용히 고민했다.


‘정령이니까 성별은…….’

-남자애다.

-정령도 성별이 있단다. 아가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남자애야.”

“세상에. 블란쳇 공작가에 찾아오신 사랑스러운 공자님이시군요.”

“어쩐지 아기님이신데도 묘한 카리스마가 있다고 했어요.”

아마 그건 정령 특유의 기운이 그렇게 느껴지는 걸 터다.

하지만 굳이 얘기하지 않은 나는 내 몸에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아기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아기가 불현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우움.”

아기는 깨어나자마자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그럴 때마다 토실토실한 볼살이 흔들렸다.


“으윽. 심장에 무리가……!”

아기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하녀들은 쓰러질 것처럼 찬사를 터뜨렸다.


‘무엇을 찾는 거 같은데.’

아기가 불안한 듯 내 품에 다시 파고들었다.


“뭔가 찾는 게 있니?”

“까아우.”

이건 대답을 하는 건가?


“그래, 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들 일은 다 하고 마님의 방에 몰려있는 것이냐?”

페트리샤의 목소리에 하녀들 모두가 쩌적 얼어붙었다.


“하, 하녀장님.”

“다들 제 자리로 돌아가거라. 볼일이 마친 뒤 각자 소임을 다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네, 넵!”

하녀들이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녀들의 움직임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던 페트리샤가 편지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님. 휴식 중에 죄송하지만, 성황의 이름으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성황이?”

“예.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편지의 위에는 성황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성녀의 편지였다.

[제가 머무는 신전에 블란쳇 공작 부인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스텔라 성녀.]

베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께 기도하다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요?”

“베티 블로뉴.”

페트리샤가 엄히 베티를 불렀다.


“정령 아기님이 계신데 말조심하거라.”

하긴, 성녀는 중요한 사람이니까.


“아무리 성녀가 자격 없고 경거망동하고 돼먹지 못한 종자라지만, 어찌 입 밖에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느냐?”

“하녀장님. 저, 저는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는데요.”

“…….”

나는 편지를 바라보다 페트리샤에게 물었다.


“내가 성녀의 초대에 응해야 할 이유가 있나?”

“없습니다.”

페트리샤가 깔끔하게 대답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신전에 곧 방문하겠다고 답장해 봐야겠어.”

“예?”

“갈 이유가 있어서 가는 것보다는, 없을 때 가는 게 더 명분 있어 보이니까.”

 

***

신전은 블란쳇 공작 부인의 방문 소식에 의문을 품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이 정말 이 신전에 오늘 방문한다고 하신 겁니까?”

“그렇지.”

“분명 거절할 것이라 여겼는데……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성황 폐하의 명성을 의식하신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구나.”

신전은 공작 부인의 도착을 기다렸다.


“저 마차가 블란쳇 공작가의 마차입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이 타기에는 다소 비루해 보이는 마차였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안에서 나온 이는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손님께서는 누구신지…….”

“아, 저희는 올베르트 자작가입니다. 연합 왕국 출신인데,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성녀님께서 직접 오해를 정정하시는 자리를 만드셨다고 해서 방문했습니다.”

“여보, 정확히 말하면 지난 사건으로 피해 입은 공작 부인께 사죄하는 자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아, 그랬지.”

신관들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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