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완벽한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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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완벽한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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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완벽한 제물
2022.09.16.
제국에는 독실한 귀족이 많았다.
황제를 독대하고 돌아온 성녀는 정화 의식을 준비하며 독실한 귀족들과 친분을 다져 나갔다. 물론 이 만남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아아, 세상에. 제 피부병을 고쳐주시다니! 성녀님께서는 제 은인입니다. 이리 대단하신 분께 성녀 자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다니요.”
“괜찮아요. 이 또한 성녀로서 제가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인걸요.”
특히 성녀는 강대한 신성력을 이용해 귀족들을 치료해 주어 아주 열성적인 추종자를 만들어냈다.
“성녀님께선 따로 고아들을 위해 재단도 만들어 기부도 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녀로서 사람들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될 텐데.”
성녀는 귀족의 칭찬에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성녀님이시다. 어떤 행동에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다니.’
그렇게 또 한 명의 추종자가 생겨났다.
추기경 시몬은 성녀의 추종자가 된 귀족을 배웅하고 기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평소라면 방으로 돌아가 있었을 성녀가 여전히 기도실에 남아 있었다.
“성녀님, 왜 아직 기도실에 계십니까?”
“시몬 님께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제게 말입니까?”
“예. 다음 뵐 분을 따로 정해뒀거든요. 그런데 그분을 부를 때 시몬 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부분이 있어서요.”
성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내리뜬 눈이 금방 울 것처럼 가냘파 보였다.
“제 부탁으로 시몬 님께서 곤란해지시면 안 될 텐데…….”
“제 역할은 성녀님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입니다.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다음에 신전으로 블란쳇 공작 부인을 초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블란쳇 공작 부인……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에 놀란 시몬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왜 하필 블란쳇 공작 부인인가.’
“성녀님,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신전에 오기를 원하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정화 의식을 앞두고 계시니 다른 분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번 미르유 쥬티 영애와 관련된 일로 블란쳇 공작 부인과 저 사이에 이상한 오해가 돌고 있잖아요.”
성녀의 푸른 눈동자에 슬픔이 서렸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신전에 괜한 오해를 하시지 않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래요.”
“하지만 성녀님.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초대에 응하지 않으실 수도 있는데…….”
“그래서 시몬 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성황 폐하의 인장이 찍힌 편지라면, 공작 부인도 거절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순간 시몬은 한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성녀의 얼굴 위로 한직으로 쫓겨난 베르토 추기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베르토 추기경은 성녀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쫓겨났지만…….’
추기경 시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성녀님. 블란쳇 공작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일전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블란쳇 공작 부인을 부르는 일에는 무척 신중하셔야 합니다. 설령 모신다 해도 실례를 저지르기라도 했다간 큰일이 날지도 모릅니다.”
“제가 왜 그분께 실례를 저지르겠어요.”
성녀 스텔라가 말갛게 웃었다.
“저는 상대도 안 되는 아랫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지 않은걸요. 안주인이 하녀를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요.”
“서, 성녀님.”
“시몬 님.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
시몬의 당황스러운 표정에 스텔라는 아이처럼 풀이 죽었다.
“신전 안에선 성녀인 제가 가장 존귀하다고 배웠는데…….”
실제로 성서에서는 성녀의 말대로 신이 선택하고,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성녀가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하나 성서에서나 다루는 표현일 뿐인데.’
신전에서 공주님처럼 곱게 대우받은 스텔라는 기묘한 말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일일 것이다.
“아닙니다. 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블란쳇 공작 부인 앞에서는 조금 더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성녀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시몬 님도 참 걱정이 많으시다니까.’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인 뒤 손거울을 꺼내 제 아름다운 얼굴을 살폈다.
‘어차피 그는 이미 진짜인 나를 알아봤는데.’
미르유 때문에 일이 꼬이긴 했지만, 스텔라는 이미 그의 신발을 닦아주며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
다사다난했던 신혼여행이 끝났다.
‘너무 짧아서 잠깐 꿈을 꾸고 일어난 것 같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 요한이 새로 그의 눈동자 색으로 맞춰준 반지였다.
‘사랑해, 에스텔.’
요한은 신혼여행을 갔다 오자마자 아침마다 나한테 사랑 고백을 해줬다.
‘정말 원작이 바뀌었네.’
원작에서 바뀌게 된 것은 고백받기 전부터였을 텐데, 새삼 그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마차 바깥을 바라보며 휘감는 바람을 느꼈다.
‘곧 로이엄 저택에 도착해 간다.’
원래 이사벨라 국왕 대리님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를 초대했지만, 내가 갑자기 신혼여행에 가게 되면서 상당히 늦게 가게 된 것이다.
‘이제 보니 미르유 일도 꽤 오래전 일 같아.’
로이엄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다이아나가 나를 마중 나왔다.
“에스텔! 보고 싶었어!”
“나도.”
내가 도착하기 전에 나와 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도착하자마자 나를 꽉 끌어안은 다이아나의 눈동자가 강아지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어머니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셔.”
다이아나는 나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가는 내내 쌓아뒀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런데 얼굴에서 지우지 못한 피로가 엿보였다.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지?”
미르유의 자살로 인해 로이엄 왕국의 입장이 더 난처해졌다고 들었다. 그러자 다이아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나 헤센 오빠도 아니고. 내가 힘들 게 뭐 있어.”
“그래도 충분히 힘들 수 있지.”
“그런가? 그래도 어머니나 헤센 오빠를 보면 힘들다는 말이 안 나와. 다들 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충격을 많이 받았나 봐.”
가족처럼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로이엄 왕국 입장에서는, 미르유의 죽음이 충격적이었으리라.
“어머니는 하루 종일 일만 하시고, 헤센 오빠도 덩그러니 혼자만 있어. 누구랑도 대화하지 않으려고 하고. 이대로 우리 가족이 영영 잘못되진 않을까 걱정돼.”
응접실 근처까지 온 다이아나는 목이 잠긴 듯했다. 나는 다이아나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괜찮아질 거야.”
“그렇겠지?”
“그럼. 이사벨라 국왕 대리님이나 헤센 왕세자님에겐 다이아나 네가 있으니까.”
다이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려나?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는데.”
“때로는 누군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거든.”
“그거야 뭐 가족이니까 그 정도는 당연하지.”
다이아나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불현듯 나는 다이아나의 자연스러운 ‘가족’이야기에 부러워졌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가족이 있으니까 괜찮아질 거란 거지.”
난 늘 가족이 가지고 싶었으니까.
‘이제 요한이 내 가족인가?’
하지만 뭔가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남편이라면 가족이 맞는데.
‘그렇게 치면 나는 이미 오래전 내 소원을 이루게 된 걸까?’
“오랜만입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
오랜만에 뵌 이사벨라 국왕 대리님은 전에 뵈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수척해 보였다.
“로이엄 왕국의 정세가 혼란스러워 이제야 사죄드리게 되어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이사벨라 국왕 대리님은 다시 한번 내게 사죄했다. 고개까지 숙이며.
“로이엄 왕국에서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하나, 미르유 쥬티의 실체를 모르고 그녀를 보살펴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 피해를 끼치게 되어 무척 죄송합니다.”
로이엄 왕국 입장에선 책임을 회피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라 국왕 대리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로이엄 왕국은 최대한 블란쳇 공작 부인께 보상할 것입니다. 혹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 판단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 회피하지 않는 자세에선 왕족다운 고고함이 느껴졌다.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사벨라 국왕 대리님은 문제가 벌어질 때마다 그에 맞는 대처를 보여주려 애써주셨잖아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제가 블란쳇 공작 부인의 마음을 무시하고 결혼식을 진행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저는 로이엄 왕국 대리님께서 사죄해 주시는 걸로 됐어요.”
이미 로이엄 왕국 측에서 보상도 준비했다니, 괜히 더 뜯어낼 필요는 없어 보였다.
“블란쳇 공작 부인의 선량한 태도가 과거의 저를 더욱 부끄럽게 만듭니다.”
유심히 나를 바라보던 이사벨라 국왕 대리의 눈에 죄책감이 서렸다. 그녀가 천천히 응접실의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렸다.
“로이엄 왕국의 공식적인 보상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블란쳇 공작 부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이 부인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이건…….”
“예, 연합 왕국 은행 계좌입니다.”
나는 통장 계좌를 보며 감탄했다.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계좌라니…….”
비밀 계좌도 계좌지만, 액수 또한 비범했다.
‘0이 몇 개야?’
공작 부인이 되어 눈이 높아진 내가 봐도 높은 액수였다.
“공작 부인의 사재에 비할 바는 안 되겠으나, 간혹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재산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럴 때 부인께선 어떤 제약도 없이 이 금액을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공식적인 보상으로도 손해가 꽤 났을 터인데…….”
“사람 하나 잘못 들여 왕국을 망칠 뻔했던 것을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로이엄 왕국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은인이십니다.”
‘나야 있으면 좋지!’
비밀 신분으로 돌아다니면서 사용하기 딱 좋았다.
‘솔직히 이제 도망가야 하나 싶긴 하지만.’
돈은 챙겨둘수록 언젠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될 거다.
“물론 이번 보상으로 입은 손해는 철저히 은원을 따져 그 원인들에게 받아낼 예정입니다.”
이사벨라의 눈이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특히 성국은 공식적인 로이엄 왕국의 행사에서 거짓을 고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로이엄 왕국 혼자 성국을 상대하다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어찌 로이엄 왕국에 그런 호의를…….”
“마냥 호의는 아니에요. 저도 이번 제 데뷔탕트를 준비하면서 로이엄 왕국에 도움을 요청할 거니까요. 그쵸?”
로이엄 왕국이 아무리 대단해도, 성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안 그래도 성녀인 예스텔라를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으니까.’
그리고 얼굴을 위장한 채 성녀로 돌아다니는지 역시도.
“에스텔, 고마워.”
다이아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붙잡았다.
“아무리 속았다지만 우리는 너를 힘들게 하는데 일조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너 같은 사람한테 그런 죄를 저질렀는지…….”
“그러게나 말이다.”
이사벨라마저도 다이아나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때 응접실 근처에 걸어둔 태피스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유일신 아테아가 세상의 악인 ‘혼돈’을 없애는 장면을 담은 태피스트리다.
‘성서에도 나오고, 고대학에도 자주 나오는 내용이지.’
혼돈이 세상을 없애려 하자, 아테아는 혼돈을 없애고 깊은 영면에 들었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그들을 지킬 천사들을 남긴 채로.
‘천사의 의지를 받들어 세상을 이끄는 게 현재의 성국이고.’
두근-
새삼스러울 것 없는 내용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이사벨라가 내게 물었다.
“저 태피스트리의 신화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아, 네. 고대 신화에 대한 내용이네요. 국왕 대리님께선 고대 신화를 좋아하시나요?”
“한때 관심을 두었던 분야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진귀한 것을 챙겨두곤 했지요.”
희미하게 웃던 이사벨라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한 우연이군요.”
“무엇이요?”
“좀 이상할 수 있으나, 저 태피스트리는 선대 블란쳇 공작 부인께 받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대 블란쳇 공작 부인께선 고대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지요.”
선대 공작 부인, 억울하게 돌아가신 요한의 어머니.
“어머니. 에스텔이 저 태피스트리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그때 가만히 있던 다이아나가 말했다.
“저 태피스트리를 챙겨드려요.”
“아, 난 괜찮-”
“더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고민했는데, 마음에 들면 다 줄게.”
내가 손사래를 치려던 찰나. 다이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니 저 태피스트리랑 저택에 있는 다른 고대 유물도 모두 보내드려요.”
“어허, 다이아나.”
이사벨라가 근엄하게 다이아나를 불렀다.
“그 정도로 선물이 되겠느냐? 마차 한 대 들어갈 정도의 선물을 누구 코에 붙이겠느냐?”
뭐라고요?
“자고로 선물이란 마차 세 대 정도는 차야 할 정도로 줘야 하는 법이다.”
“역시 어머니. 저와는 배포가 다르시네요.”
“그래, 왕국을 이끌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 왕국에 연락해서 내 개인 창고에 있는 유물과 선물들을 마차 서너 대 정도 채워서 보내드려야지.”
잠시만요, 여러분.
“그러면 어머니, 이참에 다른 연합 왕국에 연락해서 유물을 긁어모아 보죠. 더 좋은 게 나올지 몰라요!”
“역시 내 딸이야. 서둘러 다른 왕국에서 뜯어내 봐야겠다.”
“제가 로이엄 기사단을 끌고 연합 왕국에서 갚지 못한 채권을 들고 협박하러 갈게요!”
나는 진심으로 로이엄 왕국의 미래가 걱정됐다.
***
“그래서.”
악마가 보라색 눈을 요사스럽게 번뜩였다.
“네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무엇이든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다.”
요한이 악마를 깔아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네놈은 귀도 달린 주제에 말을 꼬아 듣는군.”
“허, 참 대단하다니까.”
억겁의 시간을 산 악마에게도 요한 같은 인간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악마인 나 역시 그 여자의 저주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건 불가능해.”
물론 요한처럼 악마의 손에 떨어지지 않은 자도, 혼돈인 악마의 힘을 이렇게까지 제힘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자도 처음이었지만.
“이럴 때 가장 편리한 방법은 따로 있지. 어떤 저주에 걸렸든, 어떤 대가가 필요하든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는 제물이 있다.”
“그런 게 있다고?”
“요정.”
악마가 입꼬리를 귀까지 찢어 킬킬 웃었다.
“요정을 제물로 바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