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사랑해, 네가 바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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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사랑해, 네가 바라던 것처럼
202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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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도저히 그녀를 끌어안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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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만해?’
하지만 서러운 에스텔의 목소리는 잊혀지지 않고 계속 귓가에 선명했다. 날이 선 에스텔의 조소와 절박한 애원이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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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게 요한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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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발 살려줘.’
눈을 감았는데도, 망막에 새겨진 듯 에스텔의 서러운 얼굴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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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니면 도대체 뭘 해야 하는데? 네가 살고 싶으면 무릎 꿇고 너한테 울면서 빌라고 했잖아. 그렇게 하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한 건 너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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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 번만 용서해 줘. 예전에, 너도. 너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내가 이렇게 빌면, 살려주겠다고 했잖아.’
순한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보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질 정도로 애달프게 애원하던 에스텔. 한없이 아름답고 귀한 것만 보고 자랐을 것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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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고 빌어!’
이제 에스텔을 안고 있으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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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빌어. 살고 싶다고. 어떻게든 살아 있고 싶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리 거칠게 굴었나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상냥하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 때문에.
에스텔이 그 두려웠을 시간을 빌미로 애원할 정도로 절박한 상태라는 게 너무 실감 나서. 그때의 자신이 가슴을 더욱 쓰라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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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그만해야 하는데? 뭘 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건데?”
요한은 느릿하게 호흡을 삼키며,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잡고 있던 여린 어깨가 바스러질 것처럼 연약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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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에스텔에게 바라는 것…….?’
요한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스스로가 낯설었다. 평소의 요한이라면, 이런 상황에 쉽게 대처했을 것이다.
이런 상대를 다루는 건 쉽다. 보통 큰 충격에 빠져 있을수록 요한의 의도대로 휘둘리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느 것 하나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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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애초에 요한은 에스텔이 자신이 사랑받지 않은 딸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이렇게까지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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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내 얼굴 봐.”
결국 요한은 품에 가두었던 에스텔을 꺼내어 얼굴을 마주했다. 서러운 티가 묻어나는 에스텔의 얼굴을 보자 불쑥 심장이 죄이는 듯한 괴로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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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세상에서 가장 잘난 것처럼 굴던 요한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렇게 고민해서 꺼낸 말이 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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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었어.”
고작, 이런 말뿐이라서.
그래서 힘들어하는 에스텔을 위로할 수 없어서. 하다못해 그녀가 힘들어하고 있던 원인이 자신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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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후회인가?’
요한은 에스텔이 화내고, 팔로 제 가슴을 밀치는 것도 묵묵히 견뎠다. 어떻게든 에스텔이 더 힘들지 않게 해야 했다. 그녀가 하는 오해를 풀고, 진심을 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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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 순간, 에스텔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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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넌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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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갑자기 머릿속 실이 뚝 끊기는 것 같았다. 요한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제 얼굴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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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어쩌면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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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에스텔을 사랑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 주제로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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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아?’
분명 내 감정이다. 에스텔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요한은 화가 났다. 그 말이 꼭, 에스텔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처럼 들려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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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내가 언제 너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적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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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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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멋대로 내 마음을 단정하지?”
요한은 제 마음속이 비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가 파도치는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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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한은 나를 사랑한다고 한 적도 없잖아.”
에스텔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요한은 이상하게 에스텔이 금방 부서질 설탕 인형처럼 느껴졌다.
에스텔이 요한의 붉은 눈을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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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날 사랑해?”
요한이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던 에스텔이 붉은 피를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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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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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이건 중요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손으로 입은 막은 에스텔이 요한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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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해?”
요한이 막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에스텔의 상태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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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슨…….’
에스텔의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존재감이 흐릿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아 의사를 부르려 했으나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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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다.’
저주가 온몸을 잠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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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저주가…….’
그때 에스텔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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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답 안 해줘?”
그 순간 요한은 다른 것에 너무 정신이 팔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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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에스텔. 나는-”
요한이 아직 제대로 직면하지 못한 감정을 얘기하려던 순간, 잠깐 눈을 깜빡이는 듯했던 에스텔이 풀썩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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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쿵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요한은 바짝 몸을 굳힌 채 에스텔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상태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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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에스텔은 살아 있다.
전에도 그랬듯이, 원인 모를 이유로 잠들었을 뿐이다. 에스텔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요한이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에스텔이 숨 쉬는 소리에 맞춰 요한이 겨우 호흡했다.
요한은 끓어오르는 두려움과 무력감을 억누르며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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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평소처럼 깨어날 거야.’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 테니까. 하지만 더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며 움직일 시간이 없다는 게 더더욱 증명됐다.
그는 절대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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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을 때, 요한은 고민했다.
어린 시절 사랑이란 걸, 소중한 것이란 걸 겪어보긴 했으나 너무 오래되어 이게 어떤 것인지, 이게 에스텔이 생각하는 그 감정이 맞는지 고민됐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이지만, 요한은 에스텔에게 최대한 솔직해지고 싶었다.
세상 모든 이를 속여도 에스텔에게만큼은 거짓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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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가 중요해.’
하지만 그 솔직한 고민에서 요한이 손에 얻은 건, 에스텔이 원하는 대답도 듣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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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바라는 걸 말하면 되었는데.’
에스텔.
요한은 에스텔을 볼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하지 않은 일을 감수하게 했으며, 복수란 삶의 목표마저 잊게 했다. 심지어 복수의 처음부터 돌이켜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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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나는 네가…….’
요한이 잠든 에스텔을 들어 올리며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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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면 네게 백번이라도 말해줄게.”
에스텔은 텅 빈 요한에게 충동을 선물하고, 알지 못하는 감정을 자극하고, 계속 그녀에게 집착하게 했다.
에스텔의 모든 것이 알고 싶고, 그녀를 괴롭힌 모든 것을 가장 끔찍하게 없애버리고 싶고, 에스텔이 자신 없이는 살 수 없으면 좋겠다.
이건 언제부턴가, 복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요한은 그러고 싶었다. 에스텔의 세상에 요한만 남게 하고 싶다.
그래서 그녀의 눈꺼풀 아래 감긴 눈이 오로지 그만을 담을 수 있게, 그녀의 소중한 손과 발이 그만 만질 수 있게, 그녀의 귀는 그의 목소리만 듣고, 호흡은 그만 들을 수 있고, 그렇게 심장은 그를 향해서만 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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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원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무엇이든 해줄 수 있고.”
요한은 복수자답게 괴물처럼 망가진 스스로를 자각하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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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건 잘 감추면 그만이야.’
에스텔이 놀라거나 무섭지 않게 해주면 된다. 이 끔찍한 모습은 죄다 감추고 도려내어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여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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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너는 더 불안하지 않게 되겠지.”
지독하리만큼 끔찍한 독점욕이 심장 부근에 자리 잡아 흉포하게 뛰었다. 요한은 에스텔을 품에 안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느새 밤이 지나 떠오른 아침 해가 에스텔의 백금발 위로 쏟아졌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하지만 요한은 미친 남자답지 않게 나른한 목소리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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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바라던 대로, 너를 사랑할 테니까.”
그렇게 망가진 괴물이, 어느새 제 심장이 된 여자에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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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우린 영원히 함께일 거야.”
***
미르유는 감옥에서 자결했다.
쥬티 남작 부인이 미르유를 걱정하는 마음에 넣어 준 물품으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모두에게 미안합니다. 더 이상 제 죄를 갚을 길이 없어 죽음으로나마 모든 일을 속죄하고자 합니다.
저에게 속은 헤센과 다이아나 공주님, 로이엄 왕비님, 사생아인 것을 덮고 저를 친딸처럼 보살펴준 우리 가족들, 마지막으로 제 거짓말에 피해 입은 성녀님께 살아서 사죄하지 못하는 것에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한창 미르유의 실체를 깨닫고 충격받았던 사교계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아무리 미르유의 죄질이 악독했다고 하나, 아직 재판을 통해 제대로 그 죄질이 낱낱이 밝혀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차마 죽은 이를 두고 무어라 할 수 없다는 꺼림칙함과 함께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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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큰 죄를 저질렀으면 죽음으로 도피할 생각을 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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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쥬티 남작 영애의 나이가 있으니, 두려운 마음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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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직 신전 측에선 아무런 이야기도 안 나왔지요? 여기 신전에 기부하는 귀족이 몇인데 아직 아무 이야기도 안 해줄 수 있어요? 어째서 성녀님이 로이엄 왕가를 기만하는 거짓말에 동조해 준 건가요?”
신전 역시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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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태를 어떻게 합니까? 이전처럼 계속 침묵해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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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안 되지요. 그 질 나쁜 여자를 처벌함으로써 죄 없는 성녀님은 화를 피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사석에서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한 왕가의 공식적인 발표장에 처음 존재를 드러내면서 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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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은 어째서 그런 짓을 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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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에서만 자라신 탓에 세상일에 잘 모르셨던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성녀 스텔라는 벌써부터 그 진실성에 대한 의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성녀는 신전, 더 나아가 신전의 심장인 성국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존재였기에 신관은 물론, 고위 신관인 추기경마저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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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께서 무슨 말을 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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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순진하고 착한 분답게 본인이 축복을 내린 사람이 그런 끔찍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추기경 시몬이 성녀가 머무는 방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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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께서 이 시련을 잘 견디셔야 할 텐데.”
그때 성녀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밤새 기도를 했는지 슬퍼 보이는 눈가에서 피로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피로도 그녀의 미모를 감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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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
회의를 위해 모였던 추기경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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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회의실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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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어려운 와중에 혼자 숨어 있을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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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녀님의 잘못이 아닌데…….”
추기경들의 걱정에 스텔라 성녀가 긴 속눈썹을 애처롭게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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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서는 칼을 든 강도에게도 먼저 나서서 자비와 선의를 베풀라 하셨어요. 저 역시 이번 일을 신께서 내리시는 시련이라 생각하려고요.”
가냘프지만 신실한 스텔라의 말에 추기경들이 모두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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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마십시오, 성녀님. 성녀님은 성국의 보물입니다. 그런 분께서 힘든 일을 겪게 두고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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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저희가 나서서 다 해결하겠습니다. 이까짓 소문쯤이야 저희가 다 잠재울 수 있습니다. 신께서 저희의 뒤에 있으신데, 어찌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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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 폐하께 도움을 청하면 어떻게든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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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고마워요.”
스텔라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힘에 부친 것처럼 몸을 비틀했다. 그러자 추기경들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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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성녀님!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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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에요. 최근 마음이 좀 불편했을 뿐이에요. 그보다…….”
시몬 추기경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은 스텔라가 슬며시 한마디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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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께 제 진심을 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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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께 말입니까? 하지만 황제 폐하는 신전의 편지를 받아주시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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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 폐하의 직인이 찍힌 편지지를 쓰면 되지 않나?”
성황의 편지를 관리하는 추기경이 곤란한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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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성황 폐하의 허락을 받아, 긴급할 때만 사용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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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 폐하께는 나중에 설명 드리면 되네! 어차피 성녀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시는 분이 아니신가?”
시몬 추기경의 호통에 추기경들은 큰 절차 없이 스텔라에게 바로 편지를 대령했다. 스텔라는 곤란한 듯 눈썹을 내리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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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힘드시다면 나중에 해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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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성녀님. 성녀님의 뜻을 가장 먼저 이루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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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편지를 받아 든 스텔라는 방에 올라가 바로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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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괜찮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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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멋대로 네 힘을 사용해서 네 몸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네 생명력이 저주에 빼앗기는 일은 없을 거다. 그걸로 어떻게 안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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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말이 중요한가? 애 안부부터 물어야지!
나는 소란스러운 나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깨어났다. 바로 내 눈앞에 요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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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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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내가 또 쓰러졌나 봐. 이걸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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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보다, 에스텔.”
요한이 내 손등을 소중히 들어 입 맞췄다. 뜨거운 입술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 그리고 그가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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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자마자 말하고 싶었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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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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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해.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야릇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입 맞추던 네 번째 손가락을 깨물어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입술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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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준 반지 안 끼고 다니면, 반지 대신 내 자국을 남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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