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어차피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
(80/182)
80화 어차피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
(80/182)
80화 어차피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
2022.09.06.
요한은 대단히 잘난 남자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태어난 순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어렵게 생각하던 일들을 너무 쉽게 해내곤 했으니까.
가문이 무너져도 요한은 완벽히 복수를 해냈다.
하지만 에스텔.
이 여자를 대할 때면, 요한은 잘난 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곤 했다.
“그 배후가 리베르탄이었다고?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아낀다던 입양 딸에 대한 악소문을 직접 냈어?”
“예, 소문의 진원지였던 모르셀리 남작 부인과 리셀로 기자가 리베르탄에서 소스를 받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본인들도 이제야 기억난 것처럼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나? 그동안 일 처리를 얼마나 모자라게 했기에 이 꼴이 나지?”
“죄송합니다, 주군.”
그렇게나 철저히 조사했던 모든 일이 어그러졌다. 완벽하던 요한의 결과는 실패와 오만으로 얼룩졌다.
그래서 요한은 새로이 배후를 캐내려 했다.
‘배후가 신전일 줄 알았는데.’
여기서 또 리베르탄 공작가가 나오고 말았다. 애초에 리베르탄 공작가는 입양할 때부터 에스텔을 친딸처럼 아끼지 않았던 거다.
‘애초에 이게 더 리베르탄 공작가다운 행동이지.’
리베르탄 공작가처럼 악독한 가문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입양아에게 헌신할 리 없다. 처음 요한도 의심했다.
하지만 모든 증거가 완벽했고, 그리고 또 한순간 모두가 최면에 걸렸다 깨진 것처럼 모든 증거가 뒤집혀 버렸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친딸의 대체재로 데려간 만큼, 사랑하지 않는 정도일 거라 여겼는데.’
애초에 리베르탄 공작가는 대체재 정도로도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나서서 악녀라는 소문을 퍼뜨릴 리가 없으니까.
‘에스텔이 이 사실을 알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에스텔은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부모로 여기고 있기는 한 것 같았다.
요한이 리베르탄 공작가가 배후였다는 진실을 터뜨린 이유도 그 실낱같은 에스텔의 기대를 부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에스텔 역시 리베르탄 공작가를 증오하도록.
그렇게 둘의 사이가 더 공고해질 수 있게.
하지만 에스텔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최소한 신문지를 찢어버리며 분노할 줄 알았는데. 그에게 복수해 달라고 조르고, 의지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
에스텔은 담담했다.
“이런 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거든.”
이미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 대해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있던 게 바로 느껴졌다. 그전까지 그래도 부모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던 것과 다르게.
‘이쪽이 진짜인가?’
전혀 슬프지 않은 에스텔을 보며, 요한은 의문에 잠겼다.
‘애초에 알고 있던 건가, 아니면 은연중에 눈치를 챘던가.’
“몸이 약해서 맨날 저택에 있다 보니 소식에 둔해서…….”
“그런데 왜 표정이 그렇지?”
“응?”
요한은 에스텔을 속내를 바닥까지 긁어내 파악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남색 눈동자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당황을 숨길 틈도 없이 하얗게 질린 에스텔. 요한은 그런 에스텔을 보며 그동안 쌓아뒀던 퍼즐 조각을 맞췄다.
“지금 너, 하나도 슬프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어.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보통은 본인이 저지른 일이어도 악녀 취급을 받으면 억울해한다. 하지만 그녀는 억울하게 악녀 누명을 쓰고도, 별로 없앨 마음이 없어 보였다.
‘미르유 쥬티에게 복수하는 과정도 그렇지.’
에스텔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다.
악녀라는 소문을 없애려고 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악녀 누명이 흔들리게 되긴 했지만, 에스텔이 그 소문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친분을 가진 듯했던 다이아나 공주 같은 사람들에게 제 사정을 설명했을 터이니.
‘미르유가 저지른 죗값만큼 처벌하되, 악녀 소리를 계속 들으려는 이유가 뭐지?’
에스텔이 자기를 음해한 기자들에게 복수하지 않으려 하자, 그 의문은 더욱 커졌다.
‘난 네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나는데.’
이 감정이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요한은 에스텔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고, 에스텔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과거에 에스텔이 억울하게 상처받은 것 이상으로 갚아주기를 바랐다.
에스텔이 아무렇지 않아 하더라도,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니까. 모두가 한 사람을 악질적으로 매장하려 했던 일 아닌가?
‘마님께서는 본인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 모두에게 밝히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지요.’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알려진 걸로도 많이 곤란해하셨어요.’
설마.
‘도망칠 생각이라서 그랬던 건가?’
억울한 피해자였던 에스텔이 갑자기 사라지면 요한에게 나쁜 소문이 돌지도 몰랐다. 심지어 시한부 병으로 죽는다 해도, 요한은 이상한 오해를 사게 될 터다.
‘에스텔이 악녀인 채 죽어버린다면…….’
요한의 명예에는 어떤 흠결도 남지 않게 될 터다.
“정말, 할 말 없어?”
에스텔이 어떤 말을 하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요한은 제 상정 범위 내의 말을 할 것이라 여겼다.
“나, 나는 그러니까 나는…….”
하지만 에스텔의 눈물에 왠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요, 요한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제 진심을 꼭꼭 숨겨둔 에스텔에게서, 진실을 캐내려면 사람을 당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 알았다면, 다르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아마도 에스텔은, 처음부터 솔직히 털어놓지 않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요한이 그런 자신에게 실망해서, 버릴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끝나는 게 무서워서.”
에스텔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떨렸다.
“내가 잘못했어. 물어보면 물어보는 대로 다 대답해 줄게. 그동안 널 속여서 미안해.”
요한은 참담하고, 제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었다.
‘멍청한 새끼.’
아무래도 에스텔은 요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리베르탄에서 학대당했던 모양이다. 벌벌 떨고 있는 그 모습이 벌 받기 직전의 어린애 같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충격적이었다.
요한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멍하니 에스텔을 바라보고 있자, 울먹거리며 애원하던 에스텔이 충격적인 행동을 했다.
“그러니까 제발 살려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던 에스텔이 그의 앞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하얗게 질린 고운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안쓰럽게 떨고 있던 에스텔은 급기야…….
두 손을 모아 요한에게 빌기 시작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
“그러니까 제발 살려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과거 요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면, 살고 싶다고 해. 나한테 그렇게 부탁해. 살고 싶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그것만이 내가 당장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 빌어. 살고 싶다고. 어떻게든 살아 있고 싶다고.’
요한이…… 빌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살려줘.”
나는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고 요한을 올려다봤다. 역광 때문에 요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랑받은 딸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남아서. 모든 게 끝날까 봐 그랬어.”
나는 살고 싶었다.
“지금 와서 이렇게 말해봐야 의미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래서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울면서 빌기 시작했다.
‘너무 비참해.’
속이 뭉그러져 까맣게 타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한 번만 용서해 줘. 예전에, 너도. 너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내가 이렇게 빌면, 살려주겠다고 했잖아.”
눈물이 울컥 치밀어온 눈가를 손으로 꾹 누른 뒤 요한에게 빌었다. 어차피 바닥을 빌빌 기고 있는 건 마찬가지인데, 내 안의 내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번 한 번만…….”
“알았어.”
요한이 무릎을 꿇고 나를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그저 나를 안아주는 것뿐인데, 갑자기 목이 콱 막힌 것처럼 숨이 안 쉬어졌다.
“알았다고.”
단단한 손이 내 머리 전체를 감싸고, 다른 팔이 내 허리를 받쳐주었다. 온몸이 물에 잠긴 것처럼 요한에게 둘러싸였다.
“그러니까 그만해.”
요한은 분노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억눌린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가득 들어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겨우 호흡을 그러모은 내가 그에게 안긴 채로 물었다.
“……뭘 그만해?”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요한이 내 비참한 모습을 보고 비웃지 않아서, 무작정 화를 내지 않고 있어서 갑자기 염치가 사라져 버린 모양이다.
“지금 이게 요한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어?”
지금은 요한이 내게 화를 내야 할 상황이다. 사랑받던 딸이라고 거짓말하던 여자의 가면을 벗겨낸 순간일 테니.
‘나를 몰아붙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잘해주는 건데.’
“그러니까 선물이랍시고 날 여기 데려온 거잖아. 리베르탄에서 날 모함한 정황을 들고 와서 이러고도 사랑받았냐고 물어보고 싶었던 거잖아.”
하지만 나는 더 서러워졌다.
탄탄한 요한의 품이 지금 나를 보호해 줄 것만 같아서.
어느새 익숙해진 요한의 온기가 그의 마음인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게 전부 마음에 들지 않고 화가 나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게 아니면 도대체 뭘 해야 하는데? 네가 살고 싶으면 무릎 꿇고 너한테 울면서 빌라고 했잖아. 그렇게 하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한 건 너였잖아.”
“…….”
“내가 뭘 그만해야 하는데? 뭘 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건데?”
요한이 그런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요한의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
“……에스텔.”
그 순간, 나무들이 나를 걱정해 줬다.
-아가. 괜찮니? 이상하게 네 상태가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그래.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에덴 로즈 몇 개가 시들고, 몇 개는 갑자기 빛이 나면서 진정되는 네 기운이 혼란스럽게 날뛰고 있어.
-지금 어디 위험하거나 힘든 상황이라도 생긴 것이냐? 위험하다면 짧게 우리한테 얘기해 보거라. 이제 회복된 네 힘으로 근처의 나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나무들에게 대답해 줄 정신은 없었다. 그러자 나무들은 상황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빨리 다른 나무들에게 연락해 봐! 왜 우리 아가가 이렇게 힘든 상황인데 어디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되는 거야?
-왜 연결이 끊긴 것도 아닌데 왜 다른 나무들에게 상황을 보게 할 수가 없지? 세상에 나무 없는 곳도 있나?
-나무가 없는 곳에 있으면 더 큰 일인 거잖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가가 요정의 힘을 완전히 터득할 수 있게 기다렸는데 더 기다릴 수 없겠어.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아가 대신 우리가 정령력에 간섭이라도 하겠다고? 그러면 저주는 풀려도 요정의 힘에는 더 적응을 못 해서 혼자선 사용하기 어려울 텐데…….
-애가 잘못되면 나중이 무슨 소용이야!
가팔라진 숨을 한 번 고른 요한이 큰 손으로 내 양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에스텔, 내 얼굴 봐.”
‘이상해.’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근사한 남자였던 요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고 우아하던 요한.
‘내가 생각하던 얼굴이 아니야.’
요한의 눈매가 아픈 듯 일그러져 있었다. 분노로 타오르던 요한의 붉은 눈동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살짝 흔들리기까지 했다.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준 그가 한 음절씩 말했다.
“내가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었어.”
“그러면 네가 바랐던 게 뭔데?”
나는 요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숨기고 있던 걸 캐묻고, 알아서 사죄하기를 바랐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다 안다고 그런 거잖아.”
상대를 궁지에 몰고, 원하는 답을 끌어내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건 흑막인 요한의 특기다.
‘아마 미르유에 대해 내가 복수하는 걸 보면서 내내 준비한 거겠지.’
“이게 네가 원했던 게 아니면, 지금 내가 오해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내가 또 뭘 잘못하고 있다는 거고?”
솔직히 나는 요한을 믿을 수 없었다. 불가능한 게 없다는 사람, 그렇게나 똑똑하고 대단한 이 남자가 노골적으로 날 위한 함정을 파놓고 아니라 변명하는 게 이상했다.
이건 누가 봐도 날 몰아붙이기 위한 함정이니까.
“그럴 리 없는 거 다 알아.”
내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길이 떨렸다. 단단하게 다물린 그의 입매도 움찔 떨렸다. 내 눈앞에 보이는 요한은, 정말로 이런 걸 바라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겠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방식으로 보게 마련이니까.
“이제 됐어. 둘러서 이야기하지 말고 솔직하게 네가 말하고 싶었던 대로 말해도 괜찮아. 어차피…….”
나는 두 손을 뻗어 요한의 가슴팍을 밀어 그와 더 거리를 두려 했다.
“어차피 넌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
“내가?”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던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얌전히 내 팔이 거리를 벌리는 대로 가만히 있어주던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 순간, 온몸이 차갑게 식으며 뜨거워졌다.
‘왜…….’
평소라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느낌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