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나 버리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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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나 버리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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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나 버리면 안 돼
2022.09.02.
나는 주위에 갑자기 피어난 꽃들을 보고 엄청난 위기를 느꼈다.
‘이대로 내가 요정인 거 들키는 거 아냐?’
긴장돼서 침을 꿀꺽 삼켰지만, 다행히 요한은 알아서 넘어가 줬다. 그래서 나도 태연히 눈을 뜨며 요한에게 말했다.
“뭐야. 나만 깜짝 놀랐잖아! 자꾸 이런 식으로 장난칠래?”
“미안. 네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 장난치게 되네.”
요한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하지만 마주친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이상할 정도로 깊숙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요한이 나를 또 어딘가로 데려가겠다면서 손을 잡고 안내했다. 여객선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조심해. 계단이 가파르니까.”
“계단에서 미끄러질 정도는 아니거든?”
“아무것도 없는 복도에서는 혼자서 넘어지지만?”
“그건 실수였던 거고!”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랑 대화하면서 걷다가 정신 팔려서 넘어진 거였다.
호화 여객선답게 배의 내부 역시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분명 뭔가 있는데…….’
원래 나는 상대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상대가 내가 가장 많이 신경 쓰고 있는 요한이라면 더욱 그랬다.
방금 전 요한의 마음에 무슨 변화가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모를 두려움이 몰려왔다. 갑자기 여객선 지하로 내려가는 것조차 불안했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거지?’
깍지를 끼며 걷고 있던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 이번엔 진짜 놀래키지 않을 거지?”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요한은 맞잡은 두 손을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방금 전에도 거짓말했잖아,”
“거짓말은 아니지. 그건 잠깐의 서프라이즈를 위한 준비에 가깝지.”
“무슨 이유가 됐든 거짓말은 거짓말이거든?”
요한이 그런 내 얼굴에 픽 웃었다.
“내가 이렇게 신뢰가 없을 줄 몰랐는데.”
“그러니까 좀 잘해봐. 맨날 불안하게 하지 말고.”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라 나도 모르게 본심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네가 자꾸 나를 속이면, 뭐가 진짜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단 말이야.”
“…….”
복도의 끝에 방 하나가 보였다. 요한은 방을 두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붉은 눈동자는 의미 모를 감정을 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나는 네가 무엇을 해도 너를 믿겠지만.”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요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헷갈릴 것 없어. 모든 게 다 진짜니까. 네가 보고, 느끼고, 겪는 모든 게 진짜야. 쓸데없이 의심 같은 거 하면서 불안해할 거 없어.”
다정하게 속삭인 요한이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애틋하게 움켜쥐었다가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건 다 헷갈리게 한 내 잘못이겠지. 믿음을 주지 못해 미안해.”
“아니야. 요한이 사과할 게 뭐 있어. 나도 가볍게 해본 소리야.”
나도 모르게 샌 본심이 너무 무겁게 들리지 않게 손사래 쳤다. 그러자 요한은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천천히 문을 열어줬다.
“앞으론 네가 불안해하지 않게 해볼게.”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한번 문 열어봐. 이걸 열면, 네 마음이 덜 불안해질 테니까.”
또 다른 선물?!
‘설마 이번에도 사람이 있진 않겠지?’
흑막이 그렇게 독창적인 선물을 두 번씩이나 연속으로 준비하진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래도 긴장을 풀지 않고 조심스럽게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회색으로 된 기둥 근처에 신문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요한을 힐끔 보자, 요한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줬다.
‘내 신문들이잖아?’
방금 전 기자들의 목에 스크랩되어 있던 것과 달리 전문이었다. 대충 훑어봐도 대문짝만하게 내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게 다 나에 대한 것이란 말이지…….’
신문 뭉치가 몇십 개씩 쌓여 있었다. 심지어 모여 있는 신문 전부 다 다른 날짜에 발행된 것이다.
“요한. 이 신문들은 왜…….”
“네 소문을 조사하다가 모으게 된 것들이야.”
요한은 묘한 눈길로 내 손에 들린 신문을 바라봤다.
“그러다 황당하게 퍼지는 기사들의 선두에 배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감옥에 있는 미르유에게서 확실하게 캐낼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그 배후가 누군데?”
“리베르탄 공작가.”
요한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신문 뭉치 한 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신사적인 요한이 삐딱한 미소를 짓고 있자, 묘하게 불량해 보였다.
“물론 리베르탄 공작가만 했던 건 아니야. 다른 귀족들도 꽤 많이 참여했어. 하지만 제일 먼저 시작한 곳은 리베르탄 공작가였어.”
역광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빛났다. 신문지를 쓰레기처럼 널브러뜨리는 와중에도, 요한의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 향해 있었다.
“참 이상하지.”
“…….”
“그동안 너에 대해 조사할 땐 이런 얘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어. 이전까지만 해도 이 기자들은 리베르탄과 전혀 관련이 없었고.”
“……그런데 갑자기 리베르탄과 관련된 증거가 나왔다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떼어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요한이 한쪽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글쎄, 나도 궁금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그렇게 꼼꼼히 조사했는데, 이 신문을 쓴 기자가 실은 리베르탄에 드나들었단 걸 기억해 낸 증인이 이제야 나왔다는 게. 아무리 사람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도 그렇게도 일관되게 이상할 수 있는 건지.”
붉은 눈동자는 사냥감을 잡아먹기 직전의 맹수처럼 흉포했다. 목소리에서도 왠지 모를 분노가 느껴졌다.
‘무서워.’
요한의 시선을 마주 보는 것이 두려워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떨렸다. 바닥에 마구 버려진 신문들이 보였다.
에스텔 리베르탄.
작은 글씨 속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내 이름.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그런 짓까지 했단 말이야?’
맹세코 처음 들은 일이다.
‘난 그냥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건 줄 알았는데…….’
실제로 방금 요한이 데려왔던 기자들 역시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제국에서 가장 화제성 있는 나를 헐뜯은 것이라고 증언하지 않았나?
내가 악녀가 된 것도 그래서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운 좋은 누군가를 동경하는 만큼 미워하고 싶어 하니까.
‘요한이 나를 믿어줄까?’
나는 이 일의 피해자지만,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그토록 오래 살았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마디로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거다.
‘그 의문점이란 것도 그래.’
이제야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한 짓을 알았는데, 그 기현상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알겠는가?
신문지를 밟고 요한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야에 요한의 구두가 보였다.
한참을 조용히 나를 보던 요한이 물었다.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모르겠어.”
요한의 우아하고 길쭉한 손이 내 턱을 쥐어 들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마주친 요한은 다행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내 악명까지 조작했다는 사실은 몰랐어. 생각해 보니까, 그러게. 부모님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네.”
나는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나를 미워해서 사교계에서 미르유가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을 용납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은 날 악녀로 만들고 싶어 했으므로, 미르유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내 허탈하면서도 조용한 미소에 요한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거 외엔, 하고 싶은 말 없어?”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나는 그림처럼 잘생긴 요한을 보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건,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거든. 몸이 약해서 맨날 저택이 있었다 보니 소식에 둔해서-”
“그런데 왜 표정이 그렇지?”
“응?”
꼼지락거리고 있던 손을 잡고 내 뺨을 만졌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길래?’
요한은 그런 내 반응에 이를 꽉 깨물며 천천히 말했다.
“지금 너, 하나도 슬프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어.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
“정말, 할 말 없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요한이 날 의심하고 있어.’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뒷목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났다. 두려운 마음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나는 많이 수상했는데…….’……
리베르탄 공작가가 나를 악녀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건 나에게도 꽤 충격적인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난 이미 두 사람에 대한 미련을 정리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요한 앞에서 그대로 드러내 버리고 말았던 거다.
‘계속 연기하고 있어야 했는데.’
그동안 나는 그냥 ‘에스텔’로 요한의 앞에 와 있던 게 아니었다. 나는 ‘리베르탄에서 사랑받는’ 입양아로서 요한의 앞에 있어야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어느샌가 요한의 앞에서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렸던 것 같다. 너무 경계를 놓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간단하게 덫에 걸려버렸다.
‘이미, 신문까지 이렇게 조사한 이상 요한은 내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거야.’
본능적인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런데 와중에 나도 뭔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다못해 처음부터 사랑받지 못한 척했으면 모를까. 요한의 눈에 내가 얼마나 가증스러워 보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 나는.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사랑받은 딸인 것처럼 순수한 행세를 했는데.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위기일수록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여태 정답을 걷고 있다 믿었는데,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버린 듯했다.
“요, 요한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목소리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왜 또 울려고 하지?’
사랑받던 딸 연기를 하다가 들켰으니, 이런 모습조차 더 안 좋게 보일 거다. 그러니 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몸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더 살벌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겁에 질린 나는 요한의 옷소매를 애써 잡아당겼다.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앞뒤 설명 없는 본심이 또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이 끝나는 게 무서워서.”
“…….”
“내가 잘못했어. 물어보면 물어보는 대로 다 대답해 줄게. 그동안 널 속여서 미안해.”
요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그러니까.”
사랑받지 못한 딸인 나는 더 이상 복수 대상으로 가치가 없으니까. 그걸 확실하게 알아버려서.
‘가치 없는 나를 버릴 생각인 건가?’